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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신라 때 토지는 왕실의 공전과 귀족의 사전으로 나뉘었죠…개인간 토지 매매가 가능해진 것은 15세기 이후에요

    이전에 지적한 대로 삼국의 발전과 상호 충돌 과정에서 대왕(大王)의 권력이 성장했다.그에 따라 전국의 토지와 자원을 국왕 소유로 간주하는 왕토주의(王土主義)라는 정치이념이 성숙했다. 722년의 정전제 시행은 그 정치이념을 전제하고 그에 추동됐다. 종래왕토주의는 비실체적인 관념이거나 법적 픽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널리 수용됐다.대부분의 연구자는 토지가 귀족과 관료의 사적 재산임을 보이는 몇 가지 사례에 근거해 그렇게 판단했다. 그들은 그 사적 재산의 실체와 특질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조성되고 관리됐는지, 무엇을 수취했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라의 토지제도에서 귀족의 수조권(收租權)과 농민의 경작권(耕作權)이 한 토지에서 중층적으로 성립했을 가능성에 주의를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토지가 귀족의 사적 재산으로 처분된 것은 그런 구조를 전제해서였다.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토지가 상업적이고 비인격적인 재산으로 취급되는 시대가 아니었다.공전과 사전의 대립과 통합왕토주의의 실태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사건이 잘 알려져있다. 798년 원성왕이 죽었다. 신라 왕실은 왕도 주변의 곡사라는 절의 터와 주변의 구릉을 능역으로 수용하면서 그 일대를 소유한 어느 귀족에게 2000석의 벼를 지급했다. 그러면서 “비록 왕토라고 하나 공전이 아니다”고 했다. 920년께 지증대사라는 귀족 출신 고승이 이천에 있는 자신의 농장을 문경 봉암사에 기증했다. 그를 위해 지증은 요로의 지인을 통해 헌강왕의 허락을 구했는데, “비록 나의 토지라고 하나 왕토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헌강왕은 지증의 청을 들어주면서 이천에 관리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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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는 통일 후 정전제 도입해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 고려도 계승…통일신라와 고려는 '동질적인 시대'였죠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국 문명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대 계기였다. 687년 신라는 9주와 5소경을 설치했다. 그 아래에 8세기 중엽까지 117개 군을, 군 아래에는 293개 현을 설치했다. 이로써 읍락과 국의 누층적(累層的) 연맹에서 출발한 신라의 국가체제가 중앙집권의 관료제 형태로 일신했다.삼국사기에 나오는 정전제인구와 토지에 대한 집권적 지배체제도 강화됐다. 722년 신라는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는 토지제도를 시행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했다”고 간략히 전할 뿐, 정전이 무엇인지, 어떻게 지급했는지 등에 관해선 아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이하 당시 시행된 토지제도를 정전제(丁田制)라고 부른다.고려 태조도 ‘정’과 ‘정호’ 사용204년이 지난 926년은 고려와 후백제가 통일전쟁을 벌이던 어지러운 시기였다. 벽진의 성주 이총언이 고려 태조에게 귀순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해 이총언을 벽진의 장군으로 임명한 다음, 벽진의 정호(丁戶)에 더해 이웃 고을의 229개 정호를 추가로 하사했다. 9년 뒤에는 신라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했다. 태조가 경순왕을 예우하기를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에 임명하고 1000정(丁)의 토지를 지급했다. 이 두 비슷한 사건에서 언급되는 정호와 정이 722년의 정전제에 그 기원이 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호든 정이든 그것은 공통으로 일정 규모의 노동과 토지를 결합한 생산의 기초 단위이자 국가 지배의 기초 단위를 말했다.뒤이은 고려시대에도 정호의 실체는 마찬가지였다. 그 점에서 8~9세기 통일신라와 10~14세기 고려는 동질의 역사 시대다. 필자는 정호가 사회 구성의 기초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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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을 생산·수출하고 어물 등과 거래했죠…토지·자원은 왕의 소유…왕토주의 생겨나

    4개 촌이 생산한 비단은 연간 200필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촌민들은 그 상당 부분을 신라에 공납한 다음 나머지를 소금, 어물, 토기, 철기를 들고 촌을 찾아오는 상인에게 판매했다. 비단은 신라의 대외무역에서 인기 있는 수출품이었다.신라의 대외 무역필자는 4개 촌의 무성한 뽕나무 숲에서 그런 국제적 물류를 상상한다. 그 생태환경은 인구 과잉으로 산업이 곡작(穀作) 일변으로 찌그러진 15세기 이후와는 크게 구분되는 초기 농경사회의 그것이었다.7세기 신라는 백성을 어떤 제도적 용어로 불렀을까. 중국에서는 호(戶)라고 했다. 신라도 그랬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장적 어디에도 호라는 글자는 단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장적에서 확인되는 농가의 보통명사는 연(烟)이다. 중국의 호에 해당하는 것을 두고서는 공연이라 했다. 공연은 장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장적의 역사적 개성을 다른 무엇보다 뚜렷하게 상징하는 말이다. 공(孔)은 ‘크다’ 또는 ‘모으다’는 뜻이다. 곧 여러 개의 연이 모여 크게 된 것이 공연이었다. 어느 공연은 일부 연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해체되고 말았는데, 다른 어느 공연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공연이란 몇 개의 연이 분리의 가능성을 전제한 위에 무언가의 계기나 필요에 따라 결속한 상태, 곧 세대복합체를 말했다. 그 무언가의 계기가 생산과 공납을 위한 공동 노동임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그대로다.중국은 호, 장적에는 연공연에는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 중상(中上), 중중(中中), 중하(中下), 하상(下上), 하중(下中), 하하(下下)의 9개 등급이 있었다. 대개 인적 구성의 크기에 따라 일정한 등차로 구분한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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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일본에서 귀중한 신라 문서가 공개됐죠…4개촌의 인구 변동 등 신라 후기 시대상 보여줘

    어느 해인가 신라 왕은 일본 왕에게 화엄경론 65권을 책보에 싸서 선물했다. 책보는 포(布)의 겉과 안에 종이를 붙여 만들었다. 1933년 일본 정창원(正倉院)은 이 책보를 수리하기 위해 포와 종이를 분리했다. 그때 천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신라의 문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4개 촌의 인구, 가축, 전답, 나무 등을 조사한 행정문서인 ‘신라촌장적(新羅村帳籍)’이었다.일본에 전해진 695년 신라 문서4개 촌은 웅천주 관하의 3개 촌과 서원경 관하의 1개 촌이었다. 오늘날의 위치는 청주시 초정리, 연기군 남면, 전의군 일대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신라촌장적은 그 내용의 풍부함이나 독특함으로 인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중대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한국 고대사 연구는 이 문서의 올바른 이해를 목표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장적의 연도는 간지로 을미년(乙未年)이다. 이를 두고 종래 815년이란 해석이 유력했는데, 윤선태 교수가 695년으로 바로잡았다. 윤 교수는 화엄경론이 정창원에 입고된 시기를 추적해 그 같은 결론을 얻었다. 필자도 695년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전에 소개한 삼국의 지배체제가 장적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구려와 신라는 개별 연(烟)이 다수 결합한 세대복합체 호(戶)를 몇 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그에 기초해 취락과 촌에 공동 부담의 과표를 부여했다. 바로 그 세대복합체 호와 공동부담의 과표가 장적에 공연(孔烟)과 계연(計烟)으로 드러나 있다. 다음 회(13회:편집자주)에서 소개하겠지만 722년 신라는 정전제(丁田制)라는 토지제도를 시행했다. 이후 세대복합체의 공식 명칭은 정호(丁戶)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장적에 나타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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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는 개별공동체가 못하는 공공기능 수행하죠…삼국은 흉년때는 비축한 곡식 풀어 백성 구제했어요

    국가는 지배세력의 수탈을 위한 도구만이 아니다. 국가는 개별 공동체로서는 불가능한 공공 기능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창출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가는 산적 떼와 다를 바 없으며 결코 영속할 수 없다. 삼국은 논밭을 개간하고, 방조제를 쌓고, 저수지를 파고, 철제 농구를 보급하고, 곡식을 비축해 흉년에 대비했다.벽골제는 방조제《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 후 33년 백제의 다루왕(多婁王)은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하게 했다. 그대로 믿기는 곤란한 이른 시기에 관한 기록이지만,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공공 기능으로서 권농(勸農)을 중시한 삼국인의 관념을 대변하고 있다.331년 김제에 벽골제가 세워졌다. 《삼국사기》는 신라 흘해왕(訖解王)이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당시 김제 일원은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필자는 마한 55국의 하나인 벽비리국이 아닐까 짐작한다. 김제 일원은 표고가 해수면과 거의 동일한, 한반도에서 가장 낮은 연안 평탄지이다. 벽골제가 큰 저수지라는 통념은 후대에 잘못 형성된 것이다. 벽골제는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방조제로 세워졌다. 502년 신라의 지증왕(智證王)은 처음으로 쟁기갈이를 보급했다. 531년 신라의 법흥왕(法興王)은 전국적으로 제방을 수리하라는 영을 내렸다. 536년에는 경북 영천에 청천제라는 저수지를 축조한 다음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따르면 축조에 동원된 사람이 7000명에 달했다.고구려는 진대법 실시삼국은 큰 흉년이 들면 창고에 비축한 곡식을 풀어 기민을 구제했다. 194년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사냥을 가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흉년에 품을 팔 데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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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의 중심은 밭농사…쌀은 지배계층의 주식이었죠…성인 남성 10명으로 된 호(戶)를 기준으로 세금 물렸죠

    4~7세기의 논 유적은 지금까지 울산, 창원, 진주, 대구, 부여, 화성 등 도합 10여 곳에서 발굴됐다. 한 곳의 예외가 있지만, 논 한 구획의 면적은 대개 99㎡(30평) 안팎으로 작은 규모다. 논의 위치는 구릉의 완만한 하단부이며, 관개는 구릉을 흘러내리는 소량의 물을 이용하는 자연 방식이었다. 논과 더불어 수로의 유적도 발굴됐는데, 취수(取水)시설이 없어 배수로로 보인다.인공관개는 없었다삼국시대의 논농사는 아직 저수지나 보를 통한 인공관개와는 무관했다. 자연관개이기 때문에 논 면적은 클 수 없었고, 혼자서도 조성·관리할 수 있는 정도였다. 논갈이 도구는 삽이나 괭이 같은 수경구(手耕具)였으며, 소를 이용한 쟁기갈이는 아직 보급되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논은 쟁기를 들일 만큼 넓지 않았다.밭 유적의 수는 논보다 많다. 관개의 제약이 크지 않기 때문에 단위 구획이 논보다 넓었다. 앞서 미사리의 밭 유적을 소개했다. 발굴된 면적만 해도 9900㎡(3000평)인데, 원래는 그보다 훨씬 컸다고 짐작된다. 이랑과 고랑의 폭이 각각 1m를 넘어 토지 이용은 매우 조방(粗放)적이었다. 유적에서 쟁기갈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밭갈이는 호미 등의 수경구를 이용해 흙을 긁어내는 방식이었으며, 노동의 주체는 10개 연(烟)이 결합한 세대복합체의 집단노동이었다.하층민 주식은 조와 수수인골에 대한 안정동위원소 분석은 삼국시대의 주요 작물이 벼, 맥류, 두류 등 C3계 식료였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런데 논 유적의 상태로부터 농업의 중심이 밭농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논농사 수준을 과대평가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인골 분석은 여성이 남성보다 C3계 식료를 더 많이 섭취했음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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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지방에 중앙관료 파견…신라는 150년 늦은 6세기 이후 국가단계로 진입

    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한성(지금의 서울)을 함락하고 백제왕을 참수했다. 멸망의 위기에 처한 백제는 웅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백제는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한 동성왕(東城王)에 의해 재건됐다. 백제는 남조의 제(齊)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으며 양(梁)으로부터 불교·미술·서예·건축 방면의 선진 문물을 광범하게 수용했다.5세기 후반 고령, 합천 등 영남 서남부를 무대로 대가야(大伽倻)가 흥기했다. 그 새로운 연맹체는 호남 동부의 섬진강 유역으로, 나아가 호남 서부의 영산강 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했다.5세기 후반과 6세기 전반에 걸쳐 영산강 유역에서는 왜의 고유한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축조됐다. 전방후원분은 이 지역과 왜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전방후원분 유적은 모두 14기다. 6세기 중반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됐으며, 그와 더불어 전방후원분의 축조도 중단됐다.로마의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중국인의 관찰에 의하면 2~3세기 한국인은 금과 은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금은이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것은 4세기 이후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서다. 4세기 중엽 신라는 조령과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개척했다. 4세기 말에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낙동강 하류역으로 진출했다. 이후 신라가 벌인 대외교역 범위와 내용에는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바가 있었다. 4~6세기 신라의 거대 왕릉에서 발굴된 화려한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건너온 로마 제품이거나 대륙을 건너온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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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과 함께 묻는 순장은 북방계 청동기문화, 고구려·신라·백제만 국가로 성장…가야는 좌절

    2004~2008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마구(馬具)와 무구(武具)를 비롯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가운데 제15호 고분에서는 순장(殉葬)을 당한 4명의 유골이 나왔다. 2명은 남자, 2명은 여자였다. 순장의 추정 연도는 420~560년이다.창녕 고분과 순장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그중 유골 상태가 온전한 인물의 생시를 복원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나이는 16세, 키는 154㎝, 출산을 경험한 적이 없는 소녀였다. 평평한 얼굴, 큰 광대뼈, 찢어진 눈매 등에서 현대 한국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금동 귀고리를 하고 있어서 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소녀의 이 몇 개는 충치인데,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종아리뼈와 정강이뼈에는 충격이 반복해서 가해진 흔적이 있다. 이로부터 소녀는 주인 앞에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었던 시종이었다고 짐작된다.4명의 순장자가 무엇을 섭취했는지는 인골에서 추출된 콜라겐에 대한 탄소 및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탄소 열량으로 쌀, 맥류, 두류, 견과류 등 C3계 식료를 주로 섭취했다. 제1회에서 지적한 대로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기장, 조, 피, 수수 등 C4계가 주요 식료였다. 이로부터 철기 보급과 함께 농사의 중심이 쌀, 맥류, 두류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단백질원과 관련해 2명의 남자는 주로 동물 단백질을, 2명의 여자는 주로 식물 단백질을 섭취했다. 이 같은 현상은 다른 유적에서 나온 인골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로부터 5~6세기까지도 남자는 수렵에 종사하고 농사는 주로 여자가 담당한 초기 농경사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지나친 억측일까.신라는 502년 순장 금지순장은 북방계 청동기 문화에 그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