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간도 개척과 영유권 갈등(上)
백두산 천지 아래의 서쪽 계곡.
백두산 천지 아래의 서쪽 계곡.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나라는 줄일 수 없다.(吾頭可斷國不可縮)”

국경(감계)회담에서 칼을 빼들고 위협하는 청나라 관리에게 조선 측 대표인 이중하가 한 말이다.

우리에게 ‘간도’는 무게감이 큰 존재다. 영토, 역사, 일본과 중국이란 외세, 조선인의 디아스포라와 독립운동 등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미완의 의무인 ‘간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사실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1712년 정계비를 설치한 과정과 내용, 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응 방식은 결국 19세기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간도’ 사태로 이어졌다.(이상태 <독도 수호와 백두산정계비 설치>) 19세기 말에 이르러 조선인들은 집단으로 두 강을 넘어가 개간을 시작했고, 이때 사이(間)섬을 뜻하는 ‘간도’라는 말이 역사에 등장했다. 한편 간도에는 개간(墾)한 곳이라는 의미와 조선의 ‘간(艮)방’이라는 뜻이 담겼다는 주장도 있다. 이주민이 계속 넘어오면서 거주 범위가 확장됐고,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만주 전체가 조선인의 터전으로 변해 ‘동간도(두만강 이북)’ ‘북간도(노야령 이북)’ ‘서간도(압록강 이북)’로 불렸다.

사진 속 간도비는 1999년에 중국에서 파괴하고 터만 남았다. 바로 앞이 북한 영토다.
사진 속 간도비는 1999년에 중국에서 파괴하고 터만 남았다. 바로 앞이 북한 영토다.
그러면 ‘간도 사태’는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을까?

기근과 재해, 관리들의 탐학을 못 견딘 백성들은 1862년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임술민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함경도의 두만강 일대에 살던 13가구, 60명의 주민은 결국 두만강을 건너 몇 년 전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연해주 남쪽에 정착했다. 이어 1869년 북부 일대에 막대한 수해로 ‘기사 대흉년’이 발생하자 수천 명의 조선인은 고향을 떠나 간도 지역에 정착했다.

청나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등 여러 이유로 1875년 무렵 남만주 일대에 민간인의 출입을 막았던 봉금령을 200여 년 만에 해제했다. 1844년의 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서양의 반식민지 상태로 변했다.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헤이룽강 이북 땅 100만㎢를 빼앗겼다. 그런데도 러시아가 서진을 계속하자 청나라는 만주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자국인들의 만주 이주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대부분 지역은 이미 조선인이 개간해 정착한 상태였다. 심지어 1869년에는 강계군수가 독자적 판단으로 조선인이 압록강을 건너 정착한 서간도 일대를 강계군의 여러 면에 배속시키고, 세금을 받는 등 관리를 시작했다. 이렇게 변한 상황에서 국경선과 조선 주민의 관리권을 놓고 두 나라는 이미 충돌을 시작했다.(백산학회 <간도 영유권 문제 논고>)

1875년에는 운양호 사건이 발생했고, 이듬해 조선, 일본과 ‘병자수호조규’를 맺었다. 제1 조항에는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내용을 넣었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인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고, 간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첫 사건이었다. 청나라는 1881년 한족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켜 간도 일대를 개척하게 했고, 1882년 4월에는 조선인들의 월강을 막으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5월에 이훙장이 주선해 조선은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었다.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와 척족세력의 요구를 빌미로 청나라는 군대를 파병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속방체제로 구축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간도의 조선인을 1년 내 송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실수였다. 이듬해 청나라가 간도의 조선인을 소환하라고 다시 요구하자 조선은 개혁파이자 국제 경험을 갖춘 어윤중을 파견해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이 무렵 간도 지역의 조선인은 청나라의 부당한 정책과 피해 상황을 돈화현에 항의하고, 정계비와 국경 문제의 핵심인 강의 근원 등을 자체적으로 조사한 뒤 결과물을 종성부에 제출했다. 때마침 이를 본 어윤중은 관리들을 두 번 파견해 정계비를 조사하고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내용이 새겨진 비의 탁본도 만들었다, 이후 토문강을 답사한 뒤 조정에 보고했다. 결국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증거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사해서 확인한 것이고, 정부는 그 덕에 비로소 인지한 것이다.

고종은 1883년 5월 정계비를 조사하라고 어윤중을 파견했다. 그는 7월 돈화현에 공문을 발송하고 조사 자료 등을 청나라에 발송한 뒤 정계비와 토문의 발원지 등을 공동 조사하자고 제의했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712년 정계비를 설치한 과정과 내용, 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응 방식은 결국 19세기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간도’ 사태로 이어졌다. (이상태 <독도 수호와 백두산정계비 설치>) 19세기 말에 이르러 조선인들은 집단으로 두 강을 넘어가 개간을 시작했고, 이때 사이(間)섬을 뜻하는 ‘간도’라는 말이 역사에 등장했다. 이주민이 계속 넘어오면서 거주 범위가 확장됐고,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만주 전체가 조선인의 터전으로 변해 ‘동간도(두만강 이북)’ ‘북간도(노야령 이북)’ ‘서간도(압록강 이북)’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