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북학파의 개혁사상과 정책 (下)
통신사들이 머물렀던 시모노세키항의 아까마 신궁.
통신사들이 머물렀던 시모노세키항의 아까마 신궁.
만약 청나라, 일본, 러시아를 통해 서양의 평등사상과 독립 의지, 발전된 과학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면 어땠을까? 필시 세계의 존재와 문화의 다양성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관념론을 벗어나 실용론을 추구했을 것이다. 또 지구와 우주의 인식을 통해 거시적인 세계관을 갖추고, 조선의 정체성도 더 자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익 박지원 안정복 유득공 등은 만주의 역사와 지리를 발견하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재인식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상과 정책제안은 부분적 개선은 가져왔지만, 그 또한 왕을 비롯한 주류의 이익이 반영된 결과가 컸다.

북학파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주류 집단의 성격과 이데올로기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세계관이 협소할 뿐만 아니라 역동성을 상실해 400년 가까이 진보와 혁신의 필요성에 눈감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신사상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했다.

둘째, 신분제 사회체제의 경직성이다. 신분에 따른 착취와 예속의 구조가 심각해 자발적인 생산과 창조가 어려웠다. 산업과 상업 등이 미발달했고, 자발성을 망각한 백성은 의욕을 잃은 생산자들이었다. 이익이 정리했듯 지주와 농민, 양반과 상인, 출사자와 비출사자, 적자와 서얼 사이에 관직과 토지를 놓고 숙명적인 이익 충돌이 벌어지는 구조였다.

셋째, 추진 집단의 한계와 능력 부족이다. 소외 집단이면서 서얼인 그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치력과 경제력에 한계가 있었다.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심지어는 정약용도 고위관리나 대토지 소유자가 아니었다. 또한 가치관의 변화를 유도할 문화 예술이 부재했다. 패관문학은 정조에 의해 금지됐고, 정선 등에 이어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풍이 사회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청나라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빈약한 수준이었다. 또한 지식인의 한계를 보완하고, 우군이 될 농민과 상인들의 자각과 경제력이 터무니없이 약했다.

넷째, 남만주를 상실하고 해양을 봉쇄한 조선의 지리적 한계와 시대 상황 때문이다. 한반도는 쇄국정책을 취하면 출입구가 꽉 막힌 자루 같은 형국이다. 통신사와 연행사는 국제교류와 무역을 병행한 국가정책이 아니었고, 북학파들의 차이는 사적인 견문 행위였을 뿐이다. 따라서 사회로 확산시킬 수 없었다. 또한 대전쟁의 후유증으로 자생적으로 경제가 회생하거나 외부 문물을 수용해 발전시킬 토대가 마련되지 못했다.

다섯째, 기존 세력의 강력한 방어와 저항이다. 기존 세력은 중앙 정계뿐만 아니라 향약, 서원, 사당을 이용해 주류 이데올로기를 배양하고 추종 세력을 조직화해 향촌과 중앙을 연결하는 전방위 권력망을 구축했다. 또한 권력 투쟁을 도덕과 인륜으로 치장해 절대성을 유지했다. 영조와 정조의 권력 유지 정책도 작용했다. 특히 정조는 탕평책, 금난전권을 없애고 신해 통공발매책을 추진했으며, 서얼의 일부 기용 등 긍정적인 정책을 폈다. 하지만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처럼 풍자로 성리학 체제와 양반독점사회를 부정하는 패관문학 등이 유행하자 유포를 금지하는 ‘문체반정’을 시행했다. 또한 유행하는 서체가 자유로운 분위기라며 기존의 엄숙하고 강건한 서체로 돌아가자는 ‘서체반정’도 추진했다. 심지어 <주자대전집>을 기획해 주자학의 정통을 벗어나거나 양명학, 북학, 서학 등 자유로운 학문을 억제할 목적으로 주자의 저작을 수집한 뒤 출간하려 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쌓고 친위대를 육성하며 왕권을 강화했지만, 성리학을 보위하면서 조선을 더욱더 학문 국가, 사상 국가로 만들었다.

18세기 조선은 성리학을 변화시키거나 대체할 논리적 이론과 사상, 과감한 정책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했다. 하지만 북학파는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라는 생활 편의를 목표로 삼았다. 백성은 그 정도의 보답을 바라고 모험을 하진 않는다는 현실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박지원은 <허생전>에 이상향을 설정했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인간은 믿고 싶어 하며 현실을 변화시키려 노력한다. 때로는 대가 없는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8세기 조선은 성리학을 변화시키거나 대체할 논리적 이론과 사상, 과감한 정책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했다. 하지만 북학파는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라는 생활 편의를 목표로 삼았다. 백성은 그 정도의 보답을 바라고 모험을 하진 않는다는 현실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