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의 이면
‘임진왜란’ ‘임진조국전쟁’ ‘분로쿠역(文祿役)’ ‘만력조선전쟁’ ‘조일전쟁’.이는 모두 1592년 4월부터 1598년 12월까지 7년간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임진왜란’에는 피해자 조선 정부의 시각이 담겼다. ‘임진조국전쟁’은 북한이 자체 역사관에 맞게 교정한 용어다. 분로쿠역은 일본이 당시 천황의 연호를 따라 붙인 명칭이다. ‘만력조선전쟁’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만력은 조선의 동맹군으로 참여한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해 만들었고, 현대에는 ‘항왜원조’로도 사용한다. 조일전쟁이라는 용어는 근래에 우리 학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전쟁은 다른 관점으로 보면 한·중·일이 삼국통일전쟁 이후 1000년 만에, 또는 여몽 연합군의 일본 공격 이후 350년 만에 격돌한 동아시아 국제대전이다. 즉 국가 간 대결을 넘어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을 놓고, 육지세력과 해양세력이 대규모 육지전과 해양전을 동시에 벌인, 7년간의 장기 전쟁이었다. 전쟁의 목적과 배경도 정치적인 패권 장악뿐만 아니라 무역권과 무역망, 각종 자원의 획득, 문화재 약탈, 천주교의 전파, 심지어는 조선 도공을 비롯한 노예용 포로 획득 등이었다. 조선·일본·명을 주축국으로 해 주변 여러 나라가 이해관계를 놓고 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결과는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의 에도 막부, 청나라, 중가르 제국의 등장, 유구국의 일본화 시작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의 정치 질서에도 영향을 끼쳤다. 15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지리상의 대발견’ ‘대항해 시대’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아시아를 세계 무역망으로 끌어들였다. 이로써 차·실크·도자기·향료·후추 등의 상품을 매개로 유라시아 세계의 동서를 연결하는 단순무역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군사력과 비약적으로 발전한 조선술 항해술을 갖춘 유럽 세력은 아메리카(멕시코 브라질), 유럽(에스파냐·포르투갈),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명), 일본, 조선까지 이어진 긴 무역망을 구축했다. 이와 함께 영토와 자원, 무역권의 획득을 비롯한 종교(기독교)의 조직적인 전파, 신기술과 신무기의 거래라는 복잡한 관계망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동남아의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태국, 베트남, 유구국 등 국가들의 정치적인 상황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포르투갈은 1513년 이미 명나라에 진출했고, 1557년에는 마카오의 사용권을 획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유구와 일본으로 진출을 시작해 임진왜란 때 사용한 조총 등의 무기와 전투기술을 공급하고, 극소수의 인원이 양 진영의 전투원으로 참여했다.
이 무렵 전쟁의 주축국인 명나라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건국 초기부터 왜구의 침략으로 해안지역이 심각하게 약탈당했고, 이로 인해 해금정책을 시행하면서 내륙국가로 전환했다. 하지만 남부 해안과 도서 지역은 자연환경과 문화, 종족, 역사, 생활조건의 특성상 해금정책의 실효성이 약했다. 다수의 중국인은 후기왜구에 대거 참여해 국제적인 해적집단으로 변모했고 활동 범위도 유구, 동남아 일대까지 확장됐다. 정부는 일본을 압박해 왜구의 근절을 요구하고, 감합무역을 허락하는 정책도 취했으나 도요토미 시대까지는 효험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대거 탈출을 시도했고, 동남아 일대와 심지어는 일본까지 거주지들을 확장했다.
대외관계도 불안정했다. 초기에는 북쪽에서 원나라의 잔여 세력인 북원과 전쟁을 벌였다. 이어 몽골계인 오이라트와 힘겨운 접전을 벌여 베이징이 함락당하는 등 위기에 처했을 정도다. 한편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강력해지고, 1589년에는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를 멸망시킨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거의 통일했다. 따라서 명나라는 경제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안기는 조공무역을 하는 등 온건책을 쓸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국방력과 경제력이 소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