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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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2차례 감계회담에서 영유권 주장 '충돌'…일본 개입으로 간도협약 맺어진 후 진척 없어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뒤 발언권이 다시 강해졌고, 1885년에는 간도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의 농가를 소각하고 무력으로 추방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토문감계(土門勘界), 즉 감계회담을 요청했고, 두 나라는 9월부터 11월까지 네 번에 걸쳐 제1차 감계회담을 열었다.조선은 문제의 핵심인 ‘토문’이 ‘두만강’과 다르다는 사실의 확인을 요구했고, 반면 청나라는 정계비를 무시한 채 토문(土門)을 두만(圖們)강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중하와 청나라의 가항계는 공동으로 정계비와 주변을 조사해 ‘목책’ ‘돌무지(석퇴)’ ‘흙무지(토퇴)’ ‘건천’과 ‘토문’ 등을 발견했으며,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지금의 오도백하인 사실을 확인했으나 담판은 결렬됐다. 1948년 7월 이곳을 답사한 북한의 황산철은 1957년 발표한 글에서 이곳에 돌각담이 106개 있었으며, 길이는 5391m라고 썼다.1887년 4월에는 제2차 감계회담이 열렸다. 청나라는 석을수(石乙水)를 잇는 선을 국경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간도와 백두산을 청나라 영토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중하는 지도 등 여러 자료와 증거를 내놓고 토문과 두만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강희제가 국책사업으로 만든 J B 당빌의 <새중국지도>와 <황여전람도(黃輿全覽圖)>는 두 나라의 경계선을 두 강의 북쪽에 그렸고, 청나라도 이 사실을 인지했다. 물론 조선도 일부의 예외를 빼놓고는 같은 인식을 가졌던 증거들이 지도를 비롯해 연행록 등에 많다.또 간도와 연관해 영조 7년과 22년(1746년)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생했다. 청나라에서 애하(河)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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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말부터 조선 이주민 늘며 개간 시작…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응이 간도사태 불러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나라는 줄일 수 없다.(吾頭可斷國不可縮)”국경(감계)회담에서 칼을 빼들고 위협하는 청나라 관리에게 조선 측 대표인 이중하가 한 말이다.우리에게 ‘간도’는 무게감이 큰 존재다. 영토, 역사, 일본과 중국이란 외세, 조선인의 디아스포라와 독립운동 등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미완의 의무인 ‘간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사실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1712년 정계비를 설치한 과정과 내용, 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응 방식은 결국 19세기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간도’ 사태로 이어졌다.(이상태 <독도 수호와 백두산정계비 설치>) 19세기 말에 이르러 조선인들은 집단으로 두 강을 넘어가 개간을 시작했고, 이때 사이(間)섬을 뜻하는 ‘간도’라는 말이 역사에 등장했다. 한편 간도에는 개간(墾)한 곳이라는 의미와 조선의 ‘간(艮)방’이라는 뜻이 담겼다는 주장도 있다. 이주민이 계속 넘어오면서 거주 범위가 확장됐고,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만주 전체가 조선인의 터전으로 변해 ‘동간도(두만강 이북)’ ‘북간도(노야령 이북)’ ‘서간도(압록강 이북)’로 불렸다.그러면 ‘간도 사태’는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을까?기근과 재해, 관리들의 탐학을 못 견딘 백성들은 1862년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임술민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함경도의 두만강 일대에 살던 13가구, 60명의 주민은 결국 두만강을 건너 몇 년 전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연해주 남쪽에 정착했다. 이어 1869년 북부 일대에 막대한 수해로 ‘기사 대흉년’이 발생하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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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강희제, 민족간 충돌 빌미 백두산 경계선 확정, 두만과 토문 동일성 여부 논쟁…최종 결론 못내려
강희제는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서 조선인들과 여진인 한인들이 충돌하는 상황을 빌미로 백두산 일대를 측량하고, 경계선을 확정하는 2차 작업에 착수했다. 드디어 1712년 3월 강희제의 명을 받은 오라(길림) 총관인 목극동은 조선 관원들의 참여를 막은 채 백두산 대택(천지)에 올라갔다. 내려온 그는 주위를 유심히 관찰한 뒤 천지(대택)의 동남쪽 4㎞ 지점(해발 2150m)을 지정하고 높이 70.6㎝, 폭 54.6㎝의 돌비를 세워 82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 비는 1929년(1931년 7월 설) 사라지고, 현재는 주변에 표지석인 돌무더기만 일부 남아 있다.(이한기 <한국의 영토>) 그런데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글로 인해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나왔다. 19세기 후반부터 간도 분쟁을 거쳐 최근에는 간도 영유권 문제로 비화된 상태다.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최종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첫째, 토문(土門)과 두만(豆滿), 투먼(圖們)은 위치, 지형, 물길, 발음 등이 분명히 다르다. 목극등(穆克登)은 지형을 설명하면서 토문(강)의 물이 끊긴 곳(건천)을 조선에서 표시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두만강 선을 고수한다는 조선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박권은 두만강이 그곳이 아니라며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목극등은 ‘토문’이 분명하다며 설명까지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목극등의 판단에 실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청나라에는 레지가 정확하게 측량한 뒤 조선의 지도까지 참고해 만든 만주지도가 이미 있었다(1709년 12월 완성). 그렇다면 황제의 명을 받고(奉旨) 국가사업을 실행하는 목극등이 이 지도를 참조했거나 소지했음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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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 조선 영토, 두만강 이북까지일 가능성 높아
백두산정계비는 무엇을 알려줄까. 국경 문제는 영토의 넓이, 자원의 소유권, 지정학적 가치를 넘어 존재의 명분, 자의식 등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망각하거나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동아시아에서는 육지와 해양에 걸쳐 12곳 이상 장소에서 국경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독도, 이어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와 함께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간도 문제가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이 백두산정계비다. 백두산정계비 안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란 글자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 토문의 위치 문제, 즉 두만과 토문의 동일성 여부를 놓고 한국·중국·일본, 심지어는 한국 내부에서도 쟁점이 됐다.백두산정계비의 내용과 관련된 다양한 견해를 이해하려면 우선 국경 문제의 본질과 남만주 일대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한 과정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 대부분 여진족의 ‘생활권’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조선과 ‘강도화맹’을 맺으면서 후금은 강역 문제를 거론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산삼·녹용 등을 구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두 강을 몰래 건넌 조선인들로 문제가 발생했다. 강희제 때에 들어서면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이에 청나라가 정계비를 세운 목적과 배경, 경위 등을 이를 주도한 강희제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첫째, 청국과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업이었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삼번의 난’마저 진압한 강희제는 시조 발상지로 알려진 백두산(장백산)의 성지화 사업이 필요했다. 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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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둘러싸고 사상투쟁…성리학내 갈등 비화 당파성 일제 강점기 악용되고 분단까지 이어져
숙종은 공납제도의 문제점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가져온 대동법을 넓은 지역으로 확대했고, 대부분의 토지를 측량해 징수를 합리적으로 만들었다. 또 상평통보를 주조해 농업사회인 조선에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오군영 체제를 완성하는 등 군사 체제를 정비하고 북한산성을 축성했다. 강화도에 돈대들을 구축해 군사기지로 삼았다. 통신사를 자주 파견했고, 안용복의 도일 사건을 계기로 1696년에는 일본 막부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地界)임을 확인받아 왜인들이 울릉도에 출입하는 일을 막았다.이 같은 정치적 업적이 있고, ‘환국’ 또한 막강한 신권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불가피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붕당정치를 왕권 강화에 이용했고,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 숙빈 최씨의 소생인 영조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당쟁을 야기했다. 또한 그것이 고질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일본은 이런 사례를 침소봉대해 ‘당파성’이론이라는 식민사관을 만들어 우리를 세뇌했고, 무책임한 대중문화인들은 흥밋거리로 확대재생산했다.의문이 생긴다. 일본인이 강조하고, 우리의 자조처럼 여기는 당파성은 우리의 민족성일까. 역사에서 모든 국가는 피를 부르는 권력투쟁을 벌였고, 그로 인해 나라가 멸망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일본은 100년이 넘는 전국시대가 있었다. 조선의 당쟁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고, 지금까지도 잔영을 남기면서 한민족을 붕괴시키는 중이다. 회고하기조차 역겨운 당쟁을 현재와 후손들을 위해 살펴본다.첫째, 조선의 정체를 이루는 두 기둥은 신분제인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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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과 신권의 대결은 조선체제의 불가피한 특성 숙종 주도 세번의 환국…권력·사상투쟁에 매몰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결은 태조 때부터 시작된 조선 체제의 불가피한 특성이었다. 관료이자 학자들 간의 권력과 사상 투쟁인 당쟁은 숙명이었다.환국(換局)은 일반적인 당쟁과 달리 국왕이 주도해 ‘국면 전환’, 즉 기존의 권력 집단을 빠르고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교체시킨 정변이자 친위 쿠데타다. 현종의 외아들이었던 숙종은 2명의 왕비와 빈들이 연관된 추악하고 비윤리적인 세 번의 환국을 일으켜 왕권을 강화했다.첫 번째는 1680년 일어난 ‘경신환국’이다. 13세에 등극한 숙종은 현종 때 벌어졌던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을 중용하고 외척에 의지했다. 그러나 6년 동안 정치를 경험한 그는 왕권을 강화하는 비상 조처를 취했다. 영의정인 허적이 궁중의 법도를 어기는 사소한 행동을 빌미로 자신의 장인을 훈련대장에 임명해 병권을 장악했다. 신속하게 영의정과 도승지, 삼사의 요직을 교체했다. 그 직후에 공교롭게도 남인들이 인조의 손자인 복창군 3형제와 반역을 도모한다는 고발 사건이 생기자 즉각 관련자들과 복창군 등 두 형제를 죽였다. 이어 영의정인 허적을 비롯해 윤휴 등 남인들을 죽이고 일부는 유배 보냈다. 그리고 최고의 성리학자로 대우받고 있는 송시열을 고향에서 불러올려 재등용시키면서 조정을 순식간에 서인으로 교체했다. 때마침 왕비가 죽자 서인의 딸인 인현왕후를 새 중전으로 맞이하면서 20세 청년왕은 친위 쿠데타를 이용해 전광석화처럼 권력의 틀을 바꿨다.두 번째는 1689년 일어난 ‘기사환국’이다. 역관 집안 출신으로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지만, 숙종의 어머니였던 명성왕후의 미움을 사 궁에서 쫓겨났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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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륜적 일이 생기고 사회 붕괴 가속됐지만, 적극 대응보다 공리공론으로 권력 투쟁 몰두
사회는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고, 반인륜적인 일들까지 발생했다.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한 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시장에서 아이들, 부녀자들, 종들이 개돼지보다 못한 값으로 팔려나갔다.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건도 발생해 충청도에서 어미가 자식들을 삶아 먹은 사건을 구체적으로 보고한 일도 있다. 현종은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길러 노비로 삼는다는 법령을 공포했다.아사와 전염병으로 시신이 많아졌고 연고 없는 시신은 길거리에 버려져 파리들과 까마귀, 솔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성문 밖으로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시신과 함께 수레로 실려 나가기도 했다(현종실록). 또한 추위 때문에 무덤을 파고 시신의 옷을 훔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거기에다 도성 밖에 있는 관우사당(關王廟)의 사람 형상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이렇게 민심이 불안해지면서 몇몇 관리가 예측한 대로 도적이 나타났다. 유리걸식하던 백성은 관곡과 공물을 강탈했고, 도둑질에 가담했다. 금산에서는 유력한 지방 세력이 포수, 승려 수백 명을 모아 무주 적상산성의 군량곡을 겁탈하려고 모의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런 전대미문의 참상이 일어난 상황에서 정치권력과 학문권력을 독점한 조정의 사대부들은 어떤 자세로 어떤 정책들을 추진했을까?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정부가 세금을 받으며, 소수 특권층이 정치와 부를 독점할 때 내건 명분은 비슷하다. 능력자로 자연재앙을 예측해 예방 시설을 만들어 해결하며, 때로는 자기희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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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돌림병 등 전례 없는 자연재앙 발생…경신대기근으로 100만명이 아사 추정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처참한 살육 현장을 겪은 조선 백성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양 난을 겪으면서 많은 농토가 유실되고, 노동력도 부족했던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에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인구의 4분의 1인 무려 100만 명의 아사자가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경신대기근은 세계적 소빙기 현상과 관련된 기후변화의 산물이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실록 등 사료를 보면 전례 없는 자연 재앙들이 발생했다.1670년 초봄부터 한양에 눈과 우박이 내렸고, 3월에는 평안도에 운석이 떨어졌다. 1670년 5월 4일 평양 감사인 민유중은 편지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금년 같은 가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국운이 걸려 있어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한여름인 7월에도 우박·서리·눈이 전국에 내렸고, 함경도의 피해가 제일 심각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9월에는 목사가 처참한 피해 상황을 보고하면서 남해안 지역의 식량 지급을 요청했다.(현종실록)다행히 정부는 신속한 조처를 취했다. 벼 등을 운반했고, 유배수들을 육지로 옮겼으며, 세금 감면과 특별 과거를 실시했고,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5월에 이르러서는 경기도를 시작으로 황충, 즉 메뚜기떼들의 공격이 극심했다. 7월 함경도에서는 황충과 함께 참새(黃雀) 1000만 마리가 들판을 덮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병충해들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떨었다.그러자 조정도 위기 상황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기근 대책을 모색하는 1670년 8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허적은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