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정치권력과 사상투쟁인 당쟁(下)
숙종 때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인 강화도의 무태돈대.
숙종 때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인 강화도의 무태돈대.
숙종은 공납제도의 문제점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가져온 대동법을 넓은 지역으로 확대했고, 대부분의 토지를 측량해 징수를 합리적으로 만들었다. 또 상평통보를 주조해 농업사회인 조선에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오군영 체제를 완성하는 등 군사 체제를 정비하고 북한산성을 축성했다. 강화도에 돈대들을 구축해 군사기지로 삼았다. 통신사를 자주 파견했고, 안용복의 도일 사건을 계기로 1696년에는 일본 막부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地界)임을 확인받아 왜인들이 울릉도에 출입하는 일을 막았다.

이 같은 정치적 업적이 있고, ‘환국’ 또한 막강한 신권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불가피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붕당정치를 왕권 강화에 이용했고,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 숙빈 최씨의 소생인 영조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당쟁을 야기했다. 또한 그것이 고질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일본은 이런 사례를 침소봉대해 ‘당파성’이론이라는 식민사관을 만들어 우리를 세뇌했고, 무책임한 대중문화인들은 흥밋거리로 확대재생산했다.

의문이 생긴다. 일본인이 강조하고, 우리의 자조처럼 여기는 당파성은 우리의 민족성일까. 역사에서 모든 국가는 피를 부르는 권력투쟁을 벌였고, 그로 인해 나라가 멸망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일본은 100년이 넘는 전국시대가 있었다. 조선의 당쟁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고, 지금까지도 잔영을 남기면서 한민족을 붕괴시키는 중이다. 회고하기조차 역겨운 당쟁을 현재와 후손들을 위해 살펴본다.

첫째, 조선의 정체를 이루는 두 기둥은 신분제인 양반 제도와 ‘이데올로기’ 수준인 성리학이다. 따라서 학자적 관료인 양반들은 한정된 관직(정치) 토지(경제) 등과 관련된 권력을 둘러싸고 사상투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성리학, 전통신앙·불교 등의 비성리학과 이념투쟁을 벌였고, 점차 성리학 내부의 갈등으로 비화돼 양명학·북학·실학 등으로 이어지는 노선투쟁을 멸망할 때까지 벌였다.

둘째는 외척의 권력 강화와 정치간섭이다. 왕권은 항상 신권에 위협당해 연산군이나 광해군, 사도세자처럼 탄핵 또는 반란 때문에 죽거나 귀양 보내졌다. 그 때문에 왕권은 때때로 외척을 방어막으로 이용했으나, 왕이 어려서 대비 등이 수렴청정을 할 때나 왕비나 여인들의 권력이 강해질 때는 외척 세력에 왕권이 제약당했다. 또 신권은 외척과 비외척으로 구분돼 왕을 사이에 두고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다만 숙종 때는 장희빈의 낮은 신분과 여인들 간의 암투, 궁궐 내부의 특이한 사건들이 연루됐을 뿐이다.

셋째, 궁궐과 정부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한 현상이었다. 지방에 파견된 고급 관리는 중앙의 당파싸움과 직결됐다. 지방 세력들은 중앙정치에 발언권을 갖고 있었고, 집단 상소는 국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송시열의 예에서 보듯 출사할 수도 있었으며, ‘산림(山林)’으로 현재의 재야세력과 같이 중앙정치에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은 토지와 노비뿐만 아니라 권력 창출 및 예비 관료를 양성하는 서원과 향교에 영향력을 강하게 미쳤다. 그 때문에 당쟁은 지방의 교육권 쟁탈전까지 겸할 정도였다. 거기에 조선은 혈연공동체 사회였으므로 중앙의 당쟁은 지방 당쟁을 거쳐 향촌 당쟁으로 비화했다. 씨족 간의 싸움뿐만 아니라 집성촌에서조차 내부에서 피를 부르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의 당쟁은 그 밖에도 소수 사람들의 독점물인 ‘한문’이 지니는 난이성, 추상성 등과 자의성으로 인해 정확한 정책과 사상논쟁이 어려웠고, 외국과의 교류가 봉쇄된 체제 속에서 비합리성과 교조성이 강한 탓으로 당쟁은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당파성은 문화 일부로 전승됐고, 일제 강점기에는 적에게 악용당했으며, 민족 분단과 전쟁이라는 최악, 최대의 당쟁을 유발했다. 지금도 북한은 수시로 ‘환국’을 통해 왕조체제를 고수하고, 남쪽은 이념을 놓고 당쟁에 여념이 없다.

인류에게 발전 또는 진보란 결국 풍족한 생활과 더불어 자유로운 사고와 삶이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이론과 행동이 생활을 좌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에서도 이데올로기가 강요돼서는 안 되며, 소수 집단이 대표성을 자처하면서 ‘준정치 행위’를 해서도 안 된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조선의 정체를 이루는 두 기둥은 신분제인 양반 제도와 ‘이데올로기’ 수준인 성리학이다. 따라서 학자적 관료인 양반들은 한정된 관직(정치) 토지(경제) 등과 관련된 권력을 둘러싸고 사상투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성리학, 전통신앙·불교 등의 비성리학과 이념투쟁을 벌였고, 점차 성리학 내부의 갈등으로 비화돼 양명학·북학·실학 등으로 이어지는 노선투쟁을 멸망할 때까지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