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下)
요녕성 봉성시에 있는 봉황산성. 고구려의 부수도 격인 오골성으로 추정된다.
요녕성 봉성시에 있는 봉황산성. 고구려의 부수도 격인 오골성으로 추정된다.
강희제는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서 조선인들과 여진인 한인들이 충돌하는 상황을 빌미로 백두산 일대를 측량하고, 경계선을 확정하는 2차 작업에 착수했다. 드디어 1712년 3월 강희제의 명을 받은 오라(길림) 총관인 목극동은 조선 관원들의 참여를 막은 채 백두산 대택(천지)에 올라갔다. 내려온 그는 주위를 유심히 관찰한 뒤 천지(대택)의 동남쪽 4㎞ 지점(해발 2150m)을 지정하고 높이 70.6㎝, 폭 54.6㎝의 돌비를 세워 82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 비는 1929년(1931년 7월 설) 사라지고, 현재는 주변에 표지석인 돌무더기만 일부 남아 있다.(이한기 <한국의 영토>) 그런데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글로 인해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나왔다. 19세기 후반부터 간도 분쟁을 거쳐 최근에는 간도 영유권 문제로 비화된 상태다.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최종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째, 토문(土門)과 두만(豆滿), 투먼(圖們)은 위치, 지형, 물길, 발음 등이 분명히 다르다. 목극등(穆克登)은 지형을 설명하면서 토문(강)의 물이 끊긴 곳(건천)을 조선에서 표시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두만강 선을 고수한다는 조선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박권은 두만강이 그곳이 아니라며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목극등은 ‘토문’이 분명하다며 설명까지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목극등의 판단에 실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청나라에는 레지가 정확하게 측량한 뒤 조선의 지도까지 참고해 만든 만주지도가 이미 있었다(1709년 12월 완성). 그렇다면 황제의 명을 받고(奉旨) 국가사업을 실행하는 목극등이 이 지도를 참조했거나 소지했음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는 1차 답사에서 토문강이 송화강과 합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따라서 그의 목적은 천지(대택)를 포함한 백두산(장백산)을 청나라의 영토 또는 관할권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조선은 이때 백두산과 대택(천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청나라에 넘기고 말았다. 다음해(1713년) 9월 중단될 때까지 토문강 상류의 건천(끊긴) 부분에 185개의 흙무더기와 돌무더기를 쌓고 목책을 설치했다.(육락현 <간도는 왜 우리땅인가?>)

또 하나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만약에 ‘토문’이 ‘두만’이라면 두만강 이북은 청나라 영토여야 한다. 그런데 레지가 측량하고 조선의 지도를 참고해 만든 프랑스인 당빌의 ‘새중국지도’와 1718년 완성된 ‘황여전람도(黃輿全覽圖)’에는 조청의 경계선이 더 북쪽에 그려져 있다. 당빌의 지도를 보면 두만강 하구 약 6㎞ 동쪽 지점에서 시작해 백두산을 가로질러 압록강 상류의 모든 수계를 포함하는 동서산맥에 선을 긋고, 봉황성의 남쪽을 압록강 하구의 대동만에 이르는 지역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 이는 듀 알드의 ‘중국지’에서도 동일하다. 당빌은 ‘새중국지도’의 서문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은 거의 정확하고 완전함을 강조했다.(김득황 <백두산과 북방경계>)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를 그린 ‘서북피아양계일람지도’. 국경의 범위가 압록강 두만강을 잇는 선을 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를 그린 ‘서북피아양계일람지도’. 국경의 범위가 압록강 두만강을 잇는 선을 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면 레지가 측량했을 때, 목극등이 비를 세웠을 때, 강희제가 승인해서 서양까지 알려진 ‘황여전람도’가 반포됐을 때에는 조선의 영토를 두 강의 이북까지 인식했을 개연성이 크다. 물론 지도를 제공한 조선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를 입증하는 지도와 글이 많다. 반면 토문을 두만강으로 인식한 다른 견해들이 있으므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연행록’을 비롯해 다른 자료들의 비중, 실제 사건들과 향후 전개된 역사적 상황 등을 고려하면 두 강은 국경선이 아니라 청나라의 무력과 조선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설정된 봉금지대의 남쪽일 가능성이 높다. 일종의 무인지대로 지금의 ‘휴전선(DMZ)’과 동일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더불어 정계비에 새겨진 ‘압록’과 ‘토문’은 본류만이 아니 수계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당빌이 만든 ‘새중국지도’ 등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앞으로 정계비 문제는 압록강 이북의 조선 영토 및 국경선과 더불어 해석할 필요가 있다.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정계비를 자국 중심으로 해석하고, 심지어 비의 위치가 네 번이나 이동됐다는 주장까지 한다. 러시아의 영토 전문학자 갈레노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자들은 ‘지도를 통한 공격’을 했다.” 중국인들은 지도를 왜곡하거나 유리하게 바꾸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 지도를 제시하면서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을 쓴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