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후기 왜구의 변신과 일본의 발전 (上)
![베트남 중부 호이안의 바다와 연결된 강. 호이안은 15세기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한 지역이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05/AA.29923059.1.jpg)
1419년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인해 전기 왜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본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 주민들과 왜구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강온양면 정책을 폈다. 하지만 왜구는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부산) 왜변, 1555년에는 을묘왜변(강진·진도·영암)을 도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왜구가 침략한 내용이 312건이나 나온다.
이 무렵 동아시아에서는 ‘후기 왜구’들이 발호해 주로 중국 해안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1368년 건국된 명나라는 1371년 주민들이 바다로 나가는 행위를 막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 민간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푸젠성·저장성·광둥성 등 해안에 견고한 성을 쌓고, 군사를 양성했다. 군선도 건조해 곳곳에 배치했다. 이런 해금정책은 300년 이상 존속되다가 1684년에야 폐지됐다.
![가운데 다리를 놓고 오른쪽은 중국인 마을, 왼쪽은 일본인마을이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05/AA.29923072.1.jpg)
일본은 조공선을 파견해 금·은·구리·유황·철·도검 등을 수출하고, 비단(생사)·동전·도자기 등을 수입해 때로는 5~6배에 달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민간인들은 밀무역할 수밖에 없어 해안가 주민과 상인들은 해적 집단과 연계되거나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일본은 상업과 산업이 발달했고, 무역선들이 동남아시아에서까지 활동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523년 사용을 허가받은 영파항에서 일본 지방 세력이 파견한 사절단이 무역상 이권을 둘러싸고 큰 싸움을 벌였다. 당연히 명나라는 일본과의 무역을 금했고, 이 ‘영파의 난’을 계기로 후기 왜구가 발생했다고 한다.
왜구들은 해역의 자연환경과 물류체계에 정통했고, 선박을 능숙하게 운행했다. 일본 무사 출신이 많았고, 조총 등 신형 무기를 사용해 무장력이 매우 뛰어났다. 1547년에는 대규모로 파견된 정부의 진압군도 패배했을 정도다. 왜구들은 1553년부터는 보통 200~300척이 모여 선단을 이뤘다. 대마도, 이키섬, 규슈 북부의 마쓰우라, 오도열도, 히라도, 유구, 대만, 영파, 주산군도, 해남도 등을 근거지로 중국 해안은 물론이고, 일본과 조선의 연해도 공격했다. 이후 동남아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렇게 되자 명나라 내부에서는 오히려 해금정책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척계광은 조선에서 군사훈련에 활용한 병서인 《기효신서》의 필자인데, 1555~1567년 왜구를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또 정부는 1567년엔 푸젠성을 제한적으로 개항해 동남아나 포르투갈 등과 무역하는 일을 허락했다. 그 여파로 왜구들의 활동은 주춤했다. 하지만 근절되지 않았으므로 일본과는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https://img.hankyung.com/photo/202205/AA.23627452.1.jpg)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적질하던 왜구들 국제환경에 빠르게 적응, 다국적 무역상 변신…동남아까지 활동 범위 넓혀](https://img.hankyung.com/photo/202205/01.29961928.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