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5) 고구려의 뛰어난 조선·항해술
장수왕의 해양 진출광개토대왕으로부터 광대해진 영토를 물려받은 장수왕은 꾸준히 요서를 공략하는 한편 북연과 북위, 송나라가 벌이는 중국의 질서재편전에 참여해 국가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427년에는 400여 년 동안 북방 진출의 거점이었던 국내성을 떠나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1866년에도 미국 기선인 제너럴셔먼 호가 입항한 서해와 연결된 항구도시인 평양은 남진정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해양 진출과 해양 외교를 유리하게 추진하는 교두보였다.장수왕은 475년 백제 수도인 한성을 점령한 뒤 남진을 계속했다. 서쪽은 금강 이북과 대전 일부 지역을, 동쪽은 경북의 순흥 안동 청송을 지나 영해까지 영토로 삼았다. 481년에는 포항 외곽까지 공격해 육지 영토를 넓혔다. 동해 중부 이북, 서해 중부 이북, 요동만에서 해양력을 강화했고,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경기만을 안정적인 내해로 삼아 평양, 강화, 남양(화성시) 등을 항구로 삼았다. 중국 남북조와 치열한 해상권 다툼 서해를 중심으로 한 동아지중해 각국의 해상권 다툼도 치열했다. 북위는 480년 고구려가 남제에 파견한 사신선을 나포했으며, 6세기 초에는 남제가 고구려 안장왕에게 파견한 사신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서해 해상을 봉쇄한 적도 있었다. <위서> 백제전에는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가 펴는 일종의 해상봉쇄에 위기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무역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황금, 은, 모피, 무기, 말, 인삼 등 수출품의 질도 뛰어났다. 제주도(涉羅)에서 ‘가(珂)’라는 보물을 구해 북위와 무역하기도 했다.
4세기부터는 일본 열도와도 교류했다. 지금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시마네현 지역의 이즈모 등에는 고구려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북한 사학자 김석형의 설). <일본서기>에는 장수왕 75년에 왜인들이 고구려와 내통한 내용을 포함해 모두 12번에 걸쳐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에 고구려는 중국 지역, 북방 지역, 일본 열도 등과 전투, 외교, 무역을 병행하는 해륙국가로 변신했다. 북방의 유연, 중국의 남북조와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이뤘다(윤명철 <고구려 해양사연구>). 불가사의한 고구려의 해양경영 능력그렇다면 고구려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고구려는 남북조 모두에 사신을 자주 파견했는데, 남조와 교섭하는 빈도가 항해조건이 훨씬 나은 백제보다도 많았다. 장수왕은 송나라가 북위와 충돌할 때인 439년, 다른 화물과 함께 군수물자인 말 800필을 대선단에 실어 보냈다. 북위의 해상봉쇄와 공격을 피해 서해를 종단하거나, 서해 북부 해안을 근해 항해하다가 양쯔강을 거슬러 지금의 난징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무려 1200㎞ 이상 되는 거리다. 12세기경 바이킹조차 자신들의 롱십(longship)에 군사 44명과 군마 두 필만 적재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며통일과 강한 나라를 결코 원하지 않는 4강 대국에 포위된 데다 남북한 간의 적대감, 한국 내부의 분열, 멀어져가는 국제감각, 약화되는 군사력, 불신받는 정치인과 관리, 군인, 학자들. 우리의 이 같은 현실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숙고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고구려는 우리에게 어떤 정책모델을 제시할 수 있으며,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은 어떤 지도자상을 반추해보게 할까?
산업을 발전시키고 동아시아 물류 허브가 된 나라. 백성의 신뢰를 받는 지도자들이 국제관계의 중핵에서 성숙하고 자의식에 충실한 문화를 일군 나라. 나는 이 같은 고구려의 부활(refoundation)을 꿈꾸며 ‘동아지중해 중핵조정 역할’과 통일을 뛰어넘은 ‘해륙국가의 완성’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 기억해주세요장수왕은 꾸준히 요서를 공략하는 한편 북연과 북위, 송나라가 벌이는 중국의 질서재편전에 참여해 국가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고구려는 중국 지역, 북방 지역, 일본 열도 등과 전투, 외교, 무역을 병행하는 해륙국가로 변신했다. 북방의 유연, 중국의 남북조와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