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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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재침략 막기 위해 일본을 살피고 배우기보다 멸시…정약용 등은 통신사 거만한 행적과 과시행태 비판
조선통신사 행사는 두 나라의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며,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약점을 파악할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조선이 재침을 방어하고 역습의 기회를 모색한다면, 내정을 샅샅이 탐지하고 해양력을 파악하며 복잡한 해로망까지도 탐지할 기회였다. 물론 ‘시호(승냥이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듯한 불안감, 종묘사직과 능묘까지 훼손당한 적개심과 오기 등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들의 잘못과 무력감 때문에 파괴된 나라와 피해 입은 백성들에 대한 도리를 떠올려야 했다.일본은 멸시가 아니라 극복의 대상, 학습의 대상이었지만 정치인이면서 학자였던 조선통신사들은 전쟁의 후유증이 심하고,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적인 상태에서도 일본을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했다.조선통신사들은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 등으로 지칭하고 일본을 섬오랑캐(島夷), ‘올빼미’라고 불렀다. 하의를 벗고 흑치를 한 풍습을 보면서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부족하고 시문에 서투르다고 무시했다. 실제로 도시에서조차 통신사들의 성리학 지식과 한문 및 서예에 감동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신유한 때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곤혹스러운 사실이 여러 곳에 기록됐다. 일본의 문물과 제도에 감탄하는 신유한조차 그들의 글이 졸(卒)하고 우습다고 표현했다. 또 1636년에 온 김세렴은 조그만 항구에서 일본의 전선을 관찰한 뒤 일본 전선이 우리 배보다 못하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일본의 기술 능력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본 정약용은 통신사들의 거만한 행적과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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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의 임진왜란 후 조선·일본·명나라 급변기 맞아, 강화 분위기 고조…1811년까지 통신사 9차례 보내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 조선 정부와 대마도 사이에는 강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일본 내부적으로도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약탈전쟁이 실패한 탓에 무사와 백성들의 염전(厭戰) 분위기가 높아졌고, 토지의 황폐화로 사회의 토대가 흔들렸다. 참전 세력과 치열한 내전 끝에 승리한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신정권을 안정시키고, 외국의 인정을 받아 정통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신속한 전후처리를 위해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는 일이 필수적이었다.조선도 무너진 사회 체제와 왕조의 권위,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포로들을 귀환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또한 명나라는 멸망 직전이었고,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압박이 시작됐다. 이미 어선들이 서해 연안을 침범하고, 청나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조선 침공의 위기가 증폭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현실적으로 국가의 생존과 정권의 유지를 위해 배후의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컸다.두 나라는 실리와 형식을 놓고 조정한 끝에 조선이 1607년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해 일부 포로를 송환했고, 1636년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라는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일본은 쇼군이 새로 등장하면 조선에 고보(통보)하는 사신을 보냈고, 조선 정부는 답방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1811년까지 아홉 차례나 파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열두 번이다. 미묘한 정치 행위였지만, 규모가 매우 크고 동아시아 질서에서 파급력이 큰 행사였다. 특히 일본에선 전 국가적인 행사로 꼽혔다. 또한 대마도에는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따로 ‘문위행(問慰行)’이라는 소규모 사절단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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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귀환한 조선 포로들 환영은커녕 냉대받아…문벌사족들은 가족이 돌아온 사실 숨기기도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사람도 꽤 많았다. 《국조인물지》에 기록된 이엽 장군은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잡혀 포로로 끌려갔다. 좋은 대우와 회유를 뿌리치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결국 자결했다.쇄환, 즉 정부의 공식적인 노력으로 귀환한 사람들도 있었다. 1604년 6월 나라를 망친 성리학자들 대신 승병장인 사명당이 ‘탐적사’로 파견됐다. 일행은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만나고, 300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1607년에는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돼 전후 문제 등을 논의하고, 124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1624년에도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물론 일본이 자발적으로 쇄환시킨 포로도 있었다. 대마도 도주는 종전 전에 강화를 요구하면서 조선 포로를 500명 가까이 돌려보냈다. 광해군 때도 우호 관계를 회복하자면서 잡혀갔던 백성을 잇달아 쇄환시켰다.조선 정부와 사회는 귀국한 포로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첫째, 의심하고 경계했다. 선조 38년 6월 17일 기록에는 사명당을 따라 대마도에서 온 박수영이 나라를 배반해 인명을 많이 살해했으니 형벌을 주자는 요청에 선조가 윤허한 내용이 있다. 1601년에는 강사준과 여진덕 등이 80여 명이 함께 탈출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일본의 자연재앙과 분열상황 등을 보고했다. 그런데도 조정은 일단 의심하고, 조사를 단행했다.둘째, 믿기 힘들지만 냉대와 억압 등을 많이 저질렀다. 2차 쇄환, 3차 소환 때는 관리들이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고, 정부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귀환 포로를 억압하고 약탈하는 일도 빈번했다. 1605년 6월 7일자에는 유정(사명당)이 쇄환한 사람들을 마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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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최대 10만명 안팎의 백성이 포로가 돼…마카오·인도·이탈리아·포르투갈 등지로 팔려나가
정권과 나라는 붕괴해도 괜찮다. 이민족, 다른 국가에 지배받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백성은 죽어서는 안 된다. 백성이 살아야 새 세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임진왜란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일본은 전쟁 결과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정권이 교체됐다. 명나라는 파병 목적을 이룬 대신 멸망이 앞당겨졌다. 만주의 여진족은 어부지리를 얻어 청 제국을 건설했다.침략을 받아 전장이던 조선은 승전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의병장들과 백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끌려간 포로를 내버렸다. 교토 시내의 ‘미미쓰카(耳塚)’라는 크지 않은 무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베어온 조선인의 귀 5만 명분이 묻혀 있다고 한다. 포로는 적게는 2만~3만, 많게는 10만 명이 넘고, 그 가운데 7500명 정도만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국에 귀환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포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고, 책임져야 할 조선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전쟁은 고도의 정치행위, 경제행위며 또한 문화행위다. 그 때문에 사람의 약탈이 있었고, 노예무역이 병행됐다. 일본군은 정치적인 영토 외에 자원과 문화재 약탈, 포로 획득을 목적으로 군대 체재까지 개편했다. 그 결과 학자, 의원, 도공 등의 기술자와 농민을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 적선에 실린 채로 대한해협을 건너 적지에 내팽개쳐진 조선 포로들의 운명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첫째, 대부분은 귀환을 체념한 상태로 정착해 일본인으로 변신했다. 노비를 비롯한 천민은 물론이고,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홍호현 이성현 등의 양반도 정착해 상급 무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 무렵 일본의 여러 곳, 특히 규슈에는 조선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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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방위하던 의병들, 관군과 합동 전국적 전투 전개…전공 다툼으로 고초 겪거나 전쟁 후에 숙청당하기도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의 승리로 절망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백성들은 항전의 의지를 되찾는 전기를 마련했다. 의병들은 초기에는 향토 방위에 주력했으나, 곧 다른 지역 의병들은 물론 관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전국적인 전투행위를 펼쳤다. 나주의 김천일은 수백 명의 의병을 지휘해 선조의 행재소로 북상하다가 강화도 작전을 펼쳤고, 한강 작전으로 승리했다. 광주에서 거병한 고경명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해 승전을 이끌어냈다. 관군과 명나라군의 평양성 탈환전에서 큰 공을 세운 의승군은 곧이어 서울 근교 한강가에서 벌어진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인해 함경도는 보존됐고, 가토오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두만강을 넘지 못해 전선의 확대가 저지됐으며,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됐다. 의병들, 전쟁에서의 역할의병들의 전국적인 활동으로 전선이 확대된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많은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 의병들은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백성들의 협조를 받아 유격전을 펼쳤다. 일본군의 허를 찌르거나 전진과 후퇴의 길목을 장악해 혼란을 유발했고, 일본군은 수성전을 선호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도와 학정, 당파싸움으로 인해 전쟁 전에도 임꺽정(林巨正)의 난 등 민란이 발생했고, 전쟁 도중에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정부와 관군을 불신한 백성들은 떠돌다가(유망) 포로로 잡혀 부역했고, 심지어는 ‘순왜’로 변신해 적에 협조했다. 의병은 이들을 흡수해 전력을 이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그렇다면 생명까지 바쳤던 의병들은 가치와 명예를 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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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파죽지세에 한양서 임금 탈출하며 '아비규환'…핍박받던 농민·노비 등 의병으로 궐기 전국서 유격전
의병(義兵) 의승(義僧) 의기(義妓) 의곡(義穀). 이런 선조들을 생각하면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생기가 돈다. 우리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지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은 비상시국이었고, 정부와 군대의 무능과 부재 현상을 알리는 안타까운 증거들이기도 하다. 의병들의 활동과 전적1592년 4월 13일 17시경 ‘임진왜란’ 또는 ‘임진조국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상륙 후 두 번의 전투를 마치고 북상했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배수진을 격파한 뒤에는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군했다. 조선의 군대는 제 역할을 못했고, 임금이 황급히 탈출한 서울은 아비규환이 됐다. 동요한 백성들은 공포에 떠는 존망의 기로에서 이순신의 옥포해전 승리 소식을 접했다. 이와 함께 곽재우가 경남 의령에서 재산을 털고 노비들을 포함해 의병을 일으킨 소식을 들었다. 역사에서 의병의 존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그는 ‘홍의장군’을 칭하면서 1000여 명의 군사로 낙동강 전투 등 숱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고경명은 전라도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동원했으며, 남원 지역의 안영(安瑛), 나주의 김천일(金天鎰) 등의 의병과 합심해 호남을 방어했다.조헌은 충북 옥천에서 일어나 승군 500명과 합동 작전으로 청주성을 수복했으나, 금산에서 관군의 불참으로 불리한 전투를 벌이다가 700명 전원이 전사했다. 함경도 북쪽에서는 정문부가 적군에 투항한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소위 북관대첩을 이뤘다. 이 밖에 젊은 김덕룡 형제를 비롯해 합천에서 정인홍, 고령에서 김면, 손인갑, 권응수 등이 있었다. 1차 진주성 대첩에 참여한 최경회, 심대승, 임계성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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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환경·전선·정보력 활용한 전략·전술 천재…다른 민족에게 자랑할 수 있는 역사와 신화 남겨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남다른 삶의 방식과 특별한 용기를 가졌다. 칠천량 전투로 조선 수군은 거의 사라졌고, 임금조차 수군을 해체한 뒤 충청도로 와서 훗날을 도모하라고 특별히 전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장계에 이렇게 올렸다.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 12척 있습니다. 전선은 비록 부족하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니 감히 저를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기가 질린 부하들이 주저하자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고, 결국 명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군 133척을 격파했다.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수군으로 근무한 적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짧은 기간의 수군 만호에서 파직된 이후에는 두만강 하구인 함경도의 조산보에서 만호로 근무했다. 1592년 4월 12일 거북선을 건조했는데, 다음날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그리고 5월 7일 첫 전투인 옥포 해전부터 승리를 이어갔다.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작전을 구사한, 전략과 전술의 천재였다. 해양환경과 전선 그리고 전술의 미묘한 상관성을 정확히 파악했다. 조선의 판옥선은 1555년 을묘왜란을 겪고 왜선에 대응할 목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연안용이자 방어용이며, 소나무 등의 침엽수를 이용했다. 길이가 보통 15m에서 20m에 달해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함포를 장착해서 먼 거리에서도 쏠 수 있다. 승선 인원은 100여 명이고, 다수의 노꾼을 가동해 속력을 낼 수 있어 신속한 전투에 편리했다. 반면에 일본의 ‘안택선’ ‘관선’ 등은 원양용인 데다 선체가 삼나무여서 내구성이 약했다. 따라서 크고 단단한 판옥선이나 거북선으로 충돌 작전을 펼 수 있었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정보력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수적으로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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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회 해전 승리로 패망 위기 극복·동아시아 질서 변화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20여 번의 해전에서 무패했고, 아군은 100여 명의 전사자만 낸 이순신 장군이 전사 직전 한 말이다.육지전에서 끊임없이 패하던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5월 초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인 거제도의 옥포 대첩이 있었다. 같은 해 5월 말에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한 사천 전투에서 적의 배 79척을 침몰시키고 이순신 장군은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8월 14일에는 한산도 대첩이 있었고, 9월 1일에는 부산포 등 남해 동부 해안을 급습해서 대승했다. 이어 1593년과 1594년 계속 승리를 이어나갔다. 1597년에는 감옥에서 나와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고, 9월 16일에는 명량에서 13척으로 133척과 싸워 대승했다. 이후 몇 번 더 승리했고, 1598년 11월 19일에는 7년 전쟁의 마지막인 노량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전사했다.패전 국면이라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더구나 대규모 해양전에서 어떻게 이 같은 무패의 대승을 이룰 수 있었을까.이순신 장군의 승전들은 동아시아 질서와 한민족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전쟁의 향방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첫 전투인 옥포 해전에서 승리한 5월 7일 한양은 이미 점령당했고, 탈출한 선조는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승전보로 백성들과 왕조는 절망에서 희망을, 패배에서 승리를 기약할 수 있었다. 한산도 대첩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은 수군은 물론 육군과의 협동 작전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곡창인 호남은 보호됐고, 일본군은 군량미 보급 등의 차질로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아울러 의병 활동이 본격화됐다. 부산포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첫 상륙지이자 교두보를 공격해 100여 척을 침몰시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