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上)
백두산정계비는 무엇을 알려줄까. 국경 문제는 영토의 넓이, 자원의 소유권, 지정학적 가치를 넘어 존재의 명분, 자의식 등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망각하거나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동아시아에서는 육지와 해양에 걸쳐 12곳 이상 장소에서 국경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독도, 이어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와 함께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간도 문제가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이 백두산정계비다. 백두산정계비 안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란 글자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 토문의 위치 문제, 즉 두만과 토문의 동일성 여부를 놓고 한국·중국·일본, 심지어는 한국 내부에서도 쟁점이 됐다. 백두산정계비의 내용과 관련된 다양한 견해를 이해하려면 우선 국경 문제의 본질과 남만주 일대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한 과정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 대부분 여진족의 ‘생활권’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조선과 ‘강도화맹’을 맺으면서 후금은 강역 문제를 거론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산삼·녹용 등을 구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두 강을 몰래 건넌 조선인들로 문제가 발생했다. 강희제 때에 들어서면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이에 청나라가 정계비를 세운 목적과 배경, 경위 등을 이를 주도한 강희제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청국과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업이었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삼번의 난’마저 진압한 강희제는 시조 발상지로 알려진 백두산(장백산)의 성지화 사업이 필요했다. 강희제는 1676년 관리를 파견해 백두산을 답사하게 한 뒤 산신께 제사를 지내게 했다. 1683년에 또 관리를 파견했으나 압록강 상류에서 조선 민간인들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 사건은 조선에 엄청난 파장과 다수의 희생을 일으켰다.
둘째, 만주 지역의 장악과 개척 필요성 때문이었다. 남쪽에서는 포르투갈 등 서양세력과 무역하고, 17세기 중반에는 명나라 복국군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다. 1683년에는 청나라가 대만을 점령했다.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1666년에 헤이룽강 상류 유역에 알바진 기지를 건설한 뒤 송화강 유역까지 남진하자 전투를 벌였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정했다. 서쪽으로는 강력하게 성장하는 중가르 제국과 충돌하고, 1687년에 신장성 지역을 원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강희제는 전통적인 명분과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국제관계를 인식하는 중이었고, 영토 또한 서양의 국경 개념을 수용해 조약을 맺었다.
강희제는 만주의 안정과 개척, 백두산의 성지화를 위해 조선과 국경선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미 남만주와 국경 지역에 한족을 대거 이주시켜 개척하는 이민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런 청나라의 움직임에 놀라 ‘영고탑 회귀설’ 등이 유포되는 등 불안한 상황이었다.
셋째, 지리 개념의 변화와 서양문물의 수용이었다. 천문학과 지도 제작술이 도입되면서 정확한 지도 작성이 가능해졌다. 강희제는 1708년 프랑스 선교사인 레지 신부에게 전국의 영토와 국경을 조사하고, 지도를 제작할 것을 명했다. 레지 일행은 1709년부터 최신의 삼각측량법을 이용해 만주 일대를 측량했고, 같은 해 12월 만주지역의 지도가 완성됐다. 강희제는 1710년 조선에 파견된 사신단에 측지학자를 보내 조선 지도를 구해왔고, 레지는 이 지도를 참고 및 보완해 1718년 최종지도를 완성했다. 이 무렵 조선은 이 지역을 그린 지도를 가졌고, 급변하는 상황의 중요성도 인식했다. 다만 패전국이었고, 환국 등과 을병 대기근을 겪은 후유증으로 청나라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 기억해 주세요 동아시아에서는 육지와 해양에 걸쳐 12곳 이상 장소에서 국경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독도, 이어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와 함께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간도 문제가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이 백두산정계비다. 백두산정계비 안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란 글자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 토문의 위치 문제, 즉 두만과 토문의 동일성 여부를 놓고 한국·중국·일본, 심지어는 한국 내부에서도 쟁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