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50년 전쟁 후 찾아온 참혹한 기근 (上)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처참한 살육 현장을 겪은 조선 백성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양 난을 겪으면서 많은 농토가 유실되고, 노동력도 부족했던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에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인구의 4분의 1인 무려 100만 명의 아사자가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
경신대기근은 세계적 소빙기 현상과 관련된 기후변화의 산물이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실록 등 사료를 보면 전례 없는 자연 재앙들이 발생했다.
1670년 초봄부터 한양에 눈과 우박이 내렸고, 3월에는 평안도에 운석이 떨어졌다. 1670년 5월 4일 평양 감사인 민유중은 편지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금년 같은 가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국운이 걸려 있어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한여름인 7월에도 우박·서리·눈이 전국에 내렸고, 함경도의 피해가 제일 심각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9월에는 목사가 처참한 피해 상황을 보고하면서 남해안 지역의 식량 지급을 요청했다.(현종실록)
다행히 정부는 신속한 조처를 취했다. 벼 등을 운반했고, 유배수들을 육지로 옮겼으며, 세금 감면과 특별 과거를 실시했고,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5월에 이르러서는 경기도를 시작으로 황충, 즉 메뚜기떼들의 공격이 극심했다. 7월 함경도에서는 황충과 함께 참새(黃雀) 1000만 마리가 들판을 덮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병충해들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떨었다.
그러자 조정도 위기 상황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기근 대책을 모색하는 1670년 8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허적은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고 국가의 존망이 결판났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 책임이 신하와 임금에게도 있다는 인식을 표현했다. 정부는 7월 삼남 지방에서 수군의 훈련을 중지하도록 지시했다. 8월에 들어서자 유민이 본격적으로 발생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실록에서는 ‘지난해의 흉년은 예전에 없던 것이어서 굶주리고 떠돌아다니다가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됩니다’(현종 12년 9월 9일)라고 전했다.
신해년에 들어오면서 겨울에 맹추위가 엄습해 사람들은 더욱 많이 죽어갔다. 자연 재앙이 계속돼 가옥이 파괴되고, 도로가 유실됐다. 식량 부족으로 기아 현상이 만연하면 필수적으로 전염병이 발생한다. 1671년 ‘팔도에 기아와 여역(돌림병)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이 더욱 심했다’(현종 12년 2월 29일)는 기록이 남았다. 숙종 때 극성을 부린 구제역인 ‘우역’이 이때도 발생해 8월에는 전국으로 퍼졌다. 당시 황해도에서만 7~8월 1만 마리 이상의 소가 죽었다. 농사의 근간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곡물값이 폭등했고, 농토가 부족한 해안가와 섬 지역의 백성들은 탈출해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수군체제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서울도 곡물이 부족한 데다 교통망의 붕괴로 세곡선들이 입항할 수 없었으므로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다. 곡물값이 몇 배씩 상승해 실록에 따르면 2냥 이내인 쌀 한 섬 값이 곧 5냥과 8냥으로 폭등했다(현종 12년 6월 14일). 이제 남은 일은 ‘대량 아사’의 현실화였다. ‘쓰러진 주검이 길에 즐비하고, 맨발에다 얼굴을 가리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사족의 부녀가 날마다 관아 뜰에 가득합니다’(현종 12년 6월 15일)라는 기록이 있다. 아사자는 1671년에만 10만 명가량 됐다고 하는데, 실제는 더 많았을 것이다. 농사용으로 도살이 금지된 소를 잡아먹고, 우역으로 묻은 죽은 소까지 파먹는 상황이었다.
조정은 ‘채취령’을 내려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된 산에 들어가 솔잎과 껍질을 먹게 허락했다. 사간원의 관리인 윤경교의 상소문에 따르면 이 시기에 기근과 돌림병으로 떠돌다 죽은 사람과 고향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하면 거의 100만 명에 이른다.(현종 12년 12월 5일) 그 직전의 인구가 516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25% 정도가 죽은 것이다.√ 기억해주세요 경신대기근은 세계적 소빙기 현상과 관련된 기후변화의 산물이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실록 등 사료를 보면 전례 없는 자연 재앙들이 발생했다. 1670년 초봄부터 한양에 눈과 우박이 내렸고, 5월에 이르러서는 경기도를 시작으로 황충, 즉 메뚜기떼의 공격이 극심했다. 7월 함경도에서는 황충과 함께 참새(黃雀) 1000만 마리가 들판을 덮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병충해들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떨었다. 한여름인 7월에도 우박·서리·눈이 전국에 내렸고, 함경도의 피해가 제일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