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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 사절단, 지식·기술 배우려 하지 않고 외면…청나라 다녀온 북학파는 개혁과 실학 주체 돼

    외국에 나가도록 승인받은 사람들은 국가가 파견한 관리와 상인, 수행원이었다.첫째는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이었다. 300~5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이 12차에 걸쳐 파견됐는데, 대마도에서 도쿄까지 왕복하는 데 거의 1년이나 걸렸다. 그들이 견문하고 체험한 18세기 일본은 자체 발전정책과 난학(네덜란드학)의 수입을 통해 새로운 지식, 기술 등을 보급받아 국력이 팽창했다. 김세렴·신유한·조엄 등 몇몇 인물이 일본 사회를 분야별로 분석하고 기록하며 난학의 우수성도 언급했다. 이들은 고구마를 들여오고, 수차 기술 등도 전달했지만 조선 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개혁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통신사를 파견한 목적 자체가 학습과 수용의 기회가 아니라 시혜와 과시, 일본의 군사적인 도발을 막으려는 회유였다. 따라서 그들의 자세는 자랑과 오만, 일본에 대한 멸시가 많았고, 보고서를 제출해도 정부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반면 청나라에 공식 파견된 연행사는 달랐다. ‘북학파’라는 세력으로, 조선 후기 사회 개혁과 실학의 초기 주체로 변신했다. 이들은 일단 규모가 컸다. 1회에 30명의 정식 인원과 수행원을 포함해 200~300명 정도가 파견됐다. 1637년부터 1894년까지 250여 년간 507회였으니 총인원을 고려하면 그들의 영향력은 엄청났을 것이다.압록강을 건너면서 박작성·구련성 등을 보는 홍대용·박지원·박제가를 비롯한 젊은 선비들의 눈길과 가슴을 떠올린다. 불안한 조선의 현실을 떨치지 못한 채 사명의식과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봉금지대를 통과해 경계선인 봉황성(鳳凰城)에 닿았다. 이어 요양·심양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8세기 조선 사회구조 개혁 필요한 상황에 처해…실용적인 사상·백성 위한 정책 구하려는 움직임

    어느 시대에나 실패와 생명의 위협을 예견하면서도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의식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1765년 35세의 홍대용은 연행사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에서 신세계를 경험한 뒤 신기하고 유용한 지식을 갖고 귀환했다. 이어 15년 후인 1780년 초여름에는 그의 영향을 받은 박지원이 늦은 나이인 43세의 몸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단동시 외곽인 구련성에 닿자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이라고 잘못 인식한다. 이어 봉금지대를 통과해 청나라의 경계선을 넘어 봉황성에 이르자 고구려를 회고한다. 이미 역사를 공부하고 온 그는 성리학자들을 질타하고, <자치통감>까지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역사관을 전개한다. 평양과 패수의 위치, 지명의 이동, 낙랑문제 등 예민한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는 북경을 거쳐 황제의 여름궁정인 열하까지 방문하고 다섯 달 만에 귀국했다. 그는 자료를 수집해 3년에 걸쳐 무려 26권에 달하는 기행문 <연암일기>를 썼다. 그가 죽을 때까지 수정 보완한 그 책은 필사본 때부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궁금하다.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났을까?닫힌 나라에 살던 조선사람에게 외국이면서 침략국이고 대국인 청나라의 문물과 실상은 신기함과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더구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문체로 쓰인 <호질전> <허생전> 등은 현실을 뼈아프게 풍자했으니 대리만족을 줬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청나라와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상호 비교하고, 조선에 필수적인 서양 문물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일이다. 그렇다면 열하일기는 현실을 파악하는 학습서와 새로운 대안까지 제시한 지침서 역할을 했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