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중세 귀족들이 향신료에 열광했던 진짜 이유는?

    ☞옆에서 소개한 사례는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의 책 《원더랜드》(프런티어 펴냄·444쪽·1만6000원)를 발췌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혁신이 획기적 아이디어나 기술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놀이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한다. 패션, 쇼핑, 음악, 맛, 환영, 게임, 공공장소 등 여섯 주제로 나눠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상업화 시도와 신기술 개발, 시장 개척으로 이어진 다양한 사례를 담았다.어느 초등학교 역사책이든 향신료 무역이 세계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세계무역, 제국주의, 콜롬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와 발견, 로마의 멸망, 주식회사, 베니스와 암스테르담의 변치 않는 아름다움, 이슬람교의 세계적 확산, 여러 풍미가 뒤섞인 도리토스의 맛까지 모두 향신료에서 비롯됐다. 인간이 향신료에 맛을 들였기에 오늘날의 세계가 존재하게 된 셈이기도 하다.욕망과 환상의 사치품지금 일상에서 값싸게 누릴 수 있는 향신료는 한때 말도 못하게 비싼 사치품이었다. 인간이 ‘그까짓 맛’ 때문에 그토록 엄청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향신료 열풍이 일어난 이유는 기본적인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게 통상적인 해석이다. 고대 로마시대나 중세에는 겨우내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으로, 상하기 시작한 고기의 역겨운 맛을 덮기 위해 향신료를 썼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가설을 부정하는 논리도 있다. 후추나 육두구는 거금을 들여야 살 수 있었으므로 1600년대 가격 하락 전까지 유럽 상류층만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유럽 귀족에겐 신선한 고기나 생선이 동나는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향신료는

  • 교양 기타

    컴퓨터 키보드의 조상은 피아노의 건반 '소리의 진화'가 디지털 혁명을 이끌었죠^^

    ☞옆에서 소개한 사례는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의 책 원더랜드(프런티어 펴냄·444쪽·1만6000원)를 발췌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혁신이 획기적 아이디어나 기술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놀이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한다. 패션, 쇼핑, 음악, 맛, 환영, 게임, 공공장소 등 여섯 가지 주제로 나눠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상업화 시도와 신기술 개발, 시장 개척으로 이어진 다양한 사례를 담았다.4만3000년 전 슬로베니아 북서쪽 변방 동굴에 살던 어린 곰 한 마리가 숨졌다. 그로부터 1000년 후 독일 남쪽 블라우강 숲속에서 매머드 한 마리가, 5000년 후에는 백조 한 마리가 숨졌다. 이들 생명체가 사후에 맞은 운명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남은 뼈가 인간의 손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피리’로 변신했다는 것. 지금도 연주가 가능할 만큼 잘 보존된 것도 있다.수만년 전 인간이 음악에 눈뜬 이유는음악과 관련된 기술의 역사는 생존을 위해 만든 옷이나 사냥 도구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훗날 학자들은 뼈에 뚫린 피리 구멍 사이의 간격이 완전 4도와 완전 5도 소리를 내도록 배치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4도와 5도는 현대음악에서 많이 쓰는 화음의 뼈대를 이룬다. 한 옥타브 차이는 주파수가 정확히 2 대 1인 음정을 만들어 청각에 생생한 울림을 남긴다.음향이론의 기본도 몰랐을 초기 인간이 왜 악기를 만들었을까. 음악은 인간에게 쾌락을 준다. 설탕이나 아편이 뇌의 쾌락중추를 자극하는 방식은 간단하지만, 음악은 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자극한다. 인간은 이미 체험한 음악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을 계속 추구하게 된다. 뼈로 만든 인류 최초의 피리 소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통계학·보험·헤지펀드·스마트폰의 공통점은? 도박을 연구하던 괴짜 천재들 덕에 탄생했죠 !

    ☞옆에서 소개한 사례는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사진)의 책 《원더랜드》(프런티어 펴냄·444쪽·1만6000원)를 발췌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혁신이 획기적 아이디어나 기술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놀이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한다. 패션, 쇼핑, 음악, 맛, 환영, 게임, 공공장소 등 여섯 주제로 나눠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상업화 시도와 신기술 개발, 시장 개척으로 이어진 다양한 사례를 담았다.게임은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문화유물이다. 이집트 파라오는 동물의 발목뼈로 만든 ‘아스트라갈리’로 주사위놀이 비슷한 게임을 했다. 우르 왕릉에서는 오늘날의 ‘백개먼’과 비슷한 게임이 발견됐다.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런 정교한 게임도구들을 보면 우연과 무작위성을 향한 인간의 관심이 매우 뿌리깊은 듯하다. 자연의 기본원리를 아직 밝혀내지 못했던 과학 이전의 세상에서, 우연의 요소가 작용하는 게임은 날마다 삶이 던지는 무작위성에 대해 인간이 예행연습하는 셈이었다.주사위게임에서 확률공식을 찾다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주사위는 체스게임의 진행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1283년 스페인의 한 체스 플레이어는 “게임 한 판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지친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빨리 진행하기 위해 도입한 게 주사위”라고 기록했다. 체스는 논리와 정보에 기초한 게임이었기에 우연과 운이 작용하는 주사위를 도입한 방식은 얼마 안 가 사라졌다. 하지만 주사위는 체스 이외 분야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16세기 이탈리아의 젊은 의학도 지롤라모 카르다노는 도박장에서 게임

  • 교양 기타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 대중을 속이는 못된 통계도 있다 !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아니다. 거짓말을 자주 한다. 자기 주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려고 입맛에 맞는 수치만 골라쓰는 사람이 있어서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이런 쓴소리도 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고.가려내자! 엉터리 통계경제학 교수 출신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틈만 나면 “4대 그룹 매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9년 전만 해도 40%였지만 지금은 50%가 넘는다”며 재벌을 비판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생산된 부가가치의 합인 GDP를 해외에서 80%를 벌어들이는 4대 그룹(삼성·현대차·LG·SK) 매출과 비교하는 건 비교기준이 틀렸다. 그의 계산법대로라면 중소기업의 GDP 비중은 120%다.국토교통부는 ‘인구 5000만명 중 30.1%가 전국의 개인 토지 소유’라는 보도자료를 냈고, 언론은 이걸 인용해 ‘땅 한 평이라도 가진 사람, 국민 10명 중 3명’이라고 썼다. 토지 불평등의 근거로 들기 딱 좋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있으나마나한 통계다. 한집에서 부동산은 보통 가장 명의로 등록한다. 4인 가구라면 25%가 땅을 독식한다고 말하는 셈이다.대체휴일제 도입과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여론조사에선 찬성이 76.7%,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선 반대가 85.3%였다. 문체부는 쉬는 걸 좋아하는 직장인들에게, 경총은 휴일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자영업자와 임시직에게 물어봤기 때문이다.칼럼니스트 대럴 허프는 통계에 속지 않는 방법으로 △누가 발표했나 △어떻게 조사했나 △빠진 데이터나 숨겨진 자료는 없나 △데이터와 결론 사이에 쟁점

  • 역사 기타

    1948년 5·10 전국 200개 선거구 첫 총선거...제주도 2개구는 좌익 폭력으로 뒤늦게 투표

    국민 대다수 참여한 첫 선거1948년 5월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총선거가 치러졌습니다.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지요. 이 선거에서 뽑힌 국회의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하는 일이었습니다. 5·10선거는 국민 대다수의 적극적인 참여로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대표를 뽑을 수 없는 선거구가 있었습니다. 주민의 절반도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제주도의 두 선거구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제주도에서는 제주 4·3사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제주 4·3사건은 5·10선거에 대한 가장 강렬한 반대 투쟁이었습니다.해방 후,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제주도에 들어간 때는 1945년 11월9일이었습니다. 육지보다 두 달이나 늦게 들어간 것이지요. 그 사이 제주도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지방 조직인 인민위원회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인공은 해방 직후 좌익 성향의 인사들이 만든 조직입니다. 처음에는 인민위원회도 미군과 협조해 순조롭게 질서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6년 8월 제주도가 전라남도로부터 분리되면서 미군정과 제주도의 좌익 세력 사이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주경찰감찰청이 새로 생기면서 경찰 수가 늘어났고 그 과정에서 갈등이 싹튼 것이지요.이후 제주도에서는 불법 시위를 벌이는 좌익 세력과 이를 진압하는 경찰 또는 미군 사이에서 충돌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미군정은 제주도의 질서를 유지하려면 좌익 세력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제주도의 관리를 강경한 사람들로 바꾸고 경찰을 더 많이 보냈습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총파업을

  • 역사 기타

    (23) "UN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 치르자" 소련 반대…좌익들 방화·테러로 방해

    미소공동위원회 1년 만에 해체미소공동위원회는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입니다. 그런데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1월에 구성돼 1년여 만에 끝내 깨지고 말았습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미국 정부는 더 이상 소련과 함께 한국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947년 9월 UN 사무총장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의제로 삼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소련은 강력하게 반대했지요. 하지만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안이었던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UN에 넘겼습니다.미국은 UN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미국은 남북한의 인구 비례에 따라 국회의원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안에도 소련은 반대했습니다. 당시 남한 인구는 북한의 두 배에 달했습니다. 인구 비례로 국회의원을 뽑으면 임시정부 국회는 남한의 영향 아래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해 반대한 것입니다.UN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정기 총회에서 다루기로 했습니다. 1947년 11월14일, UN 총회는 다음과 같은 한국 통일안을 43 대 9(기권 6)로 통과시켰습니다.① 남북한 전 지역에서 UN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선거로 국회를 구성한다.②그 국회가 남북에 걸친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③선거를 감시하고 준비하기 위해 UN한국임시위원단(이하 UN위원단)을 구성한다.④통일 정부가 만들어지면 90일 이내에 남북한에서 미국군과 소련군은 완전히 철수한다.남한내 좌익 폭력투쟁UN 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1월 UN위원단이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는 들어가지도 못

  • 역사 기타

    소련, 우익 단체를 제외시키려 온갖 책동…이승만 "남한만의 정부라도 세워야 한다"

    미소공동위원회 무기한 휴회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한을 아우르는 임시 정부 수립 문제를 우리 정당이나 사회단체 등과 협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단체들을 그 협의에 참여시킬 것인가에 대해 미국과 소련은 합의하지 못했지요.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는 단체를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스크바 협정에서 언급한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단체, 즉 우익 단체들을 협의에서 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에는 소련이 원하는 정부가 세워지겠지요. 미국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신탁 통치를 반대한 이유로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동의할 수 없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끝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습니다.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로 들어가자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의 결정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1946년 6월 전북 정읍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연설을 했습니다. ‘정읍 발언’이라고도 하는 그 연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무기 휴회된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릴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이 발언에 나온 ‘남방만의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는 미소공동위원회가 만들려고 한 통일적 임시 정부의 남한만의 조직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 역사 기타

    김일성이 소련 지령으로 공산정권 세울 때 남한은? 독립운동가 이승만 "공산당은 안된다" 단결 호소

    일사불란 북한 vs 지리멸렬 남한김일성 등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만들고 있을 때 남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남한에서는 통일 정부를 기대하며 우익과 좌익이 서로의 주장을 지켜내기 위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1945년 9월 8일 미군이 남한에 들어왔습니다. 해방된 지 23일 만이었지요. 남한에 들어온 미군이 할 일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도 남한에는 이미 많은 정치 단체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만큼 해방 조국에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우리 민족의 열망이 컸던 것입니다.가장 먼저 구성된 단체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습니다. 9월 3일에는 박헌영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처음 건준에는 좌익과 우익 성향의 민족주의자가 고르게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 세력이 건준의 지도부를 손에 넣게 되었지요.좌익 성향을 띠게 된 건준은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라는 정부를 세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여운형, 김구, 김규식, 조만식 등 당시 이름을 날리던 인물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혔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 인사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지요. 인공은 법적인 절차에 따라 공개적으로 조직된 정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공은 단지 좌익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세운 정치 단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미군은 9월 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일본의 항복 조인식을 열었습니다. 이때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까지 3년 동안 미군은 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