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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오군란으로 청·일본 역학관계 복잡해지며 조선의 개혁 좌절되고 청·일 전쟁 명분 제공해

    집권 세력은 위기의식을 가졌지만 멸망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예상하지 않은 것 같다. 13년 정도 일찍 외세에 개방당한 일본은 개혁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고, 국제관계도 그레이트 게임의 주변부로 움직이면서 변화무쌍했다. 그 때문에 조선에 반전의 시간과 기회는 있었고, 실제로 36년 뒤에야 일본에 합병당했다.명성황후 정권의 외교정책과 외교관 등 외국인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개혁과 구국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판단된다. 1876년에 1차 수신사를 파견했다. 김기수는 일본의 급속한 발전을 목도하며 충격받아 <일동기유(日東記游)>를 써 정부에 보고했다. 1880년 6월에는 2차 수신사로 김홍집 일행을 파견했고, 12월에는 정부 조직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외교·내정·군정 등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했다. 이어 1881년 4월에는 ‘조사 시찰단’이라는 이름의 ‘신사유람단’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이때 62명은 74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각 분야를 치밀하게 조사한 뒤 100여 책의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 중간인 5월에는 장교를 양성하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9월에는 ‘영선사’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유학생을 파견해 청나라의 양해하에 군수 공장 등에서 화약과 탄약 제조법을 비롯한 군사 분야의 기술과 외국어를 배우게 했다.한편 자주외교를 표방하면서 청나라에는 책봉 체제를 없애고 근대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으며, 일본에는 병자수호조약의 불평등 조항을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 국교 수립을 추진하고, 김홍집이 가져와 개혁과 외교정책의 모델로 삼은 <조선책략>을 보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