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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살기 시작한 한반도 거주민…신석기 시대 연해주·일본 이주민이 한민족 뿌리 형성
폭풍을 만나 항해할 때엔 선장이 중요하다. 소위 ‘리더론’이다. 하지만 잘못된 선장을 만난 위급 상황에서는 선원들의 자질도 중요해진다. ‘모두론’이다. 지금은 모두가 자각한다. 스스로가 한국호를 운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문한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언제, 어떻게 이곳에 정착했는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본능적이고, 무의식 속에서도 던지는 물음이다. 생존전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인종·언어·문화 등이 민족 정체성 규정해우리는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또 당연한 듯이 ‘단일민족’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거주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글로벌화 흐름 속에 ‘민족’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생겨났다. 세계질서에 ‘자(自)집단주의’가 강화되면서 정반대로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을 요구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정치적 상황들과 맞물리며 때론 갈등을 증폭시키기도 한다.동아시아에서는 ‘민족’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기계적으로 사용하고, 문명이나 역사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일본이 서양어(nation)를 번역해 만든 조어인 ‘민족(民+族)’을 공통적으로 사용해왔다. 실은 중국만 해도 쑨원, 마오쩌둥 시대의 민족 그리고 후진타오 이후의 ‘중화민족론’은 사뭇 다르다. 한국도 좌우가 바라보는 내용과 적용 방식이 다르다. 일부는 ‘종족’과 ‘민족’을 동일시하며 반일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북한의 경우 체제 유지 같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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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푸틴은 왜 금 사재기에 열 올릴까
안녕하세요? 오늘 제목은 푸틴은 왜 금(金)을 사들이나입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금에 집착하는 나라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일 겁니다. 열심히 금을 사 모으죠. 러시아는 2014년부터 금 보유량이 급격히 늘고 있어요. 2014년에 171t, 2015년에 208t. 그렇게 모아서 2019년에는 2230t이 됐습니다. 세계 5위예요. 금액으로 치면 외환보유액 중에서 18.6%, 금값이 올랐으니까 20%가 넘었을 겁니다. 외환보유액을 운영하는 나라 중 가장 많은 수준이에요. 2007년에는 2.5%에 불과했는데요. 이렇게 급격히 늘어난 겁니다.미국의 경제제재 맞서 무역 결제수단 확보왜 금에 투자할까요? 미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푸틴의 러시아는 팽창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크림반도 점령, 우크라이나와 갈등 같은 사건들은 러시아의 팽창정책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죠. 그런 러시아에 대해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죠. 미국은 2013년부터 러시아를 경제 제재로 응징하고 나섰습니다. 러시아는 그게 고민이죠. 러시아에는 석유와 가스가 많이 생산됩니다. 주된 외화 수입원도 석유 및 가스 수출대금이죠.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경제 제재를 하다 보니 원유 매각 대금의 결제가 한 달씩이나 걸리는 등 달러 유통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미국 달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죠. 탈(脫)달러의 한 가지 방법으로 금을 사 모으는 겁니다.그런 면에서 중국도 비슷합니다. 중국의 금 보유량은 2014년까지 1100t 수준이었는데 2015년부터 1900t으로 늘었습니다. 참고로 세계 금 총량은 약 19만t이고, 그중 각국 중앙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보유량이 3만2000t입니다.각국 중앙은행들도 금 투자 늘려그런데 2016년 이후 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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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독일에 넘어간 배달의민족, 요기요 한 식구 됐는데…글로벌 시장서 혁신 이어갈까…독점 피해 커질까
오늘은 배달의민족 합병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배달의민족을 독일 배달기업인 DH가 인수하기로 했습니다.배달의민족. 음식배달 주선 업체죠. 스마트폰에서 앱을 내려받아 설치하고 원하는 식당과 음식을 고른 후 결제하면 됩니다.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할인쿠폰도 많이 주더라고요. 그런데 이 배달의민족이라는 신생기업을 DH라는 독일 배달기업이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DH가 87%를 인수한 겁니다. 가격을 4조원이나 주고 말입니다.세계적으로 뜨는 배달앱 비즈니스독일 기업이 한국 음식 배달업체를 4조원이나 내고 인수하다니 신기하죠? 그런데요. 이 음식배달업이 세계적으로 뜨는 비즈니스입니다. 영국의 딜리버루라는 배달업체는 영국을 넘어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까지 진출했습니다. 미국에도 그럽허브, 도어대시, 우버이츠 같은 막강한 배달업체들이 생겨나고 있죠.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가상 레스토랑, 클라우드 키친 같은 새로운 비즈니스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식당업 외식업 자체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는 겁니다.우리나라에도 외국 업체의 본격적인 진출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대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더불어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에서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죠. 그렇게 되면 독점이 형성돼 배달기사 식당 주인들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죠.잠시 업계 상황을 살펴볼까요. 1위가 배달의민족 56%, 2위 요기요 33%, 3위가 배달통 11%인데요. 요기요와 배달통 두 개 모두 DH가 경영하고 있습니다. 우버이츠 같은 다른 업체들도 있긴 한데 실적이 아주 미미합니다. 그 DH가 1위인 배달의민족까지 인수한 거예요. 시장점유율이 거의 100%가 된 거죠.국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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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굴종의 역사관' 버리고 21세기 정체성 다시 찾자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단·민족·국가가 붕괴한 뒤 사라졌다. 칭기즈칸이 토대를 마련한 ‘대몽골 세계(ULUS)’도 불과 150년 남짓 존재했을 뿐이다. 거대해 보이는 중국사도 ‘국가’와 ‘한족(漢族)’ 단위로 좁혀 보면 실은 패배와 굴종의 역사였다. 하지만 우리는 비슷한 역사공동체로서 장기간 존재해온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족이다. 항상 심각한 문제들을 극복해왔고, 특별히 그런 의지도 강했고, 능력도 남달랐다.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6·25전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참화를 겪으며 절망 속 폐허만 물려받았지만 50년이란 짧은 기간에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이뤄내는 기적을 일궜다.부숴야 할 ‘반도적 숙명론’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지난 600년간(어쩌면 1000년일 가능성도 있다) 자신을 알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기호로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자기 의지로 역사를 운영하는 기회를 터무니없이 양보했다. 중국, 일본, 서양의 여러 나라와 문화 같은 정체불명의 실체에 그랬다.그래서 나는 ‘한반도 멸망론’이란 다소 섬뜩할 수 있는 논(論)을 제기한다. ‘한반도’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식민지로 삼는 간계를 숨긴 채 지은 ‘조선반도’를 살짝 변형시킨 말이다. 조선인이 만든 반도국가는 큰 대륙에 붙어 있는 쓸개 같은 존재라는 얘기다. 대륙의 그늘 아래서 간섭을 받고 생존을 위해선 사대를 할 수밖에 없다는 ‘반도적 숙명론’이다. 당연히 역사를 자율적으로 운영한 것이 아니라는 ‘타율성이론’을 만들었다. 고인 물처럼 정체됐다는 패배의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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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17세기 후반 이앙법 등 경작 혁신으로 자립농 늘어…노비제 해체됐지만 ‘소농경제 자립’은 20세기에나
1660년대 이후 한 세기 동안 조선의 경제는 양적으로 성장 추세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농지가 개간되고 장시가 확산했다. 그에 자극을 받아 농업생산도 단위 토지에 많은 노동과 비료를 투하하는 다로다비(多勞多肥)의 집약농법으로 진전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논농사에 묘판에서 벼를 키운 다음 논으로 옮겨 심는 모내기, 곧 이앙법(移秧法)이 보급됐다. 이전에는 논에 직접 볍씨를 뿌려 벼를 키우는 직파법(直播法)이 일반적이었다.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 제초 노동을 절반으로 감소시켰다. 이에 노동력이 적은 소규모 가족농, 곧 소농(小農)의 경제적 자립성이 높아졌다. 밭농사에서는 보리와 콩을 연달아 심는 1년2작이나 조, 보리, 콩을 연달아 심는 2년3작의 집약농법이 성숙했다. 노비제의 해체 인구의 30~40%까지 차지했던 노비제가 해체 조짐을 보이는 것은 1660년대다. 그 무렵부터 조선왕조의 노비 정책이 친(親)노비제에서 반(反)노비제로 바뀌었다. 조선왕조는 청에 항복한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北伐)을 추구했는데, 그를 위해 노비제를 억제하고 양인 농민을 다수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왕조는 양반가 주변에 분포한 입역노비를 대대적으로 조사해 호적에 등록했다. 1669년 노와 양녀가 낳은 자식을 양인으로 돌리는 종량법(從良法)이 제정됐다. 노비제의 해체를 이끈 힘은 정책적이기보다 경제적인 것이었다. 집약농법의 발전에 따른 토지 소출 증가는 하층 농가의 자립성을 드높였다. 장시의 확산은 농가가 생계소득을 확보하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큰 요인은 인구 증가였다. 1680년대 들어 노비 가격이 갑자기 5분의 1 이하로 폭락했다. 이후 노비들은 별로 어렵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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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농촌 양반은 다수 노비를 이용해 농장 운영했죠…가작·작개·어우리 등 농장경영방식별로 대가 달라
농촌 양반의 경제적 기반은 대규모 노비와 토지에 있었다. 15~16세기 남부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농지 개간은 다량의 노비 노동을 동원한 양반에 의해 주도됐다. 그리 높지 않은 산과 깊지 않은 계곡에 있는 완만한 기울기의 구릉이 개간의 주요 대상이었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는 계간(溪澗)의 물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적지가 아니었다. 홍수의 위험에 노출된 천변 평야도 마찬가지였다.보나 제언을 쌓아 개간농촌 양반은 개간의 적지를 골라 제언을 쌓거나 보(洑)를 개설해 논으로 일궜다. 16세기 경상도 북부지방의 양반가에 전하는 20여 종의 상속문서에 따르면 노비 재산의 규모는 적더라도 50명을 넘는 게 보통이며 많게는 300명을 초과했다. 토지 재산의 분포는 더욱 다양한데, 적더라도 200두락(斗落)이며 최대는 2312두락에 달했다. 두락이란 1말(斗)의 종자를 파종하는 면적을 말하는데, 16세기에는 100~120평이었다(1평=3.3㎡). 노비와 토지 재산의 규모는 상속주의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상속주가 중앙정부의 관료 출신이거나 그의 아들이면 재산의 규모는 월등했다.농장은 분산됐어요양반이 노비 노동을 이용해 토지를 경작한 농사의 단위를 가리켜 농장(農庄)이라 했다. 얕은 야산으로 둘러싸인 동(洞)이나 곡(谷)이 농장의 중심을 이뤘다. 동의 가장 안쪽 높은 곳에 기와로 지붕을 인 양반의 저택이 자리잡는다. 그 아래로 좌우 야산 기슭을 타고 노비들의 집이 배치된다. 노비 집의 다수는 여전히 반지하 움집이다. 동 안에는 배추, 무 등 부식 재료와 면화, 마, 저, 칠 등 가내공업의 원료를 위한 채마밭이 조성된다. 동 밖으로는 넓게 펼쳐진 들이다.제시된 그림은 16세기 경상도 풍산현 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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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16세기 들어 양반·상민으로 ‘반상’ 신분제 확립, 상민은 군역 의무…지방은 품관·향리가 지배세력
조선왕조의 국가체제가 정비된 1460년대를 전후해 농촌사회에는 양반이란 새로운 지배 신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반은 원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관료를 말했다. 고려의 양반은 국인으로서 개경에 집결한 지배공동체의 중심을 이뤘다. 농촌에는 양반이 없었다. 고려 말기에 개경의 양반은 경기도와 충청도로 내려가 토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설치했다.그들의 압력에 밀려 옛 지배세력인 토성(土姓)은 유망(流亡)했다. 그렇지만 전라도와 경상도에선 토성이 건재했다. 남부지방의 토성은 14세기 후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맞아 군공을 세우거나 여러 경로로 하급 군직이나 잡직을 취득해 개경으로 진출했다. 중앙과 지방의 인적 교류는 왕조의 교체기에 더욱 활발했다. 역성혁명과 뒤이은 정치적 격변은 많은 양반을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다양한 연고를 좇아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까지 진출했다. 그렇게 출현한 농촌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을 가리켜 품관(品官)이라 했다. 중앙군의 해체 조선왕조는 농촌 품관에게 5∼10결의 군인전을 지급했다. 그 보답으로 품관은 1년에 3개월씩 한성으로 올라와 중앙군으로 복무했다. 갑사(甲士), 별시위(別侍衛), 친군위(親軍衛) 등이었다. 일정 기간의 복무를 마치면 관료로 출세하는 기회도 제공됐다. 이런 관계가 유지되는 한 농촌 품관이 원래 지녔던 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이어졌다. 15세기 후반 이래 다른 과전(科田)과 마찬가지로 군인전은 더 이상 지급되지 않거나 축소됐다. 세조가 정비한 농민군 중심의 진관체제(鎭管體制)에서 중앙군의 위상은 격하됐다. 품관에게 요구된 정기적인 상경(上京)의 책무도 해제됐다. 한성은 고려의 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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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민간 무역 봉쇄…개간으로 토지 늘리며 농업국가로, 여전히 밭농사 중심…최초의 농업서 펴내 생산성 높여
1452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전국 지역별 주요 생산물과 그것을 규정한 생태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최초의 지리서다. 전국 8도의 토지는 총 171만 결에 달했다. 1결은 대략 2헥타르(㏊)다. 고려 말기인 1389년에는 평안도와 함길도를 제외한 6도의 통계인데 총 79만 결이었다. 두 도를 합하면 108만 결로 추산된다. 이후 1405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 8도의 토지는 총 126만 결이었다.경지와 작목의 구성 이로부터 14세기 말과 15세기 전반에 걸쳐 토지의 개간이 무척이나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고려말에 성행한 민간의 육로와 해상을 통한 대중(對中) 무역을 일체 봉쇄했다. 그 대신 유교적 기풍의 질박한 농본주의 국가를 지향했다. 15세기 전반의 대규모 개간은 그런 문명사적 전환을 상징했다. 농업의 중심은 여전히 밭농사였다. 총 171만 결 가운데 밭이 123만여 결로 72%, 논이 47만여 결로 28%였다. 지역별 차이가 있어 경기·충청·경상·전라의 남부지방에서 논 비중은 37~46%인 반면, 황해·강원·평안·함길의 북부지방에서는 10%대에 불과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재배된 작목을 순위대로 열거하면 기장, 콩, 벼, 보리, 피였다. 이를 가리켜 오곡이라 했다. 섬유류 작물로서 지배적인 것은 뽕나무와 마였다. 1360년대 문익점(文益漸)이 중국에서 종자를 반입해 보급한 목면(木棉)의 재배는 전국 334개 군현에서 42개 군현에 불과했다. 15세기까지 의류의 주종은 견포와 마포였으며, 이를 위한 뽕나무와 마의 재배가 전국 대부분 군현에서 성하게 이뤄졌다. 뽕나무 재배가 가장 성한 지역은 황해도였다. 특히 서흥, 봉산, 장련의 3개 군은 누에치기를 생업으로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