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대원군의 개혁, 쇄국정책과 조선의 개항 (上)

그에게는 시대적인 과제와 사명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왕권 확립과 세도정치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과 실학 이후 신사상이 추구한 체제 변화였다. 대원군은 신속하게 중앙과 지방에 포진한 세도정치의 주역과 동조 세력을 숙청하고, 비변사를 폐지해 정치권과 군사권을 분리했다. 정치·문화 이데올로기의 산실이자 재산권 및 권력투쟁과 직결된 수많은 서원을 47개만 남겨두고 철폐했다. 양반들의 특권으로 병역 대신 부과했던 군포를 다시 거둬들였고, 사창제도 등을 시행해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런 개혁정책들은 구권력의 인적, 기득권의 물적 토대를 일소했고, 자신을 중심으로 신권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백성도 환호했다.
하지만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 회복을 목적으로 추진한 경복궁 재건은 개혁을 좌초시켰다. 백성을 무리하게 징발했고, 재정 부족 때문에 발행한 당백전은 초기 단계에서 화폐경제의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세금을 걷는 데 차질이 생겼고, 백성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원납전을 부과해 관청과 지주들의 자진 기부를 유도했지만 결국 백성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대원군은 100년 가까이 성장한 실학자들의 존재와 연구, 정책 대안을 소홀히 했다. 오히려 천주교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 탄압하기까지 했다.
둘째는 천주교의 수용과 서양세력의 개항 요구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었다. 서학과 천주교는 병자호란 직후부터 영향을 끼쳤지만, 신앙과 학문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는 서양인이 탄 이양선이 해안에 출몰했고,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했던 조선은 쇄국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서양 지도에 기록됐고, 이는 이후 독도 갈등의 씨앗이 됐다. 서양인들이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 작업을 구체적으로 시작한다는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조선을 둘러싼 세계 질서와 열강의 움직임은 어땠을까?

청나라는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을 맺었고, 1844년에는 미국, 프랑스와도 동일한 조약을 맺었다. 러시아와는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어 헤이룽강 이북과 연해주 땅 100만㎢를 빼앗겼다. 일본과는 1871년 상호평등 관계로 전환되는 ‘청일수호조규’를 맺었다. 서양의 압력을 막으려면 일본과 연합해야 한다는 ‘연일제서(聯日制西)’ 논리 때문이었다.
이 시대 러시아는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나라였다. 일본과 1875년 5월 러·일 화친조약을 맺어 사할린을 영토로 인정받았다. 반면 일본은 쿠릴열도의 18개 섬 전체를 양도받았고, 홋카이도를 영토로 삼을 권리까지 얻었다. 이후 러시아는 동아시아 질서에 직접 영향을 끼쳤고, 조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러자 위협을 감지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와 신흥 태평양 세력인 미국은 대항마로서 일본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구도를 파악해 서구 열강을 이용했다. √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