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간도 개척과 영유권 갈등(下)
1790년대 제작한 ‘여지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사진=규장각
1790년대 제작한 ‘여지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사진=규장각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뒤 발언권이 다시 강해졌고, 1885년에는 간도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의 농가를 소각하고 무력으로 추방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토문감계(土門勘界), 즉 감계회담을 요청했고, 두 나라는 9월부터 11월까지 네 번에 걸쳐 제1차 감계회담을 열었다.

조선은 문제의 핵심인 ‘토문’이 ‘두만강’과 다르다는 사실의 확인을 요구했고, 반면 청나라는 정계비를 무시한 채 토문(土門)을 두만(圖們)강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중하와 청나라의 가항계는 공동으로 정계비와 주변을 조사해 ‘목책’ ‘돌무지(석퇴)’ ‘흙무지(토퇴)’ ‘건천’과 ‘토문’ 등을 발견했으며,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지금의 오도백하인 사실을 확인했으나 담판은 결렬됐다. 1948년 7월 이곳을 답사한 북한의 황산철은 1957년 발표한 글에서 이곳에 돌각담이 106개 있었으며, 길이는 5391m라고 썼다.

1887년 4월에는 제2차 감계회담이 열렸다. 청나라는 석을수(石乙水)를 잇는 선을 국경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간도와 백두산을 청나라 영토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중하는 지도 등 여러 자료와 증거를 내놓고 토문과 두만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강희제가 국책사업으로 만든 J B 당빌의 <새중국지도>와 <황여전람도(黃輿全覽圖)>는 두 나라의 경계선을 두 강의 북쪽에 그렸고, 청나라도 이 사실을 인지했다. 물론 조선도 일부의 예외를 빼놓고는 같은 인식을 가졌던 증거들이 지도를 비롯해 연행록 등에 많다.

또 간도와 연관해 영조 7년과 22년(1746년)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생했다. 청나라에서 애하(河)와 초하(草河)가 만나는 지금 봉황성 남동쪽 아래 망우초 카룬을 설치한다며 조선에 양해를 구했다. 명분은 조선인들의 인삼 채취와 밀 무역을 단속한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강력한 반발로 두 번 다 무산됐다.(육락현 <간도는 왜 우리땅인가?>) 이런 사실을 보면 두 강은 청나라가 설정한 봉금지대의 남쪽이며, 조선이 현실적으로 양해한 일종의 무인지대일 가능성이 크다.

양국의 주장이 계속 충돌하자 청나라 관리는 이중하에게 칼로 위협하려 했고,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잘릴 수 있어도, 나라 영토는 줄일 수 없다(吾頭可斷國不可縮)’며 강격책을 고수했다. 결국 2차 감계회담은 결렬됐지만 국제정세는 조선에 유리하게 변해갔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에 맺어진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의 1항에서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다’란 조항을 수용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됐고, 조선은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면서 자주성을 표방했다. 이후 조선은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하고, 간도 주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국경 조사를 재차 시행했다. 관리들을 파견해 조선인의 호구와 경작 면적 등을 조사하면서 보호와 소송을 담당하게 했다.

1900년에 들어오면서 서간도는 평안도로, 동간도는 함경도로 편입시키고 세금을 징수해 군사들의 훈련 등 운영비로 충당했다. 1902년 5월 북간도 시찰사로 파견된 이범윤은 인구와 호구조사 등을 실시했고, 포수 등을 모집해 사포대를 조직하며 무장력을 갖췄다. 반발한 청나라가 조선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이에 굴복한 조정은 그에게 철수를 명했다. 하지만 그는 불복했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망명한 뒤 훈춘 부근에 주둔했다. 이후 연해주로 넘어가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1904년에 조선의 지배권,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에도 요동 진출에 실패했지만, 러시아의 압록강 하구 진출을 막은 용암포 사건 등에서 보이듯 서간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포츠머스 회담에서 랴오둥반도를 다시 차지했고, 러시아와 장춘에서 여순을 연결한 동청철도 등을 양도받았다. 이제 만주로 본격적인 진출을 추진하는 일본에 무순 등의 지하자원과 철도부설권 등은 매우 현실적인 관심사였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간도’를 만주 진출에 활용했고, 청나라는 이에 맞서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그 결과 1909년 9월에 소위 ‘간도협약’이 맺어졌고, 지금껏 진행 중이다.

한 시대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를 외면하거나 포기하면 결국 후손들에게 멍에를 씌운 부끄러운 조상으로 역사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904년에 조선의 지배권,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 후에도 요동 진출에 실패했지만, 러시아의 압록강 하구 진출을 막은 용암포 사건 등에서 보이듯 서간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포츠머스 회담에서 랴오둥반도를 다시 차지했고, 러시아와 장춘에서 여순을 연결한 동청철도 등을 양도받았다. 이제 만주로 본격적인 진출을 추진하는 일본에 무순 등의 지하자원과 철도부설권 등은 매우 현실적인 관심이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간도’를 만주 진출에 활용했고, 청나라는 이에 맞서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그 결과, 1909년 9월에 소위 ‘간도협약’이 맺어졌고, 지금껏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