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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반인륜적 일이 생기고 사회 붕괴 가속됐지만, 적극 대응보다 공리공론으로 권력 투쟁 몰두

    사회는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고, 반인륜적인 일들까지 발생했다.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한 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시장에서 아이들, 부녀자들, 종들이 개돼지보다 못한 값으로 팔려나갔다.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건도 발생해 충청도에서 어미가 자식들을 삶아 먹은 사건을 구체적으로 보고한 일도 있다. 현종은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길러 노비로 삼는다는 법령을 공포했다.아사와 전염병으로 시신이 많아졌고 연고 없는 시신은 길거리에 버려져 파리들과 까마귀, 솔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성문 밖으로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시신과 함께 수레로 실려 나가기도 했다(현종실록). 또한 추위 때문에 무덤을 파고 시신의 옷을 훔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거기에다 도성 밖에 있는 관우사당(關王廟)의 사람 형상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이렇게 민심이 불안해지면서 몇몇 관리가 예측한 대로 도적이 나타났다. 유리걸식하던 백성은 관곡과 공물을 강탈했고, 도둑질에 가담했다. 금산에서는 유력한 지방 세력이 포수, 승려 수백 명을 모아 무주 적상산성의 군량곡을 겁탈하려고 모의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런 전대미문의 참상이 일어난 상황에서 정치권력과 학문권력을 독점한 조정의 사대부들은 어떤 자세로 어떤 정책들을 추진했을까?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정부가 세금을 받으며, 소수 특권층이 정치와 부를 독점할 때 내건 명분은 비슷하다. 능력자로 자연재앙을 예측해 예방 시설을 만들어 해결하며, 때로는 자기희생을 한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가뭄·돌림병 등 전례 없는 자연재앙 발생…경신대기근으로 100만명이 아사 추정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처참한 살육 현장을 겪은 조선 백성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양 난을 겪으면서 많은 농토가 유실되고, 노동력도 부족했던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에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인구의 4분의 1인 무려 100만 명의 아사자가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경신대기근은 세계적 소빙기 현상과 관련된 기후변화의 산물이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실록 등 사료를 보면 전례 없는 자연 재앙들이 발생했다.1670년 초봄부터 한양에 눈과 우박이 내렸고, 3월에는 평안도에 운석이 떨어졌다. 1670년 5월 4일 평양 감사인 민유중은 편지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금년 같은 가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국운이 걸려 있어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한여름인 7월에도 우박·서리·눈이 전국에 내렸고, 함경도의 피해가 제일 심각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9월에는 목사가 처참한 피해 상황을 보고하면서 남해안 지역의 식량 지급을 요청했다.(현종실록)다행히 정부는 신속한 조처를 취했다. 벼 등을 운반했고, 유배수들을 육지로 옮겼으며, 세금 감면과 특별 과거를 실시했고,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5월에 이르러서는 경기도를 시작으로 황충, 즉 메뚜기떼들의 공격이 극심했다. 7월 함경도에서는 황충과 함께 참새(黃雀) 1000만 마리가 들판을 덮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병충해들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떨었다.그러자 조정도 위기 상황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기근 대책을 모색하는 1670년 8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허적은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