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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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신라 분열 속 후백제와 고려의 '바다 쟁탈전'…견훤의 후백제는 국제관계에 해양능력 활용
고대를 돌아보면 신라가 주도한 소위 ‘삼국통일’은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외세를 끌어들였고, 발해의 부활로 남북으로 재분단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또한 그 폐해가 역사적으로 계승돼 지역갈등이라는 또 다른 분열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줬다.신라는 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떨어지고, 지방을 통제하는 기능을 상실해갔다. 또한 거듭되는 실정과 계속되는 흉년으로 경제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권력 쟁탈전에서 소외당한 세력은 재야세력으로 힘을 기르고, 지방에서 태동한 자생적인 호족세력들이 발호했다. 특히 해안지방에는 상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력과 강한 군사력을 갖춘 군소 해양세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신라의 분열과 해양 세력의 등장훗날 경기만의 강화도 일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왕건과 그의 동맹이 된 김포·풍덕·파주·인천·안산·남양(화성시)·평택·당진·나주 등의 해양 세력이 있었다. 금강 세력인 견훤과 우군인 섬진강 하구(순천) 세력, 그리고 동해중부의 명주(강릉) 세력 등도 있었다. 이 무렵 신라 해적이 활동을 재개해 일본의 공물선을 약탈했고, 규슈 북부 해안과 대마도를 몇 차례 공격해 동아지중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처럼 신라 하대는 해양호족이 우후죽순처럼 대거 등장하고, 신라 사회의 해체와 새로운 통일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해군력을 동원한 전쟁이 벌어졌다 견훤의 후백제 건국이 시대 가장 강력한 해양 세력은 견훤(甄萱)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경상도 상주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씨였으며, 신라의 중앙군으로 출발해 서남해에서 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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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신라·백제에 가야·부여 더한 5국시대로 봐야, 900년 가까이 존속한 부여…많은 국가들이 계승해
우리는 고대를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야를 포함하면 ‘사국 시대’고, 거기에 부여까지 더하면 ‘오국 시대’가 된다. ‘부여’는 한국 고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와 성격을 지니는 나라다. 원조선을 빼놓고는 가장 먼저 국가로 등장했고, 무려 900년 가까이 존속했다. 부여를 계승한 나라들우선 부여를 표방하거나 계승한 나라들을 살펴보자. 첫째, ‘북부여’다. 414년 세워진 광개토태왕비의 첫머리에는 추모(주몽)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물신인 하백의 따님이라고 새겼다. 또 직전에 만들어진 모두루총의 묘지석에는 추모성왕이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썼으며, 그 밖에 여러 기록이 해모수를 북부여 천제라고 했다.둘째, ‘제1 동부여’다. 부여의 왕 해부루는 동쪽으로 이전하고 국명을 동부여라고 변경했다. 아들 금와왕은 해모수의 부인인 유화부인을 궁으로 데려왔고, 알에서 태어난 주몽은 성장하면서 대소 등 왕자들과 갈등을 일으켜 탈출했다. (동)부여는 285년 선비족에 수도가 점령되면서 왕은 자살하고, 백성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어 광개토태왕의 공격으로 병합됐다가 494년 문자왕에게 항복했다.셋째, ‘홀본부여’다. 《삼국사기》에는 ‘졸본(卒本)’으로 표기했지만, 광개토태왕 비문에 새겨졌듯이 ‘홀본(忽本)’이 정확하다. ‘홀’은 ‘골’ ‘마을’ ‘나라’를 뜻하는 부여계 말이다. 그러므로 홀본은 ‘홀’의 근본, 즉 원(原)부여일 가능성이 크다. 주몽은 소서노 등 연씨 세력이 장악한 홀본부여를 토대로 고구려를 건국했으므로, 《위서》 등에는 &ls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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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후예 이정기와 후손이 세운 제나라, 55년 만에 멸망…망각한 우리 역사의 일부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한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이정기였다. 안녹산의 군대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그는 761년에 사촌인 후희일과 함께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산둥의 등주로 이주했다. 산둥 지역은 우리와 연관이 깊은 동이인들의 핵심 터전이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은 물론, 끌려오거나 자발적으로 정착한 백제 유민도 거주했다.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데 필요한 우호집단이 충분히 있었고,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에도 적합했다. 유라시아 정치 질서의 변화와 이정기의 등장이러한 지역을 토대로 이정기 세력이 성장하고 있을 무렵 동아시아의 정세는 어떠했을까? 일본은 나당연합군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한 후유증과 새나라 건국이라는 혼란기를 극복하고, 신라를 공격한다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전쟁준비를 벌이는 한편 당나라의 현실을 정탐하고, 안정기에 들어선 발해의 문왕 정부와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반면에 신라는 경덕왕 때 지방을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등 안정적이었으나, 이미 분열과 갈등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현재 운남성 일대에서는 737년에 남조국이 통일을 이룩하였고, 이어 토번과 동맹을 맺으면서 당나라와 대결했다. 754년에는 진압하러 간 당나라 군대 7만 명을 전멸시키기도 했으며, 이 무렵인 779년에는 수도를 대리(大理)로 옮기면서 성장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갓 서른을 넘긴 이정기는 사촌인 후희일을 축출한 부하들에 의해 절도사의 지위에 올랐다. 당나라 조정은 765년 그에게 평로치청절도사의 관직과 이정기라는 이름, 그리고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陸運海運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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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지역서 두각을 나타낸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 당 혼란기에 산둥반도 장악…제나라 건국으로 이어져
사래 긴 논밭을 일구며 식구들과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 있는가 하면, 격동과 해일, 절망과 환희, 죽음과 죽임을 오가는 역사의 삶도 있다. 고구려를 부활시킨 대조영, 고선지, 그리고 망각된 이정기 같은 삶 말이다.781년 뜨거운 여름날 그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지척에 두고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을 주력으로 산둥지역을 지배하고, 영역을 넓히면서 오랫동안 숨기고 준비해 온 유민들의 한과 희망을 폭발시키려는 순간이었다. 당나라 정부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순간, 그는 악성종양으로 49세의 나이에 급서했다. 아들인 이납은 제나라를 선포했고, 멸망할 때까지 무려 55년 동안 고구려인들의 나라는 번영을 누렸다. 이정기의 탄생과 국제질서의 변화고구려는 70년 동안의 긴 전쟁에서 패배했고, 복국전쟁까지 실패했다. 유민들은 산둥성, 장쑤성, 심지어는 간쑤성, 칭하이성, 쓰촨성까지 끌려갔고, 남은 일부는 요하를 사이에 둔 벌판에서 고달픈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의 수륙군이 732년에 당나라를 공격해서 대승했고, 바로 그 해에 이회옥(이정기)이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구려의 역사와 발해인들의 존재를 알았고, 10대 후반에는 ‘고선지’라는 인물이 파미르를 통과하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거둔 탄구령 전투와 751년에 ‘탈라스’에서 벌어진 동서문명의 대결전에서 대패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그때 고선지와 그 병사들이 자기와 같은 핏줄임을 안 청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이렇게 성장한 그가 역사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또 다른 고구려를 부활시키는데 기회를 마련한 것은 국제환경이었다. 당나라는 통념처럼 안정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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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를 떨게 한 고구려 출신 부대…끝내 모함에 몰린 '유민 2세대'의 좌절
8세기 당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숙적인 투르크(돌궐)는 망했다가 다시 성장하는 중이었고, 서남쪽의 고산 지대에서는 토번(현 티베트)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왔다. 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불사했고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에게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고선지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단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발해 타클라마칸을 횡단했다. 그 속에는 용맹스러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평가되는 고구려 병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고선지는 평균 높이가 5000m가 넘는 파미르 고원을 건너 100일 동안을 행군한 끝에 오식닉국(현재 시그난 지방)을 급습했다. 연운보 전투를 벌여 적군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1000마리의 말과 무기 등을 노획했다. 72개 소국 점령한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그런데 그는 지친 병사들을 남겨둔 채 3일 동안 더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토번의 거점인 탄구령 정상에 도달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을 마침내 넘은 것이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소발률국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현시킨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그는 72개의 소국들에게 항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재빠르게 다가오는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그의 명성과 고구려 부대의 강인함은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 때문에 승리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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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서역 정벌 영웅, 고선지 장군…고구려 출신 병사들과 파미르 고원 넘어
지칠 대로 지친, 수 백 명의 당나라 군인들이 3일 동안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의 탄구령(坦駒嶺) 정상에 도달했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현재의 키르키트인 소발률국(小勃律國)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당나라를 압박한 토번과 사라센 제국당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숙적인 투르크(돌궐)는 망했다가 다시 성장하는 중이었고, 서남쪽의 고산 지대에서는 토번(현 티베트)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당태종은 토번의 임금인 송챈감포(松贊岡保)에게 딸인 문성공주를 왕비로 보낼 정도였다. 울면서 멀고도 먼 티베트까지 시집을 간 그녀의 애달픈 사연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토번은 이 무렵에는 더욱 막강해져 당나라의 장안을 위협하고, 서북쪽으로 진출해 파미르 고원의 산악 지대와 수십 개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그러면 당나라는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약화될 뿐만 아니라, 동로마까지 이어지는 물류망이 위험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받는 상황이었다.한편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왔다. 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불사했다. 3번이나 군대를 파견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은 고선지 장군을 선택해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윤명철,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고선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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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력·상업에 문화·종교까지 결합한…청해진 바다 영토 확대하며 신라 사회개혁 의식 높여
장보고와 청해진 체제는 무장력과 해양력을 바탕으로 동아지중해의 운송업, 삼각중계무역, 보세가공업을 운영했고 문화교류와 이데올로기 통합도 주도했다. 자치권과 상업활동, 세금 혜택 등이 보장된 느슨한 경제특구에 해당할 수 있다. 장보고는 천민도 왕족이 될 수 있다는 사회 개혁의식을 확산시켰다.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에는 평화의 시대, 경제의 시대, 무역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라비아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 동로마까지 연결된 사막 실크로드와 초원 로드는 동아지중해 무역망과 긴밀해지는 중이었다. 국가들과 대상인들은, 무장력을 갖춘 해상 관리자가 해적들을 퇴치해 바다를 평정하고, 무역로를 보호해 주길 원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장보고는 고향인 완도를 해양요새 ‘청해진’으로 만들고 본국신라인들, 재당신라인들, 재일신라인들을 ‘범(汎)신라인’으로 네트워크화해 항로를 일원화시켰다. 국제무역과 국내산업을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인 청해진은 국제교통의 ‘인터체인지(IC)’가 되었고 신라와 당나라, 일본, 아라비아 상인들은 물론이고, 승려들과 사신들도 장보고 선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쌍방무역을 넘어 삼각 중계무역 … 문화상품까지 주도장보고는 무역시스템을 변화시켰고, 상업의 내용과 상품을 다양화하는데 일조했다. 당나라에 ‘대당매물사’라는 수입상인들과 교관선(무역선)을 파견해 당나라, 동남아시아, 아라비아의 고가품들을 수입했고, 신라의 산업제품들을 수출했다. 일본에는 수입상인(廻易使·회역사)을 파견하고, 직접 후꾸오까(福岡)시를 방문해서 사무역은 물론 공무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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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력 바탕으로 한·중·일 항로 독점한 장보고…범신라인 네트워크로 무역의 시대를 이끌었다
국제관계의 혼란스러운 재편 속 한국은 어떻게 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문제는 사람과 정책이다. 우리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조상이 간 ‘길(道)’을 바라보면서 미래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지금, 과거 동아시아 세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신라의 장군이자 무역상인 장보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보고는 누구인가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에는 평화의 시대, 경제의 시대, 무역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라비아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 동로마까지 연결된 사막 실크로드와 초원 로드는 동아지중해 무역망과 긴밀해지는 중이었다. 장보고는 이 같은 국제정세 변화 속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아내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 천성과 특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거시적인 안목과 경륜을 갖춰 국제질서 변화와 신라의 내부상황을 간파하는 능력을 발휘했다.장보고는 790년경 섬(海島)에서 태어나 841년에 암살당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한 장보고는 짧고 냉소적으로 기술돼 있다.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 사람이다. 그들의 고향과 조상(父祖)은 알 수 없다.”는 내용과 함께 “청해진의 궁복은 왕이 자기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자 원망하면서 청해진에 머물면서 모반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그런데 《신당서》와 그 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두목이 묘사한 장보고는 전혀 다르다. 장보고와 정년은 싸움을 잘 했고, 특히 장보고가 용맹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에서는 ‘장보고(張保皐)’를 보배롭고 고귀하다는 의미의 ‘장보고(張寶高)’라고 남기기도 했다. 천태종의 좌주였던 엔닌(圓仁)은 장보고에 편지를 보내 흠모하고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