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오랑캐 나라로 간 여행자들(上)
연암이 올라 ‘산해관기’를 쓴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 산해관은 산과 바다가 만나는 관애(성벽)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제공
연암이 올라 ‘산해관기’를 쓴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 산해관은 산과 바다가 만나는 관애(성벽)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제공
어느 시대에나 실패와 생명의 위협을 예견하면서도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의식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1765년 35세의 홍대용은 연행사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에서 신세계를 경험한 뒤 신기하고 유용한 지식을 갖고 귀환했다. 이어 15년 후인 1780년 초여름에는 그의 영향을 받은 박지원이 늦은 나이인 43세의 몸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단동시 외곽인 구련성에 닿자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이라고 잘못 인식한다. 이어 봉금지대를 통과해 청나라의 경계선을 넘어 봉황성에 이르자 고구려를 회고한다. 이미 역사를 공부하고 온 그는 성리학자들을 질타하고, <자치통감>까지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역사관을 전개한다. 평양과 패수의 위치, 지명의 이동, 낙랑문제 등 예민한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는 북경을 거쳐 황제의 여름궁정인 열하까지 방문하고 다섯 달 만에 귀국했다. 그는 자료를 수집해 3년에 걸쳐 무려 26권에 달하는 기행문 <연암일기>를 썼다. 그가 죽을 때까지 수정 보완한 그 책은 필사본 때부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

궁금하다.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났을까?

닫힌 나라에 살던 조선사람에게 외국이면서 침략국이고 대국인 청나라의 문물과 실상은 신기함과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더구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문체로 쓰인 <호질전> <허생전> 등은 현실을 뼈아프게 풍자했으니 대리만족을 줬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청나라와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상호 비교하고, 조선에 필수적인 서양 문물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일이다. 그렇다면 열하일기는 현실을 파악하는 학습서와 새로운 대안까지 제시한 지침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산해관 아래 영평부 조선성 유적. 연행사들이 원(고)조선과 연관있다는 설을 언급한 유적.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제공
산해관 아래 영평부 조선성 유적. 연행사들이 원(고)조선과 연관있다는 설을 언급한 유적.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제공
당연히 형식을 벗어난 문체와 체제 비판적인 내용, 숨겨놓은 메시지로 인해 기존의 세력가 및 성리학자들의 비판을 샀다. ‘문체반정(새 문장을 배격하고, 소설 등의 수입을 금지한 정책)’을 주장한 정조로부터 질책까지 받았던 ‘금서’에 가까운 책이었다.

박지원은 왜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 책을 집필했을까? 또 적지 않은 가난한 학자들이 자비를 들여가며 연행사를 따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 상황과 사명감 때문이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황폐해진 토지, 포로, 질병, 대량 아사로 ‘절망의 땅’이 돼버렸다. 곳곳에 만연한 패배감, 상처받은 자존심, 극에 달한 관리들의 탐학, 민란 발생 등으로 조선 체제는 총체적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박지원의 스승인 이익도 정확하게 갈파했지만 한정된 관직과 토지 때문에 공정한 분배가 어려웠다. 탐욕과 체제의 특성상 관직과 토지의 집중 현상도 심해졌다. 권력과 부를 독점한 세력은 유례없는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성리학’이라는 절대 논리를 명분으로 내세운 채 사상투쟁의 형태로 빠져들었다. 피를 부르는 진영 싸움 속에서 사도세자가 죽었고, 임금의 죽음마저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외부와의 직접적인 교류는 물론이고 간접적인 교류조차 막았다. 정보를 독점하고 자유의지를 억압했다. 이에 지식인의 반성과 주도사상의 변화, 사회구조 개혁이 필요한 시대 상황이 도래했다.

그렇다면 어떤 세력이 어떤 사상을 갖고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추진하고 주도했을까? 18세기 들어 일단의 이상주의자와 젊은 학자들은 이론을 만들고 현실 개혁 의지를 표출했다. 뒤이어 신분의 차별 때문에 소외당하는 서얼들이 선봉에 섰다. 이들은 민란이나 변란을 일으킬 수 없는 지식인이라는 한계 속에서 일종의 사상투쟁과 개량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성리학을 변화시키거나 대체할 이론과 사상, 정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전통사상은 이미 개국 초기부터 조직적으로 파괴돼 기반이 무너졌고, 전통신앙은 미신으로 몰리다 스스로 오염된 지 오래였다. 불교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고, 절이 산속에 있어 ‘세’를 규합할 수 없었다. 정제두 등 일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성리학의 변형으로 ‘지행합일론’을 내세우는 양명학을 정착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만 병자호란 때 포로로 끌려간 소현세자 일행과 일부 포로가 귀국하면서 가져온 신문물과 서양 지식, 천주교 등이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 유형원, 이익 등 자생적인 개혁파가 나왔다. 18세기 중반에는 이들의 영향을 받고 외부 세계를 체험한 학자들이 이 대열에 참여했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8세기 들어 일단의 이상주의자와 젊은 학자들은 이론을 만들고 현실 개혁 의지를 표출했다. 뒤이어 신분의 차별 때문에 소외당하는 서얼들이 선봉에 섰다. 이들은 민란이나 변란을 일으킬 수 없는 지식인이라는 한계 속에서 일종의 사상투쟁과 개량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성리학을 변화시키거나 대체할 이론과 사상, 정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