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50년 전쟁 후 찾아온 참혹한 기근 (下)
효종 숙종 연간에 기민 정책과 당쟁을 벌인 송시열의 초상화.
효종 숙종 연간에 기민 정책과 당쟁을 벌인 송시열의 초상화.
사회는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고, 반인륜적인 일들까지 발생했다.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한 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시장에서 아이들, 부녀자들, 종들이 개돼지보다 못한 값으로 팔려나갔다.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건도 발생해 충청도에서 어미가 자식들을 삶아 먹은 사건을 구체적으로 보고한 일도 있다. 현종은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길러 노비로 삼는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아사와 전염병으로 시신이 많아졌고 연고 없는 시신은 길거리에 버려져 파리들과 까마귀, 솔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성문 밖으로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시신과 함께 수레로 실려 나가기도 했다(현종실록). 또한 추위 때문에 무덤을 파고 시신의 옷을 훔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거기에다 도성 밖에 있는 관우사당(關王廟)의 사람 형상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이렇게 민심이 불안해지면서 몇몇 관리가 예측한 대로 도적이 나타났다. 유리걸식하던 백성은 관곡과 공물을 강탈했고, 도둑질에 가담했다. 금산에서는 유력한 지방 세력이 포수, 승려 수백 명을 모아 무주 적상산성의 군량곡을 겁탈하려고 모의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런 전대미문의 참상이 일어난 상황에서 정치권력과 학문권력을 독점한 조정의 사대부들은 어떤 자세로 어떤 정책들을 추진했을까?

민간인들이 어려울 때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최영 장군 초상화.
민간인들이 어려울 때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최영 장군 초상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정부가 세금을 받으며, 소수 특권층이 정치와 부를 독점할 때 내건 명분은 비슷하다. 능력자로 자연재앙을 예측해 예방 시설을 만들어 해결하며, 때로는 자기희생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조정은 참상에 당황하고 한탄하면서 대책을 강구하고, 실천한 점들이 기록됐다. 필요에 따라 기우제와 기청제를 반복했고, 한양에서는 비축미를 풀어 시중가보다 싸게 팔았다. 식구 수를 기준으로 대출도 했다. 또 시전 상인들을 위해 훈련도감, 어영청 등의 군영과 관청이 보유한 비축미까지 팔았다. 그러나 권력과 유착한 특정인들이 사재기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특히 지방의 수령과 향리들이 진휼을 이용해 축재했다.

정부는 전국에 진휼소를 설치해 죽을 끓여 공급하는 임시방편도 했다. 1671년 1월 16일에 도성 안에 진휼소를 세 곳 두었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백성들의 입장을 고려해 용산과 홍제원에다 추가 설치했다. 2월 한 달 동안 2만 명이 얻어먹었는데 80세의 노파가 밟혀 죽은 사고가 일어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 계속됐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미봉책이었다. 이미 17세기 전반에도 대기근이 있었고, 16세기 중반 전염병도 크게 돌았다. 이후 영조 때(1749년)는 인구의 13분의 1 정도인 50만~60만 명이 죽어 조선시대에는 총 1000만 명 정도가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추정한다. 경신대기근 직후에 발생한 ‘을병(1695년·1696년)대기근’ 등 재난에 조정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현종이 즉위한 직후부터 대비의 상에 착용할 복식과 기간 문제 등으로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시작됐다. 이는 대기근 동안은 물론이고, 이후에는 피를 부르는 예송논쟁을 펼쳤다. 이때 조선은 도시와 마을의 체계를 바꾸고, 주거환경을 개선해야 했다. 농법을 적극적으로 개량하고, 벼농사 외에 대체 농업을 찾아내며, 산업과 상업을 발달시키고, 다양한 이점을 가진 무역을 활성화해야 했다. 조선통신사들이 본 일본은 이를 실천했지만, 성리학자들은 공리공론으로 정치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조선은 끝까지 같은 역사를 반복했다. 민심은 더욱 이반되면서 장길산 같은 민란 세력이 나타났고, 임술민란을 거쳐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러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기적이다. 우린 그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다. 지금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경제 불안과 생활고, 정치권력 투쟁, 국제환경의 불안정성 등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후손들에게 ‘경신년 대기근’ 같은 극한 상황을 겪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조정에서는 현종 즉위 직후부터 대비의 상에 착용할 복식과 기간 문제 등으로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시작됐다. 이는 대기근 동안은 물론이고, 이후에는 피를 부르는 예송논쟁을 펼쳤다. 이때 조선은 도시와 마을의 체계를 바꾸고, 주거환경을 개선해야 했다. 농법을 적극적으로 개량하고, 벼농사 외에 대체 농업을 찾아내며, 산업과 상업을 발달시키고, 다양한 이점을 가진 무역을 활성화해야 했다. 조선통신사들이 본 일본은 이를 실천했지만, 성리학자들은 공리공론으로 정치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조선은 끝까지 같은 역사를 반복했다. 민심은 더욱 이반되면서 장길산 같은 민란 세력이 나타났고, 임술민란을 거쳐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러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