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7) 조선 양반의 성립 (상)
조선왕조의 국가체제가 정비된 1460년대를 전후해 농촌사회에는 양반이란 새로운 지배 신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반은 원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관료를 말했다. 고려의 양반은 국인으로서 개경에 집결한 지배공동체의 중심을 이뤘다. 농촌에는 양반이 없었다. 고려 말기에 개경의 양반은 경기도와 충청도로 내려가 토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설치했다.그들의 압력에 밀려 옛 지배세력인 토성(土姓)은 유망(流亡)했다. 그렇지만 전라도와 경상도에선 토성이 건재했다. 남부지방의 토성은 14세기 후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맞아 군공을 세우거나 여러 경로로 하급 군직이나 잡직을 취득해 개경으로 진출했다. 중앙과 지방의 인적 교류는 왕조의 교체기에 더욱 활발했다. 역성혁명과 뒤이은 정치적 격변은 많은 양반을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다양한 연고를 좇아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까지 진출했다. 그렇게 출현한 농촌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을 가리켜 품관(品官)이라 했다.
중앙군의 해체
조선왕조는 농촌 품관에게 5∼10결의 군인전을 지급했다. 그 보답으로 품관은 1년에 3개월씩 한성으로 올라와 중앙군으로 복무했다. 갑사(甲士), 별시위(別侍衛), 친군위(親軍衛) 등이었다. 일정 기간의 복무를 마치면 관료로 출세하는 기회도 제공됐다. 이런 관계가 유지되는 한 농촌 품관이 원래 지녔던 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이어졌다.
15세기 후반 이래 다른 과전(科田)과 마찬가지로 군인전은 더 이상 지급되지 않거나 축소됐다. 세조가 정비한 농민군 중심의 진관체제(鎭管體制)에서 중앙군의 위상은 격하됐다. 품관에게 요구된 정기적인 상경(上京)의 책무도 해제됐다. 한성은 고려의 개경과 같은 지배세력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조선왕조는 한성으로의 이주와 그로부터의 퇴출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한성은 출입이 자유로운 행정도시로 변했다.
유향소의 등장
이 같은 추세와 더불어 품관 계층은 군현의 행정을 보좌하고 주민을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유향소(留鄕所)라는 자치기구를 결성했다. 1406년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는 유향소는 중앙정부의 공인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설치와 폐지를 거듭했다. 유향소의 존재가 최종 공인된 것은 1488년이다. 이즈음에 이르러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양반의 나라로 바뀌었다. 유향소는 농가에 공물을 배분하고 수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나아가 성리학의 사회윤리를 향약(鄕約)으로 제정해 농촌의 주민에게 강요했다. 유향소에는 구성원의 이름을 적은 향안(鄕案)이란 명부가 비치됐다. 향안에 이름을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향안은 품관 계층의 특권적 지위를 상징했다.
대조적으로 원래 지방세력인 토성에 유래하는 향리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하락했다. 조선왕조는 향리의 복식을 차별했으며, 그들에게 지급한 과전을 회수했다. 무엇보다 큰 타격을 준 것은 군현의 백성은 수령의 비리를 고소할 수 없다고 한 법의 제정이었다. 이를 계기로 수령과 맞서온 지방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품관과 향리는 원래 한 덩어리였으나 점차 1등과 2등 신분으로 분화했다.
양반과 상민의 분화
조선왕조의 신분제는 본시 양천제(良賤制)였다. 백성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었다. 16세 이상의 성인이 되면 모든 양인은 군인, 향리, 역리 등의 각종 역(役)을 졌다. 관료가 되면 역이 아니라 직(職)을 보유했다. 천인은 노비로서 주인에게 역을 졌다.
품관도 본시 양인으로서 중앙군의 역을 졌다. 중앙군제가 해체되자 품관은 군역의 부담에서 벗어났다. 이전에 소개한 대로 개혁적 군왕 세조는 토지와 노비를 많이 보유한 품관 계층에 군역을 많이 부과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대신 품관은 향교에 나가 과거를 준비하는 교생(校生), 업유(業儒), 한량(閑良)의 역을 졌다. 그들로부터 향시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나오고 문과에 급제한 관료가 배출됐다. 그러자 보병과 선군으로서 보통의 군역을 지는 양인과 구별되는 특권층으로서 양반 신분이 성립했다. 군역을 지는 하층 양인은 상민(常民) 또는 상한(常漢) 신분으로 천시됐다. 조선왕조의 신분제는 양천제에서 반상제(班常制)로 바뀌었다.
농촌 양반의 성립은 지방 간에 불균등한 추세로 이뤄졌다. 전국적으로 반상제로의 이행이 확연해지는 것은 대개 16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