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들로 변신한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거주하면서 무역을 했던 항구인 유산포.
신라인들로 변신한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거주하면서 무역을 했던 항구인 유산포.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한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이정기였다. 안녹산의 군대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그는 761년에 사촌인 후희일과 함께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산둥의 등주로 이주했다. 산둥 지역은 우리와 연관이 깊은 동이인들의 핵심 터전이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은 물론, 끌려오거나 자발적으로 정착한 백제 유민도 거주했다.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데 필요한 우호집단이 충분히 있었고,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에도 적합했다. 유라시아 정치 질서의 변화와 이정기의 등장이러한 지역을 토대로 이정기 세력이 성장하고 있을 무렵 동아시아의 정세는 어떠했을까? 일본은 나당연합군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한 후유증과 새나라 건국이라는 혼란기를 극복하고, 신라를 공격한다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전쟁준비를 벌이는 한편 당나라의 현실을 정탐하고, 안정기에 들어선 발해의 문왕 정부와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반면에 신라는 경덕왕 때 지방을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등 안정적이었으나, 이미 분열과 갈등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현재 운남성 일대에서는 737년에 남조국이 통일을 이룩하였고, 이어 토번과 동맹을 맺으면서 당나라와 대결했다. 754년에는 진압하러 간 당나라 군대 7만 명을 전멸시키기도 했으며, 이 무렵인 779년에는 수도를 대리(大理)로 옮기면서 성장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갓 서른을 넘긴 이정기는 사촌인 후희일을 축출한 부하들에 의해 절도사의 지위에 올랐다. 당나라 조정은 765년 그에게 평로치청절도사의 관직과 이정기라는 이름, 그리고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陸運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라는 관직을 내렸다. 발해 및 신라와 맺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모든 관계를 관장하는 당나라로서는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의 직책이었다. 이정기의 공격과 제나라 건국산둥 반도의 북부지역은 신라와 발해를 상대하는 데 유리했고, 발해와 벌이는 외교, 말 무역 등의 국제무역을 관장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물류망인 대운하의 북쪽 종점과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운하경제에도 손을 뻗쳐 경제력이 막강해졌다. 그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요와 반란을 진압한다는 핑계를 대고 영토를 넓혔고, 마침내 산둥반도의 전 지역은 물론이고, 장쑤성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했다. 775년에 이르면 15개주의 84만호(약 400여만 명)를 다스리는 번진으로서 사실상 국가의 위상을 갖추었고, 요양군왕으로 봉해진다.

이정기는 어떤 판단을 했는지, 779년에 거점을 청주에서 운주(州)로 옮겼다. 이 곳은 대운하의 물류망을 장악하기에 유리한 곳이면서, 산둥 지역이면서도 수도인 장안과는 매우 가까웠다.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을 경험하면서 절도사들의 위협을 실감한 조정은 이정기를 위협세력으로 간주한 후에 대병력을 집결시켰고, 이정기 역시 공격을 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강회지역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정기는 10만의 병력으로 장안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그 해 여름, 고구려 부활의 과도한 집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악성 종양으로 서거하였다(지배선, 중국속 고구려왕국 제》). 다행히 아들인 이납(李納)은 명민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고, 위기를 수습한 후에 절도사의 직위를 이었다. 이어 ‘제(齊)’ 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건설하고, 자신은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유민들의 꿈이 산둥에서 실현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의 아들들인 이사고(李師古)와 이사도(李師道)를 거치면서 모두 3대가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동안 산둥반도 일대를 지배하고 통치했다. 한민족 역사에 큰 의미 남겨당나라 중앙 정부는 강력한 제나라를 오랫동안 공격했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심지어는 신라에 3만 병력을 파병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제나라는 전투에 패배하면서 멸망했는데, 당나라의 주력부대인 무녕군(武寧軍)에 참여해 군중소장으로 출세한 인물이 백제계 후예인 장보고(張保皐)였다. 이후 제나라 지역에 거주했던 고구려·백제계의 유민들은 새로 건너온 신라인들과 섞여 당나라의 해안과 대운하 주변에서 소위 ‘재당신라인’이라는 역사적인 존재로 탈바꿈했다.

한 개인의 삶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고, 그 판단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라는 도식적인 평가가 가능하지 않다.

이정기(李正己)의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이다. 그의 부모가 품은 ‘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고구려 후예라는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고, 한민족의 역사에 큰 의미를 남겼다. 다만 후손들이 그를 망각했을 뿐이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한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정기는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산둥의 등주로 이주한 뒤 절도사 지위에 올랐다. 775년에 이르면 15개 주의 84만 호(약 400만 명)를 다스리는 번진으로서 사실상 국가 위상을 갖췄고, 요양군왕으로 봉해진다. 절도사들의 위협을 실감한 당나라 조정의 공격에 맞서 승리한 이정기는 장안을 공격할 준비를 하다 악성 종양으로 서거했다. 아들인 이납(李納)은 ‘제(齊)’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건설하고, 자신은 왕위에 올랐다. 제는 이후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동안 산둥반도 일대를 지배하고 통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