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5) 15세기의 토지제도와 농업 (상)
1447년 봉화의 금해가 사위에게 논 1석락을 지급한 문서.
1447년 봉화의 금해가 사위에게 논 1석락을 지급한 문서.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세력은 1390년 고려 왕실과 귀족의 토지를 몰수해 재분배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로써 고려왕조를 지탱한 귀족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했으며, 뒤이어 고려왕조도 멸망했다. 개혁 대상이 된 귀족·관료의 토지는 13세기 중엽부터 지급된 수조지로 녹과전(祿科田)과 별사전(別賜田)이었다.

토지개혁 단행한 이성계

연후에 이성계 세력은 과전법(科田法)이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에 수조지를 다시 분배했다. 과전법에서 전국 토지는 신라·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국전(國田), 곧 나라의 땅으로 간주됐다. 국전은 공전과 사전의 두 범주로 구분됐다. 공전은 중앙과 지방의 정부기관이 직접 조세를 수취하는 토지다. 사전은 관료·공신·군인·사원에게 수확량의 10분의 1을 조세로 수취할 권리를 지급한 토지다. 관료 등은 1~18과로 지위가 구분돼 5~150결의 사전을 받았다.

공·사전을 경작한 농민은 전객(佃客)의 지위로 규정됐다. 나라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이라는 뜻이다. 이전의 고려왕조는 전국 농민을 전호(佃戶)의 지위로 규정했다. 조선왕조는 전객으로 바꿔 불렀는데 그 뜻은 마찬가지다. 반면에 사전을 받은 관료 등을 가리켜서는 전주(田主)라고 했다. 토지의 법률적 소유자는 어디까지나 국가이거나 그로부터 수조권을 할양받은 지배세력이었다. 그렇다고 전객 농민의 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는 전주가 전객 경지를 함부로 빼앗거나 10분의 1 이상의 조세를 수취하는 것을 금했다. 전주가 전객 경지를 빼앗으면 그 정도에 따라 20~80대의 태형에 처했다. 농민은 비록 전객으로 규정됐지만 사실상 토지의 소유자나 다를 바 없었다.

고문서에 나타난 사유재산

고려 왕실과 귀족토지를 몰수해 과전법으로 재분배…15세기 후반부터 토지를 백성의 사유재산으로 인정
농민을 전객으로 규정한 초창기의 법령은 세종조(1418~1450)에 이르러 폐기됐다. 이윽고 1424년 세종은 ‘부모의 장례를 치르거나 묵은 빚을 갚기 위해서’라는 특별한 사유에 한해 토지를 파는 것을 허락했다. 토지를 매매하기 위해서는 관에 소정의 세를 내고 허가받을 필요가 있었다. 조건부 허가제 방식이었다. 그렇게 허용된 토지 매매는 1460년대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공인됐다. 여러 제약 조건이 철폐됐으며, 자유롭게 매매한 다음 100일 이내에 관에 신고해 증명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상속도 비슷한 추이로 공인됐다. <경국대전>은 부모의 노비와 토지를 나누기 위해서는 형제들이 모여 ‘화회문기(和會文記)’라는 문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증인의 서명과 함께 관에 제출해 증명을 받도록 규정했다.

한국사에서 토지가 일반 백성의 사유재산으로서 매매·증여·상속된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다. 토지 매매는 이전에도 있었는데, 그 내실을 살피면 관료들이 보유한 수조지 사전의 매매였다. 그것도 왕의 허락을 구하는 어려운 절차를 거쳐서다. 일반 백성이 경작지를 함부로 사고팔거나 상속할 수 없었다. 고려왕조는 그것을 금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현재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상속문서는 1447년 경상도 봉화현의 금혜가 사위에게 생원시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논 1석락을 지급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매매문서는 1487년 경상도 안동부의 우령(禹令)이란 선군(船軍)이 밀린 세를 내기 위해 토지를 판 내용이다. 고문서가 전해오는 이 같은 실태도 토지가 백성의 사유재산으로 공인되는 것이 15세기의 일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부(佃夫)의 성립

그렇다고 전국의 토지가 나라 땅이라는 통치이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이념이 없이는 왕은 무엇 때문에 왕이고 백성은 무엇 때문에 백성인지 그 원리가 불분명했다. 세종조에 걸쳐 소멸한 전객 규정은 세조가 편찬한 <경국대전>에서 전부(佃夫)라는 규정으로 부활했다. 전부는 ‘백성은 나라의 땅을 경작하는 농부’라는 뜻이다. 임금의 백성으로서 나라의 땅을 경작하는 처지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더이상 나그네(客)와 같은 무(無)권리의 존재는 아니었다. 그것이 새롭게 제정된 전부 규정의 취지였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전부 규정은 조선왕조 국가체제의 기본 원리로서 준수됐다. (하편에 계속)

기억해주세요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사에서 토지가 일반 백성의 사유재산으로서 매매·증여·상속된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다. 토지 매매는 이전에도 있었는데, 그 내실을 살피면 관료들이 보유한 수조지 사전의 매매였다. 그것도 왕의 허락을 구하는 어려운 절차를 거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