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조선과 다른 방식으로 개항·근대화 성공한 일본(下)
요시다 쇼인을 신으로 경배하는 송음신사.
요시다 쇼인을 신으로 경배하는 송음신사.
조선 통신사들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파견됐는데, 한 번에 300~500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그들은 곳곳에서 일본의 변신과 발전을 보면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오랑캐라는 편견과 패전국이었다는 반감 때문인지 성리학의 우월감과 개인의 문학적 능력을 자랑하는 데 공력을 기울였다. 물론 조엄 등 일부는 꼼꼼히 상황을 기록하고, 귀국 후에는 문물을 도입할 것을 역설했지만 ‘북학’을 표방한 연행사 등과 달리 ‘남학’을 자처하지 못한 채 조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무렵 서양 세력은 동아시아 세계를 유럽의 무역망,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서양의 우세한 무력, 불평등한 조약, 질 높은 상품 등과 대응해 방어와 역전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1853년 미국 군함(흑선)이 에도에 가까운 우라가에 정박해 포함외교를 개시했고, 1854년에는 요코하마에서 ‘일·미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이어 1855년에는 러시아와 ‘일·러 화친조약’을 맺었다. 사할린에 이미 진출한 러시아와는 1791년부터 지정학적으로 숙명적인 관계였다. 바쿠후는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해 1799년에 쿠릴열도를 ‘직할령’으로 지정했고, 1808년에는 마미야 린조를 사할린 지역에 파견했다. 그는 아무르강 하구까지 탐사해 오호츠크해와 북태평양 일부까지 포함된 지도를 만들었다. 김정호는 1861년에 이르러 ‘대동여지도’를 그렸다. 바쿠후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1854년 네덜란드에 군함과 장비를 발주했고, 1855년 10월에는 교관단이 입국해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르쳤으며, 1857년 9월 발주했던 군함이 드디어 도착했다. 이런 상황에서 1858년 7월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맺었고,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연이어 조약을 맺었다. 이 ‘안세이 조약’은 천황의 허락없이 바쿠후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었으므로, 결국은 바쿠후 타도의 신호탄으로 비화했다.

그런데도 바쿠후는 1860년에 견미 사절단, 1862년에 견구(유럽) 사절단, 1863년에 견불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서양 문물을 배우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1863년 8월에는 사쓰마번이 영국과 3일 전쟁을 벌였고, 1864년에는 세토 내해의 입구를 방어하는 조슈번이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연합 함대와 전쟁을 벌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바쿠후는 1866년 계속해서 유학생을 영국으로 파견했고, 견러 사절단도 파견했다. 물론 유력한 번의 다이묘들도 바쿠후 몰래 국비 유학생을 파견하면서 새 시대에 대비했다.
일본 근대영웅으로 취급되는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송하촌숙.
일본 근대영웅으로 취급되는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송하촌숙.
이렇게 일본은 조선과 전혀 다르게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응양식을 보이면서 위기를 극복해갔다. 하지만 자체 모순으로 이미 분열 중이던 바쿠후는 외세의 침략을 방어할 능력이 부족했고,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이제 바쿠후와 천황가, 바쿠후 옹호파와 급진적인 존왕 양이파, 전략과 전술을 달리한 개혁 세력 간에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으며, 주체는 혼슈의 조슈번과 남규슈의 사쓰마번에 소속된 하급무사들이었다. ‘하기(萩)’에 기반을 둔 요시다 쇼인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원조이며, <유수록> 등을 통해 일본의 팽창을 역설하면서 조선 등의 구체적인 지역과 전략까지 제시했다. 그가 쇼카촌숙(松下村塾)에서 가르쳤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훗날 조선 침략의 주체가 됐다. 1868년 일본은 봉건 바쿠후제가 쓰러지면서 근대 천황제 국가로 변신했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주체들은 부국강병에 주력하면서 주변국의 침략을 추진했고, 그 우선순위는 숙명적인 관계인 조선이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이 전개될 때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악랄한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해 나라는 붕괴 직전이었고, 1860년 신정권을 수립한 대원군은 개혁정치도 했지만,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1865년부터 빈약한 국고마저 거덜낼 경복궁을 중수하는 사업에 돌입했다. 천주교가 가진 문명사적 의미와 정치적 역할을 모른 채 박해했으며,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뒤에도 승전이라고 백성을 기만하면서 자기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

가정해본다. 만약 조선의 지식인들이 현실과 백성들을 생각하고, 개방을 개혁과 발전의 호기로 판단하면서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했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안 됐을까.√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868년 일본은 봉건 바쿠후제가 쓰러지면서 근대 천황제 국가로 변신했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주체들은 부국강병에 주력하면서 주변국의 침략을 추진했고, 그 우선순위는 조선이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이 전개될 때 조선은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해 나라는 붕괴 직전이었고, 1860년 신정권을 수립한 대원군은 개혁정치도 했지만,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천주교가 가진 문명사적 의미와 정치적 역할을 모른 채 박해했으며,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뒤에도 승전이라고 백성을 기만하면서 자기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