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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3) 중세철학

    흔히 철학사에서 중세라고 하면 ‘암흑의 시대’라고 한다. 이렇게 중세가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이유는 아마도 종교가 인간의 이성을 속박하였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중세 철학 또한 진지하게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으며,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곧바로 인간의 이성을 다시 강조하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 철학으로 건너뛰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비판철학이란 본래 이성의 힘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일진데, 종교의 권위 아래서 어떻게 진정한 철학이 가능하겠느냐라는 것이다. 중세 철학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 수업 현장에서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중세 철학 수업은 간단히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두어 개 학파에 대한 요약 정리로 간단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중세 철학은 철학사에서 생략 가능한 괄호 안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중세 철학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19세기 철학자 헤겔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헤겔에 따르면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철학적인 용어를 활용하여 형식적으로 반복할 뿐이므로 이는 철학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것이다. 물론 중세 철학도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와 같은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철학의 방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어떤 전제도 없이 오직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탐구해야 하는데,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미 진리라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중세 철학에는 비판받을 만한 암흑적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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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스토아 학파

    스토아 학파 창시자는 제논이다. 스토아 학파라는 명칭은 제논이 아테네 광장에 있던 ‘스토아(서양 건축에서 줄지어 선 기둥으로 된 주랑을 의미함)’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이 철학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마찬가지로 헬레니즘 시대에 혼란에서 벗어나 평온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등장하였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는 쾌락에서 행복을 얻고자 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지혜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였다.창시자는 제논스토아 학파의 지혜는 이성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진단하고 한계를 긋는 냉철함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에픽테토스의 말을 들어보자.“세상사 가운데는 내 권한에 속하는 것이 있고, 속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내 권한에 속하는 것은 생각, 충동, 욕구, 혐오 등 우리가 하는 행위다. 내 권한에 속하지 않는 것은 육신, 재산, 평판, 직위 등 우리가 하는 행위가 아닌 것들이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에픽테토스에 의하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세상살이에서 인간은 참으로 무력한 존재다. 특히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나와 같이 미미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가? 이것이 스토아 철학이 당대 사람들에게 던진 물음이었다.통제 불가능한 것은 무시하자에픽테토스의 철학은 나에게 속한 것(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겪는 수많은 혼란과 어려움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서부터 초래된다. 이것이 정념이 발생하는 원인이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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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11) 에피쿠로스학파

    ■ 생각해봅시다에피쿠로스학파가 주창한 쾌락은 과도한 욕구 만족과 다르다. 이 학파는 사치스러운 향락을 통한 쾌락은 후유증을 남긴다고 했다. 영혼에 불안한 상태가 없는 평정 상태를 진정한 쾌락이라고 주장했다. 쾌락의 종류를 구분한 셈이다.헬레니즘은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연안에서 오리엔트 지방까지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의 사상과 문화를 말한다. 그리스 도시국가가 무너지고 동방 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도시 국가의 붕괴는 그리스 사람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시 국가의 붕괴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공동체적 삶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들은 더 이상 도시 국가에서처럼 공동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유대감이나 일체감을 느낄 수도 없게 되었다.헬레니즘 시대의 철학개인의 생존을 더 이상 공동체에 의존할 수 없게 되자, 불안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도모하려고 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인들에게도 필요했던 것은 이상적인 행복론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야 하는 생존의 윤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다. 이들은 추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자족을 철학적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이번 편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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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아리스토텔레스(하) 인간은 정치적 동물

    《정치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 저술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본성, 국가를 세우는 이유, 가족과 국민의 자격, 가정과 국가의 목적, 가장 좋은 국가를 위해 필요한 교육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간은 정치적(또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사실 이 명언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전제가 되는 말이다.‘정치학’에 남긴 명언‘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가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그의 명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중시되는 ‘본성적으로’라는 목적론적 개념이 빠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명언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본래 의미하고자 했던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온전한 내용을 토대로 그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맥락 가운데 사용됐다. 따라서 이 명언 중 ‘본성적으로’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그의 사상 전체를 하나로 꿰는 화살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목적론은 “모든 자연물들이 목적을 갖는다”거나 “모든 자연물들이 본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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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아리스토텔레스(중) 행복론

    지난 편에서 살펴본 ‘질료’와 ‘형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모든 존재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다. 사물은 형상을 가져야만 현실성을 얻으며, 형상 없는 질료는 아직 가능성에 불과하다. 이제 질료와 형상은 각각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질료란 무언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태를 뜻하며, 형상이란 질료를 통해 만들어진 현실태라는 의미를 가진다.참나무는 도토리의 목적가령 도토리는 참나무가 되기 위한 가능태이고, 참나무는 도토리의 현실태다. 도토리가 참나무가 됨으로써 도토리의 고유한 기능이 발휘된 상태가 현실태이다. 참나무는 도토리의 목적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을 이끌어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세상 전체는 항상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향하는 목적을 갖고 이를 완성하고자 하는 사물들의 작용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사물을 해석하고 만물이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는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다. 이런 목적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복을 설명하고 있다.중용은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그러면 인간에게 궁극적인 선과 목적은 무엇인가? 즉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활동은 좋음을 추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개별 행위의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하지만 이런 수단과 목적의 연쇄를 계속 따라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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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아리스토텔레스(상) 현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마케도니아의 스타게이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유명한 의사였고, 어머니 또한 의사 집안 출신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학적 사고를 소중히 여긴 것은 극히 당연한 일. 아닌 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에 토대를 두고 모든 것을 성장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철학적인 입장을 체계화하게 되었던 것이다.생물학적 관점으로 철학18세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이 설립한 당시 ‘명문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에 들어가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된다. “기하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는 이 문에 들어서지 못한다.” 이 말은 아카데미 정문에 쓰여진 문구이다. 여기에는 아카데미를 세운 플라톤의 생각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에서 그의 제자들이 기하학을 통하여 ‘이데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20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으로부터 철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아카데미의 정신’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학문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과 철학적 견해가 다른 아카데미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흔히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기하학과 생물학의 차이와 같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기하학의 관점을 확대하여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를 제시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현실 세계에서 불변하는 변화의 원리를 찾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세계를 각각 다른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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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플라톤(하) 도덕론

    플라톤에게 ‘도덕’은 …인간의 상실된 내적 조화의 회복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욕망에 대하여 제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을 낳았던 것이 무지와 잘못된 지식이었기 때문에 지식만이 덕을 다시 낳을 수 있는 것이다.도덕은 훌륭한 또는 올바른 삶을 위한 기준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한다. 이러한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무엇이 나에게 좋고, 나쁜 것인지 그 기준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컨대 먼저 자신의 몸과 체질에 대해 잘 알아야 무엇이 자신의 몸에 좋고, 나쁜 것인지에 관한 기준을 정할 수 있는 것과 같다.자신의 몸과 체질을 알아야 한다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지에 대한 자각을 요구하고 있는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테네 사람들은 소피스트의 영향으로 상대주의적 지식에 안주하여 무지의 잠을 자고 있었다. 여기서 아테네 사람들의 ‘등에’로서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살펴보자.“오 훌륭한 사람이여, 그대는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명성이 높은 나라인 아테네의 시민이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까 하는 데에만 머리를 쓰고 또 평판이나 지위에 마음을 쓰고, 사려나 진리에 대해서 또 영혼을 가장 훌륭하게 하는 데에는 생각도 않고 염려도 하지 않으니 부끄럽지 않은가?”<소크라테스의 변명>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아테네 사람들은 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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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플라톤(중) 동굴의 비유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이데아론이다. 그의 이데아론에 의하면 세계는 현상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로 구분된다. 현상의 세계는 감각으로 지각되는 불완전한 세계로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반면 이데아의 세계는 이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완전하고 불변하는 세계이다. 예컨대 현실에 있는 삼각형이나 아름다운 꽃들은 모두 불완전하지만, 이데아의 세계에는 완전한 삼각형의 이데아와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불완전한 세계와 완전한 세계이 세상의 모든 사물마다 그 본질인 이데아가 있으며, 그 가운데 최고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이다. 그러나 이데아에 대한 그의 사상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플라톤도 이데아를 말로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 제시된 유명한 ‘동굴의 비유’이다.동굴 안에 죄수들이 갇혀 있다. 이들은 오직 맞은편 동굴 벽에 있는 그림자만 볼 수 있도록 온몸과 목이 사슬에 묶여 고정된 상태이다. 죄수들의 뒤에 있는 장벽 위에서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서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죄수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평생 벽만 보고 살아온 죄수들은 등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묶여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들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죄수가 사슬에서 풀려나 동굴 밖으로 끌려 나간다. 그 죄수는 지금까지 보아온 그림자들이 모두 실물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는다. 동굴 밖 세상을 보고, 모닥불이 아닌 진짜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