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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4)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하)

    사회 풍자 소설로서 《유토피아》는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거기에는 저자인 토머스 모어의 진솔한 생 각이나 주장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유토피아》는 곳곳에 현실에 대한 풍자와 역설적 표 현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 풍자와 역설적 표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책이 재 미는 있지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책이라는 것을 반증한다.‘유토피아’의 원래 제목은?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처음 출간될 당시 그 책의 원래 제목은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한,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한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이었다. 어느 책이든 책의 제목을 보면 당연히 그 안의 내용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기 마련이듯이, 《유토피아》도 원래 책 제목만 보면, 거기에는 유토피아라는 완벽한 사회의 유익하면서도 즐거운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된다.그러나 이런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한 글이 유익하고도 즐거울 것이라는 예상은 절반만 타당하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그리고 있는 이상사회는 모든 인간이 소유와 생산에 있어서 평등하고, 경제적으로 풍요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사회로서 여러 분야에서 많은 것을 시사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즐거울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우회적 비판을 알아차리라‘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한 즐거운 저작’이라는 표현에서 ‘즐겁다’라는 말은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역설적이다. 우선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를 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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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유토피아(Utopia)는 현실에는 없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상향을 가리킨다. 유토피아란 말은 다 소 역설적이다. ‘없는(ou) 장소(topos)’, 곧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 들은 늘 이 세상에 ‘없는 곳’을 꿈꿔 왔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나 누구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곳이 유토피아인 것이다.현실에 없는 세상유토피아라는 말은 16세기 초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라는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지만, 워낙 많이 사용하다 보니 이제는 ‘유토피아’라는 말이 ‘이상향’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요즘 유토피아라는 말과 연관된 신조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유토피아와 반대되는 의미로 쓰이는 가상 사회를 디스토피아(dystopia)라고 부른다거나 과학기술에 의한 이상향을 일컬어 테크노피아(technology utopia)라고 하는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바람을 반영하는 듯하다.산업혁명 비판을 위하여“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와 같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필요하다. 개인이든 사회든 보다 나은 상태를 바라는 꿈이 있어야 발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없는 곳’을 꿈꾼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는 어쩌면 허망한 꿈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가 터무니없는 것이 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한 가지 전제가 요구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다. 그럴 때 유토피아는 비로소 현실을 비판하는 준거로 작용하게 된다. 비유로 말하자면 유토피아는 현실 사회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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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마키아벨리(하)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

    고전(古典)을 가리켜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하는 데는 그것이 오랜 기간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유지할 뿐 아니 라 늘 새롭게 재해석되기 때문이리라. 고전에 대한 이러한 비유는 마키아벨리의 대표적 저작인《군주론》과 《로마사 논고》가 왜 고전인가를 설명하는 데 꼭 들어맞는다.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는 지난 500여 년 동안 혹독한 비판과 검증을 견디고 사람들에게 지혜와 통찰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근대정치철학을 여는 데 기여한 저작이라는 중요성 때문에 지금까지 이를 둘러싸고 수많은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두고 해결이 쉽지 않다는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라고 부른다.고전은 마르지 않는 샘마키아벨리에 대한 뜨거운 논쟁 중 하나는 그가 ‘군주론자인가 아니면 공화주의자인가’라는 문제다. 이 문제는 마키아벨리의 주저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사이에서 보이는 상반된 입장에 기인한다. 물론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두 저서 모두 현실 정치를 중시하는 마키아벨리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군주론》만을 볼 때 마키아벨리는 정치 체제로서 군주정을 옹호하고 있는 반면, 그보다 뒤에 쓴 《로마사 논고》에서 그는 공화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이 두 권의 책을 같은 사람이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둘 사이에는 의견 차이가 크다.이제 마키아벨리가 진정으로 군주정을 옹호하는 군주론자이냐 아니면 공화정을 지지하는 공화주의자이냐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석을 두고 철학자들이 제시한 몇 가지 해석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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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마키아벨리(중) 로마사 논고

    어느 작품 하나로 유명하게 된 배우가 그 후 다른 작품에서 배역을 꽤 괜찮게 소화했는데도 처음 배역에 워낙 그 배우의 이미지가 고정되는 바람에 여간해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는 정치 철학에서 마키아벨리에게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키 아벨리하면 《군주론》만을 떠올린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원래 공화주의의 대가였다는 사실도 지금까지 많이 가려져 있는 편이다.《군주론》이 마키아벨리 정치 철학의 전부인 것처럼 간주하 는 경향은 마키아벨리에 대해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다.군주론에 묻힌 로마사 논고《군주론》이 갖는 단편성을 보완하면서 마키아벨리의 정치 철학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균형을 잡아주는 그의 또 다른 저작이 바로 《로마사 논고》다.《로마사 논고》는 비록 《군주론》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고대 로마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해 논평한 것으로, 근대 공화국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저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로마사 논고》 서문에서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 역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방식과 질서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가 ‘새로운 방식과 질서’의 필요성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그가 《로마사 논고》를 통해 제시한 새로운 방식과 질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군주정의 한계와 공화정의 장점마키아벨리가 ‘새로운 방식과 질서’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군주론에서 제시한 정치체제로서 군주정이 갖고 있는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군주론은 당시 대내적으로는 소국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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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오컴 (하) 오컴의 면도날

    논리비약·불필요한 전제가 토론 방해오컴의 주장은 말하자면 “무언가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가정을 사용하여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면도날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을 잘라내 버린다는 비유로, 필연성 없는 개념을 배제하려 한 “사고 절약의 원리”라고도 불린다. 그렇다면 오컴의 면도날이 겨냥하고 있는 ‘불필요한 가정’이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간단한 유머를 통해 이를 알아보자.무인도에 표류한 물리학자, 화학자, 경제학자 앞에 통조림이 하나 파도에 떠밀려오자 논쟁이 벌어졌다. 물리학자가 돌멩이로 쳐서 따자고 주장하니까 화학자는 불을 피워 가열하는 게 좋겠다고 맞섰다. 가만히 듣고 있던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통조림 따개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날 밤 경제학자는 ‘통조림을 먹은 것으로 가정하고’ 잠이 들었다는 유머다. 이 유머는 너무 많은 것을 미리 가정하고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비현실적 자세를 꼬집고 있다. 여기서 통조림 따개가 없는 상황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 통조림 따개가 있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제학자의 자세가 어이가 없다. 이 부분이 바로 불필요한 가정이다. 아니 통조림 따개가 있다면 토론할 이유조차 없지 않은가.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스콜라 철학 접목그런데 중세 때는 이처럼 많은 것을 미리 가정하고 현상을 설명하려는 비현실적 사례들이 많았다. 당시 중세 사회에서는 스콜라 철학적 신학이론과 형이상학적인 주장들이 보편적 진리로 행세했다. 오컴은 그러한 허구적인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상식과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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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오컴의 유명론 (상)

    서양의 중세 후기는 대개 14~15세기로 잡는다. 이 시기는 철학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구축한 스콜라철학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고 이로 인해 철학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는 시기였다.이 새로운 철학의 흐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오컴이다. 사실 오컴은 그의 출생지이고 이름이 윌리엄이니까 정확히는 ‘오컴 출신 윌리엄’이라 해야 하지만, 간단히 ‘오컴’이라 불리다 보니 태어난 곳이 그대로 이름이 된 경우다.오컴의 윌리엄영국 런던 근교 오컴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가 되어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가르쳤다. 오컴은 교회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학설로 고소당하여 이단 혐의로 아비뇽 교황청에 소환되기도 했다. 이에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의 궁정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오컴은 ‘중세 철학사상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라는 칭호에 걸맞게 왕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신은 검으로 나를 보호하시오. 나는 당신을 펜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그는 자신의 철학적 논쟁에서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유명한 보편 논쟁아닌게 아니라 오컴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큰 ‘보편 논쟁’에서 유명론 측의 논객으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보편 논쟁이란 보편적 개념이 개체로부터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개체에 앞서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실재론이라고 하며, 개체만이 실재하고 보편 개념은 단순한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유명론이라고 한다. 당시 스콜라철학이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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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

    서양의 중세는 10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사상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중세 후반기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으 로 인하여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그동안 절대적 진리로 인식되고 있던 그리스도교 교리의 기 초가 흔들리게 되자 이를 철학적으로 논증하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중세 후반 기에 등장한 사상이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부철학에 의해서 체계화된 그리스도교 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철학적으로 논증하고자 하였다.위기에 처한 그리스도교와 아퀴나스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퀴나스는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권위자였던 알베르투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배웠으며, 파리 대학 신학부 교수로 취임한 뒤 그리스도교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통합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인 파리 대학에서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등장으로 인해 신앙과 이성의 갈등을 둘러싼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신을 부인한 아리스토텔레스신앙과 이성의 관계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입되기 전, 즉 교부철학 시대에는 ‘이성’보다 ‘신앙’이 절대적 우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12세기경 이슬람 세계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번역이 역수입되어 그의 철학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연의 세계는 자연 안에 있는 자신의 운동 원리에 따라 스스로 완성된 것이며 신과 같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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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아우구스티누스 (하) 고백록

    신의 은총과 관용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대개 세 부분으로 나뉜다. 1권부터 9권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체험한 회심을 정점으로 살아온 시간을 회고하며 신의 은총을 찬양한다. 10권에서는 회심의 주체인 자아와 기억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통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11권부터 13권까지는 창세기 해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혹시 자신이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 신 앞에 선 한 인간의 고백의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고백록》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회심하는 과정이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회심 장면이 결정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회심 직전 그의 자기성찰 대목이다.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왜 신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하도록 했을까? 신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 스스로를 대상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시각 없이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