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국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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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원군, 세도정치 철폐 등 기득권 일소 성공…쇄국으로 세계질서와 열강 움직임 못 읽어
조선은 백성에게 가난과 질병, 부패와 공권력의 폭력을 안긴 불행한 체제였다. 조선은 정조의 죽음 이후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가 지속됐다. 소수 가문이 왕권을 능가하는 정치권력과 경제, 문화 등을 장악했고, 관직 매매 등 부패를 일상화했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은 죽거나 민란을 일으켰다. 일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 정착했다. 1863년 이런 상황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역사에 등장했다.그에게는 시대적인 과제와 사명이 몇 가지 있었다.첫째는 왕권 확립과 세도정치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과 실학 이후 신사상이 추구한 체제 변화였다. 대원군은 신속하게 중앙과 지방에 포진한 세도정치의 주역과 동조 세력을 숙청하고, 비변사를 폐지해 정치권과 군사권을 분리했다. 정치·문화 이데올로기의 산실이자 재산권 및 권력투쟁과 직결된 수많은 서원을 47개만 남겨두고 철폐했다. 양반들의 특권으로 병역 대신 부과했던 군포를 다시 거둬들였고, 사창제도 등을 시행해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런 개혁정책들은 구권력의 인적, 기득권의 물적 토대를 일소했고, 자신을 중심으로 신권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백성도 환호했다.하지만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 회복을 목적으로 추진한 경복궁 재건은 개혁을 좌초시켰다. 백성을 무리하게 징발했고, 재정 부족 때문에 발행한 당백전은 초기 단계에서 화폐경제의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세금을 걷는 데 차질이 생겼고, 백성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원납전을 부과해 관청과 지주들의 자진 기부를 유도했지만 결국 백성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대원군은 100년 가까이 성장한 실학자들의 존재와 연구, 정책 대안을 소홀히 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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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이 서양문물 적극 흡수하며 위기극복 할 때 조선은 권력투쟁 등으로 급변하는 정세 못읽어
조선 통신사들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파견됐는데, 한 번에 300~500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그들은 곳곳에서 일본의 변신과 발전을 보면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오랑캐라는 편견과 패전국이었다는 반감 때문인지 성리학의 우월감과 개인의 문학적 능력을 자랑하는 데 공력을 기울였다. 물론 조엄 등 일부는 꼼꼼히 상황을 기록하고, 귀국 후에는 문물을 도입할 것을 역설했지만 ‘북학’을 표방한 연행사 등과 달리 ‘남학’을 자처하지 못한 채 조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19세기 중반 무렵 서양 세력은 동아시아 세계를 유럽의 무역망,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서양의 우세한 무력, 불평등한 조약, 질 높은 상품 등과 대응해 방어와 역전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이었다.1853년 미국 군함(흑선)이 에도에 가까운 우라가에 정박해 포함외교를 개시했고, 1854년에는 요코하마에서 ‘일·미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이어 1855년에는 러시아와 ‘일·러 화친조약’을 맺었다. 사할린에 이미 진출한 러시아와는 1791년부터 지정학적으로 숙명적인 관계였다. 바쿠후는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해 1799년에 쿠릴열도를 ‘직할령’으로 지정했고, 1808년에는 마미야 린조를 사할린 지역에 파견했다. 그는 아무르강 하구까지 탐사해 오호츠크해와 북태평양 일부까지 포함된 지도를 만들었다. 김정호는 1861년에 이르러 ‘대동여지도’를 그렸다. 바쿠후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1854년 네덜란드에 군함과 장비를 발주했고, 1855년 10월에는 교관단이 입국해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르쳤으며, 1857년 9월 발주했던 군함이 드디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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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세력의 저항과 사회체제 경직성 벽 막혀…북학파 이상과 정책제안, 부분적 개선에 그쳐
만약 청나라, 일본, 러시아를 통해 서양의 평등사상과 독립 의지, 발전된 과학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면 어땠을까? 필시 세계의 존재와 문화의 다양성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관념론을 벗어나 실용론을 추구했을 것이다. 또 지구와 우주의 인식을 통해 거시적인 세계관을 갖추고, 조선의 정체성도 더 자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익 박지원 안정복 유득공 등은 만주의 역사와 지리를 발견하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재인식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상과 정책제안은 부분적 개선은 가져왔지만, 그 또한 왕을 비롯한 주류의 이익이 반영된 결과가 컸다.북학파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첫째, 주류 집단의 성격과 이데올로기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세계관이 협소할 뿐만 아니라 역동성을 상실해 400년 가까이 진보와 혁신의 필요성에 눈감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신사상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했다.둘째, 신분제 사회체제의 경직성이다. 신분에 따른 착취와 예속의 구조가 심각해 자발적인 생산과 창조가 어려웠다. 산업과 상업 등이 미발달했고, 자발성을 망각한 백성은 의욕을 잃은 생산자들이었다. 이익이 정리했듯 지주와 농민, 양반과 상인, 출사자와 비출사자, 적자와 서얼 사이에 관직과 토지를 놓고 숙명적인 이익 충돌이 벌어지는 구조였다.셋째, 추진 집단의 한계와 능력 부족이다. 소외 집단이면서 서얼인 그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치력과 경제력에 한계가 있었다.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심지어는 정약용도 고위관리나 대토지 소유자가 아니었다. 또한 가치관의 변화를 유도할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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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간 민감한 문제로 남은 간도 영유권 갈등…간도협약, 국제질서 재편이란 관점에서 살펴야
만주의 지정학적·지경학적 가치를 잘 알고 국경 분쟁을 자주 벌인 러시아도 만주지역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러시아는 1948년 2월 간도 일대에 조선인 자치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평양협정을 북한과 체결했다. 연길 등 간도지역 일부를 북한 영토로 편입시키려 했다는 문건이 공개됐다.중국 정부가 만주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던 불안정한 상황 속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팔로군에 소속된 조선족 다수가 북한군으로 편입돼 남침에 참여했다. 이에 남북통일을 저지하고 만주를 지킬 목적으로 중공군이 대거 파병될 때도 동원돼 크게 희생당했다. 전쟁이 끝난 뒤 만주에서 조선족의 힘은 약화됐고, 1955년에는 ‘조선족 자치구’에서 ‘자치주’로 격하됐다. 이후 1962년 북한과 중국은 국경선을 재조정한 ‘조·중 비밀변계조약’을 맺었다. 뒤늦게 밝혀진 내용을 보면 간도문제와 연관된 조항들이 있다. 백두산의 천지를 분할하고, 동서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했는데, 두만강은 상류인 홍토수를 국경선으로 확정했다. 이는 이중하가 주장한 조건과 동일하다. 또 천지의 소유권은 북한이 54.5%로 중국보다 넓고, 두 강 안의 섬도 북한이 더 많이 소유했다. 이 때문에 협상 책임자였던 저우언라이는 중국에서 비판받았고, 대만도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반면 우리 입장에서도 ‘토문’을 두만강으로 인정했으므로 간도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100년의 시한(2009년)을 넘긴 정부를 비판한다. 그런데 을사늑약 자체가 정당한 국제법에 벗어나고, 간도협약도 조약 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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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말부터 조선 이주민 늘며 개간 시작…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응이 간도사태 불러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나라는 줄일 수 없다.(吾頭可斷國不可縮)”국경(감계)회담에서 칼을 빼들고 위협하는 청나라 관리에게 조선 측 대표인 이중하가 한 말이다.우리에게 ‘간도’는 무게감이 큰 존재다. 영토, 역사, 일본과 중국이란 외세, 조선인의 디아스포라와 독립운동 등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미완의 의무인 ‘간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사실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1712년 정계비를 설치한 과정과 내용, 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응 방식은 결국 19세기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간도’ 사태로 이어졌다.(이상태 <독도 수호와 백두산정계비 설치>) 19세기 말에 이르러 조선인들은 집단으로 두 강을 넘어가 개간을 시작했고, 이때 사이(間)섬을 뜻하는 ‘간도’라는 말이 역사에 등장했다. 한편 간도에는 개간(墾)한 곳이라는 의미와 조선의 ‘간(艮)방’이라는 뜻이 담겼다는 주장도 있다. 이주민이 계속 넘어오면서 거주 범위가 확장됐고,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만주 전체가 조선인의 터전으로 변해 ‘동간도(두만강 이북)’ ‘북간도(노야령 이북)’ ‘서간도(압록강 이북)’로 불렸다.그러면 ‘간도 사태’는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을까?기근과 재해, 관리들의 탐학을 못 견딘 백성들은 1862년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임술민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함경도의 두만강 일대에 살던 13가구, 60명의 주민은 결국 두만강을 건너 몇 년 전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연해주 남쪽에 정착했다. 이어 1869년 북부 일대에 막대한 수해로 ‘기사 대흉년’이 발생하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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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귀환한 조선 포로들 환영은커녕 냉대받아…문벌사족들은 가족이 돌아온 사실 숨기기도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사람도 꽤 많았다. 《국조인물지》에 기록된 이엽 장군은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잡혀 포로로 끌려갔다. 좋은 대우와 회유를 뿌리치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결국 자결했다.쇄환, 즉 정부의 공식적인 노력으로 귀환한 사람들도 있었다. 1604년 6월 나라를 망친 성리학자들 대신 승병장인 사명당이 ‘탐적사’로 파견됐다. 일행은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만나고, 300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1607년에는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돼 전후 문제 등을 논의하고, 124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1624년에도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물론 일본이 자발적으로 쇄환시킨 포로도 있었다. 대마도 도주는 종전 전에 강화를 요구하면서 조선 포로를 500명 가까이 돌려보냈다. 광해군 때도 우호 관계를 회복하자면서 잡혀갔던 백성을 잇달아 쇄환시켰다.조선 정부와 사회는 귀국한 포로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첫째, 의심하고 경계했다. 선조 38년 6월 17일 기록에는 사명당을 따라 대마도에서 온 박수영이 나라를 배반해 인명을 많이 살해했으니 형벌을 주자는 요청에 선조가 윤허한 내용이 있다. 1601년에는 강사준과 여진덕 등이 80여 명이 함께 탈출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일본의 자연재앙과 분열상황 등을 보고했다. 그런데도 조정은 일단 의심하고, 조사를 단행했다.둘째, 믿기 힘들지만 냉대와 억압 등을 많이 저질렀다. 2차 쇄환, 3차 소환 때는 관리들이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고, 정부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귀환 포로를 억압하고 약탈하는 일도 빈번했다. 1605년 6월 7일자에는 유정(사명당)이 쇄환한 사람들을 마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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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회 해전 승리로 패망 위기 극복·동아시아 질서 변화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20여 번의 해전에서 무패했고, 아군은 100여 명의 전사자만 낸 이순신 장군이 전사 직전 한 말이다.육지전에서 끊임없이 패하던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5월 초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인 거제도의 옥포 대첩이 있었다. 같은 해 5월 말에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한 사천 전투에서 적의 배 79척을 침몰시키고 이순신 장군은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8월 14일에는 한산도 대첩이 있었고, 9월 1일에는 부산포 등 남해 동부 해안을 급습해서 대승했다. 이어 1593년과 1594년 계속 승리를 이어나갔다. 1597년에는 감옥에서 나와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고, 9월 16일에는 명량에서 13척으로 133척과 싸워 대승했다. 이후 몇 번 더 승리했고, 1598년 11월 19일에는 7년 전쟁의 마지막인 노량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전사했다.패전 국면이라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더구나 대규모 해양전에서 어떻게 이 같은 무패의 대승을 이룰 수 있었을까.이순신 장군의 승전들은 동아시아 질서와 한민족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전쟁의 향방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첫 전투인 옥포 해전에서 승리한 5월 7일 한양은 이미 점령당했고, 탈출한 선조는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승전보로 백성들과 왕조는 절망에서 희망을, 패배에서 승리를 기약할 수 있었다. 한산도 대첩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은 수군은 물론 육군과의 협동 작전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곡창인 호남은 보호됐고, 일본군은 군량미 보급 등의 차질로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아울러 의병 활동이 본격화됐다. 부산포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첫 상륙지이자 교두보를 공격해 100여 척을 침몰시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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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물 수용후 급성장한 일본, 전쟁으로 야망 분출…수차례 침략 의도에도 조선 조정 방어준비 게을리해
명나라는 전통적으로 실크·차·도자기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효율적인 상업 유통과 세금 징수, 국방비 등 때문에 은을 대거 사용했다. 은본위제를 채택하면서 멕시코 등 아메리카와 일본의 은이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대거 유입됐다. 결국 명나라는 유럽 주도의 세계 무역망 체제로 점점 끌려들어갔다.그렇다면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인 일본은 당시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1543년 유구국으로 가려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규슈의 다네가섬(種子島)에 표류했다. 이어 1549년 예수회 신부인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규슈 남부인 가고시마(鹿兒島)에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총·화약 등의 군사기술과 조선술, 항해술, 의학, 천문학, 천주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변화와 발전이 빨라졌다. 이는 또한 조총 등 군사기술 이용을 불러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서구 문물을 최대한 활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년 동안의 분열 상태를 끝내고 1590년 일본 전역을 군사적으로 통일했다. 그는 2단계 정치적인 통일, 3단계 문화적인 통일을 추진했다. 농민의 무기 소유를 금지하면서 신분제를 확고히 했고, 토지 제도를 개선했다. 동시에 다도 문화와 남만(포르투갈·에스파냐) 문화를 성행시켰다. 문인 지배·무방비 상태 조선이 타깃천한 신분 출신인 도요토미는 ‘관백’을 거쳐 ‘태합’으로 변신하며 자신의 야망을 확대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일본을 동아시아 세계에 알리고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관동을 비롯한 규슈 지역은 불완전한 지배 상태였고, 전후의 유휴 군사력 등은 내정의 안정적인 운영에 방해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의 군사 조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