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68) 고구려 후예들이 건국한 제나라
사래 긴 논밭을 일구며 식구들과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 있는가 하면, 격동과 해일, 절망과 환희, 죽음과 죽임을 오가는 역사의 삶도 있다. 고구려를 부활시킨 대조영, 고선지, 그리고 망각된 이정기 같은 삶 말이다.(68) 고구려 후예들이 건국한 제나라
781년 뜨거운 여름날 그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지척에 두고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을 주력으로 산둥지역을 지배하고, 영역을 넓히면서 오랫동안 숨기고 준비해 온 유민들의 한과 희망을 폭발시키려는 순간이었다. 당나라 정부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순간, 그는 악성종양으로 49세의 나이에 급서했다. 아들인 이납은 제나라를 선포했고, 멸망할 때까지 무려 55년 동안 고구려인들의 나라는 번영을 누렸다. 이정기의 탄생과 국제질서의 변화고구려는 70년 동안의 긴 전쟁에서 패배했고, 복국전쟁까지 실패했다. 유민들은 산둥성, 장쑤성, 심지어는 간쑤성, 칭하이성, 쓰촨성까지 끌려갔고, 남은 일부는 요하를 사이에 둔 벌판에서 고달픈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의 수륙군이 732년에 당나라를 공격해서 대승했고, 바로 그 해에 이회옥(이정기)이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구려의 역사와 발해인들의 존재를 알았고, 10대 후반에는 ‘고선지’라는 인물이 파미르를 통과하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거둔 탄구령 전투와 751년에 ‘탈라스’에서 벌어진 동서문명의 대결전에서 대패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그때 고선지와 그 병사들이 자기와 같은 핏줄임을 안 청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렇게 성장한 그가 역사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또 다른 고구려를 부활시키는데 기회를 마련한 것은 국제환경이었다. 당나라는 통념처럼 안정되고, 동아시아를 장기간 지배한 나라가 아니었다. 초기부터 불안했지만, 8세기 중반에 이르면 더더욱 국제적으로 불안한 환경에 처했다. 멸망했던 돌궐은 부흥에 성공해서 제 2제국을 건설하면서 팽창 중이었고, 강력한 토번의 공격이 계속됐고, 이에 따라 파미르 지역의 산악 소국가들과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들은 당 체제에서 이탈했다. 한편 서아시아에서 발원한 아랍인들은 동진하면서 중앙아시아를 점령하고, 중국의 무역망을 빼앗으며, 영토까지 잠식하려 했다. 일전이 불가피한 현실을 자각한 당나라는 고선지를 다시 파견했지만,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당나라의 분열과 안녹산의 난한편 내부적으로 현종은 양귀비라는 애첩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했고, 그녀의 오빠인 양국충이 권세를 장악하면서 정치는 더더욱 혼란해졌다. 중앙정부가 무력해지는 상황에서 ‘안녹산의 난’이 발생했다. ‘안(安)’씨 라는 성을 가진 그는 지금의 부하라인 ‘안국’ 즉 소구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투르크인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전투에 능했고, 상업의 중요성을 잘 알았으며, 국제정세를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났을 것이다. 더구나 무력을 갖춘 절도사인 그가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당연했다.
절도사는 중앙 정부의 위임 아래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당 지역의 방어를 책임지면서 모든 권한을 가진 직위인데, 이방인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절도사들은 안녹산 등의 반군 세력들이 곳곳에서 정부를 공격하는 상황 속에서 군사적으로 팽창하면서, 독립적인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심지어는 절도사들 간에도 패권을 놓고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한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이정기였다. 안녹산의 군대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그는 761년에 사촌인 후희일과 함께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산둥의 등주로 이주했다. 더구나 뗏목을 타고 말이다. 항상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의 생각이었으며, 하필 그 곳을 선택했을까? 동이의 옛 땅,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새 터전산둥 지역은 고구려 유민들에게 의미가 크고, 세력을 확장시키기에 유리했다. 신석기 시대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곡창지대였고, 어업이 발달했다. 수로가 발달해서 내륙 물류망이 발달했고, 중국에서는 드물게 해양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어서 약 7000년 전부터 요동지역과 교류했던 항구들이 발달했고, 원조선의 모피를 실은 무역선들이 도착했었다. 때문에 청동기 문화가 발달해서 중국 문화의 기본 토대를 이룩했으며, ‘강태공’ ’공자‘ ’한신‘ 등이 이 지역 출신이다. 또한 우리와 연관이 깊은 동이인들의 핵심 터전이기도 해서 주민들은 문물들을 갖고 수시로 서해를 횡단해서 경기만을 비롯한 해안지역에 들어와 정착했다. 물론 이 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 살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단들과 승려, 유학생들도 산둥 북부 해안에 도착했다. 이 무렵에는 사료에 나타나듯이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은 물론이고, 끌려오거나 자발적으로 정착한 백제 유민들도 거주하였다. 정치적으로 독립하는데 필요한 우호집단들이 충분히 있었고,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에도 적합했다. 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전략지구였다. 발해와 신라가 파견한 사신단들과 상인들이 상륙하던 무역의 거점으로서 특히 발해와는 말무역을 해서 경제적으로 이점이 컸다. 또한 훗날 재당 신라인들이 활용했지만, 역사 이래로 값비싼 소금의 생산지였다. (윤명철,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 기억해주세요 당나라는 8세기 중반에 이르면 더더욱 국제적으로 불안한 환경에 처했다. 멸망했던 돌궐은 부흥에 성공했고 서아시아에서 발원한 아랍인들은 동진하면서 중앙아시아를 점령했다. 내부적으로 현종은 양귀비라는 애첩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했고 중앙정부가 무력해지는 상황에서 ‘안녹산의 난’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한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이정기였다. 781년 그는 당나라에 대한 대공세를 준비했으나 악성종양으로 급서했고 아들인 이납은 제나라를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