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의 이면
명나라는 전통적으로 실크·차·도자기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효율적인 상업 유통과 세금 징수, 국방비 등 때문에 은을 대거 사용했다. 은본위제를 채택하면서 멕시코 등 아메리카와 일본의 은이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대거 유입됐다. 결국 명나라는 유럽 주도의 세계 무역망 체제로 점점 끌려들어갔다.그렇다면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인 일본은 당시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1543년 유구국으로 가려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규슈의 다네가섬(種子島)에 표류했다. 이어 1549년 예수회 신부인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규슈 남부인 가고시마(鹿兒島)에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총·화약 등의 군사기술과 조선술, 항해술, 의학, 천문학, 천주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변화와 발전이 빨라졌다. 이는 또한 조총 등 군사기술 이용을 불러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서구 문물을 최대한 활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년 동안의 분열 상태를 끝내고 1590년 일본 전역을 군사적으로 통일했다. 그는 2단계 정치적인 통일, 3단계 문화적인 통일을 추진했다. 농민의 무기 소유를 금지하면서 신분제를 확고히 했고, 토지 제도를 개선했다. 동시에 다도 문화와 남만(포르투갈·에스파냐) 문화를 성행시켰다. 문인 지배·무방비 상태 조선이 타깃천한 신분 출신인 도요토미는 ‘관백’을 거쳐 ‘태합’으로 변신하며 자신의 야망을 확대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일본을 동아시아 세계에 알리고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관동을 비롯한 규슈 지역은 불완전한 지배 상태였고, 전후의 유휴 군사력 등은 내정의 안정적인 운영에 방해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의 군사 조직을 일원화하고, 군사력을 자의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은 대외 전쟁의 감행이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대상은 문인들이 지배하고, 오랜 기간 전쟁이 없어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던 조선이었다.
그는 통일을 완성하기 전인 1585년 관백이 될 때 조선을 공격할 의도를 보였다. 육군 병력뿐만 아니라 1586년에는 대규모 선박 건조 사업을 추진했고, 전쟁 전에는 포르투갈에서 전투력이 뛰어난 갤리선 등 함정 두 척을 구입하는 시도까지 했다. 1587년에는 대마도 도주에게 앞으로 조선을 공격할 것이니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1587년 6월에는 규슈의 하카타에서 대마도 도주에게 조선과 교섭해 조선의 왕이 입조하고, 어길 경우에는 공격한다고 전하라고 명했다. 중간자적 존재로 생활을 유지하던 대마도로서는 전쟁 발발을 막아야 했으므로 1588년 조선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어 1589년에는 도주가 된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건너와 일본의 침공을 암시했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하지만 조선은 거절했고, 대마도는 선봉대로 부산포에 상륙했다. 이 무렵 도요토미는 신부들에게 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을 공격할 의사를 표현했다. 동아시아에 7년에 걸친 국제전쟁조선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해 내정을 살피고, 침공 여부를 탐지하게 했다. 몇 달을 기다린 끝에 도요토미를 만나고 귀국한 사신단은 귀국하는 도중 답변서를 받았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로 칭한 답변서에는 대명국에 들어가 정 복하고 다스릴 것이며, 그때 조선이 군사행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도 조정은 방어 준비를 게을리했다. 1592년 음력 4월. 도요토미는 20만 명의 수륙군을 동원해 공격을 시작했고, 동아시아에서는 7년에 걸친 국제대전이 발발했다.
무능한 정부를 가진 조선은 어떻게 이 위기를 판단하고, 또 극복했을까. 전쟁 이후에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는 어떻게 변했으며, 유럽은 어떤 방식으로 동아시아 세계에 침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