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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남·북 중국, 유연, 고구려 등 세력균형 이룬 동아시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청나라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조선의 개항과 멸망, 식민지화를 초래했다. 20세기 중반 미국과 소련이 치른 그레이트 게임은 한민족의 분단과 비극적인 6·25전쟁을 몰고왔다. 최근엔 미국과 중국 간에 ‘새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병(또는 거란병) 1만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했다. 《수서(隋書)》의 또 다른 기사는 이 공격에서 고구려가 해양방어시설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곧 30만의 수륙군으로 반격했으나 육군은 역병이 창궐해 요하전선을 넘지 못했다. 한편 래호아가 지휘하는 6000명의 산동수군은 평양성을 향해 출항했지만 폭풍우를 만나 배들이 표몰됐고,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고 한다(《수서》). 하지만 기상조건들을 분석하면 장산군도 등에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에 막히고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70년 전쟁의 신호탄 ‘고·수전쟁’이렇게 ‘고·수(高·隋)전쟁’의 신호탄이 올랐고, ‘고·당(高·唐)전쟁’을 거쳐 신라가 참여한 이른바 ‘삼국통일전쟁’까지 지속됐다. 전쟁의 목적과 진행과정, 결과 등을 보면 몇 단계로 구성된 ‘70년 전쟁’이었다. 한륙도(한반도와 만주 포함)·중국·일본열도·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가 포함된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레이트 게임이었다.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현대에도 재현하기 어려운 0.3㎜ 잔무늬 청동거울…원조선 후기에는 갑옷·쇠뇌 등 철기문화 꽃피워

    원조선의 청동거울은 기원전 5~4세기에 제작됐는데, 고대사회에서 거울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신물(神物)이며 정치적으로도 상징성이 컸다. 무늬선의 곱고 거친 정도에 따라서 ‘잔무늬 거울(다뉴세문경)’과 ‘거친무늬 거울(다뉴조문경)’로 나눈다. 잔무늬 거울은 실낱처럼 가는 수천 개의 선, 하늘을 상징하는 동심원, 복잡하고 정교한 기하학 무늬와 톱날 무늬로 구성됐다. 신비함과 합리성, 현란한 미의식과 기능성이 조화를 이룬 결정체였다. 반면 거친무늬 거울은 번개무늬 별무늬 방사상무늬 동심원 등이 조합돼 무늬선이 거칠며 외모 또한 투박했다. 이것은 기술력의 퇴보가 아니라 문화의 성격이 변모하고, 실용성이 높아진 시대 상황 때문이다.청동거울 대량 제작이 원조선의 전반적인 산업화에 기여한 정도는 측량할 수 없지만, 금속공학과 제련술 등을 크게 발전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청동 방울들과 장식품 등 다양한 금속제품이 제작됐고, 관련 산업이 발달했다(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한참 앞선 합금·주조 기술그렇다면 원조선인들의 기술력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제작 재료인 동 주석 아연 운석 등 지하자원을 채굴하는 광업도 중요하지만, 제작하는 청동 합금기술과 청동 주조기술은 더욱 중요하다.원조선의 청동 제품들은 구리 주석 연(鉛) 아연 등을 섞은 ‘연아연청동’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청동거울을 만들 때는 무기 제작 때보다 구리에다 주석을 많이 넣고, 아연과 연의 비율을 올렸다. 그래야만 주조성과 반사효과를 높이고, 색깔도 변화시켜 장식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에 만들어진 세형 동검 등은 주석의 비율이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제 부흥운동서 패한 유민들 대마도에 방어기지 구축

    한반도에서 대마도에 가장 먼저 진출한 세력은 김해에 기반을 둔 구야한국 등 가야연맹들이다. 17세기에 편찬된 《대주신사지(對州神社志)》에는 옛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시다루의 해변에 큰 항아리가 흘러 왔는데,… ‘나는 가라로부터 왔으니 가라국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했다. 항아리를 뒷산에 안치했더니, 만조 때는 물이 찼고, 간조 때는 물이 빠졌다….” 이는 가야인들의 항해 과정과 연관이 깊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만의 안쪽인 이 마을에서는 가야계인 스에키 토기의 파편이 많이 발견됐다. 신라 건국 초기부터 대마도 왜인의 침공 잦아대마도는 신라와도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건국한 초기부터 침입한 왜인들의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주로 남풍이 부는 4~5월경에 침입한 이들 가운데 대마도의 왜인들이 많았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를 출항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대마도에는 신공황후와 연관된 전설과 물건들을 숭배하는 신사(神社)들이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408년 왜병들이 대마도에 군대와 무기, 식량 등 군수물자를 쌓아놓고 침공하려 하자 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다.나는 1982년 겨울 밤, 사고마을의 덴신다쿠쓰다마 신사에서 벌어지는 ‘오이리마세’라는 의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천도(天道)신앙’이라는 고대 신앙을 남긴 이곳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죄인이 신당에 들어가면 감히 잡지 못한다(罪人 走入神堂 卽亦不敢追捕)’라고 기록했다. 마한에 있던 소도신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윤명철 《일본기행》, 1989년) 애증의 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기원전 3세기 한민족 이주로 '한민족 체제'였던 대마국

    고대에 우리 민족사의 영역에는 복잡한 성격의 해양소국이 있었다. 대마국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대마도는 누구의 영토였는가?” “누구의 역사였는가?” 한·일 관계는 시작할 때부터 복잡했고, 역사가 진행될수록 숙명적으로 변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상대방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短刀)’(K. W. J. Mekel 주장), 연결하는 ‘다리’라는 상반된 역할을 한 곳이 대마도다. 부산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대마도대마도는 남북이 72㎞, 동서가 16㎞, 면적이 714㎢인 비스듬히 누운 고구마꼴이다. 제주도의 3분의 2, 거제도의 2배, 울릉도의 10배에 달하는 큰 섬이다. 부산에서 약 53㎞, 거제도에서는 80여㎞ 거리로 날씨가 맑으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에서 이키섬까지 약 53㎞, 다시 규슈까지는 20여㎞다. 따라서 대마도를 징검다리처럼 이용하면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다. 1노트 내외로 북동진하는 대한난류(쓰시마해류)와 낙조(썰물)의 영향으로 유속은 3노트 이상이 된다. 거기다가 계절풍까지 활용한다면 상호 간 교류는 어렵지 않다. 나는 1983년 8월 ‘해모수’라는 뗏목을 만들어 거제도를 출항했는데, 대마도 북쪽 사고(佐護)까지 불과 4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광의의 ‘한민족 체제’에 속해대마도의 고시다카(越高) 유적지에서는 약 6500년 전의 융기문 토기들이 발견됐다. 가토(加藤) 해상유적지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됐다. 한편 부산의 동삼동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죠오몽 토기와 흑요석제 도구들이 나왔고, 근래 여수의 안도 패총에선 규슈산 흑요석이 발견됐다. 이렇게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대마도를 중간기지로 삼아 수천 년 동안 자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강 이남 소국 연합체 '삼한'에서 갈라져 나온 가야…남동해안에 무역선·사신선 머문 여러 국제항 만들어

    모든 정치력이 한데 모인 중앙집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지역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권력을 분산한 지방분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청동기 이후 인류가 항상 고민하던 문제였고, 지금도 한국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된다.가야는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존속했다. 전기에는 백제, 신라와 자웅을 겨뤘다. 가장 먼저 일본 열도로 진출했고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였다. 하지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이루는 데 실패해 일찍 멸망했다.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四國)시대’라는 용어를 만들지 못한 가야의 성공과 실패는 해양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아유타국 허황옥 설화가야를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하다. 원래 이름은 ‘구야’ ‘가라(加羅)’였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가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에는 ‘가야’ ‘가라’ ‘게야’ 등의 지명이 있으며 보통 ‘韓’으로 표기된다. 후에는 1870년대에 일본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한 ‘정한론’처럼 한국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됐다. 건국과 발전의 과정이 복잡하고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은 데서 이 같은 다양성이 나온다.《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건국설화가 두 개 실려 있다. 하나는 9간(干, 칸)이 구지봉에서 여섯 개의 알이 담긴 금합을 받았는데, 하나는 수로왕이 됐고, 나머지는 5가야의 주인이 됐다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신비하고 실체를 알기 힘든 허황옥(許黃玉) 이야기이다. 48년 7월 27일,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망산도(지금의 창원 인근)에 닿았다. 배에는 돌탑과 20여 명의 종자, 16세의 여인과 오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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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변 수륙 물류 중심지에서 일어난 백제…잇따른 정복 전쟁으로 서해 해상권 확보 나서

    백제는 활발한 해양활동을 바탕으로 국가경영에 성공한 나라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멸망할 당시 인구만 해도 76만 호(약 380만 명)로 삼국 가운데 가장 많았다. 해양 활동만큼이나 해외 진출도 많았다. 663년 백강(백촌강)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 패배한 뒤 백제인 다수가 일본열도로 탈출하면서 자랑스러운 역사가 안타깝게도 많이 잊혀졌다. 고구려에서 나와 새로운 국가건설기원전 20년쯤의 어느 날,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한 홀본부여의 소서노, 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군사와 백성들은 압록강 하류를 출항했다. 새로운 국가건설을 꿈꾼 그들은 원조선인들의 이주와 무역로였던 연근해항로를 이용해 서해안을 내려오다 경기만 한강 하류에 상륙했다. 경기만은 넓고 작은 만들이 발달한 데다 동아지중해의 여러 항로와 연결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다. 또한 이 해역으로 흘러드는 한강은 전장 512㎞에 달하는 하계망을 이용해 내륙을 통합시키는 데 유리하며, 하류에 충적평야가 발달했다. 백제의 중추가 된 위례성<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溫祚)는 위례성(지금의 서울 강동구, 송파구 일대)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十濟·백제의 초기 국가명)를 세웠다. 서울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넓은 수계망을 이용한 수륙교통과 해양교통이 교차하면서 온갖 물품이 모여드는 물류의 허브였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1930년대까지도 서빙고까지 영향을 끼치는 밀물을 이용해 마포, 용산까지 들어왔다. 이른바 ‘하항도시’와 ‘해항도시’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닌 ‘강해(江海)도시’였다.형인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인천 문학산성 일대)로 이동해 정착했다. 인천 지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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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남북조와 '동아시아 4강' 형성한 고구려…전투·외교·무역 병행하며 국가 위상 높였다

     장수왕의 해양 진출광개토대왕으로부터 광대해진 영토를 물려받은 장수왕은 꾸준히 요서를 공략하는 한편 북연과 북위, 송나라가 벌이는 중국의 질서재편전에 참여해 국가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427년에는 400여 년 동안 북방 진출의 거점이었던 국내성을 떠나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1866년에도 미국 기선인 제너럴셔먼 호가 입항한 서해와 연결된 항구도시인 평양은 남진정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해양 진출과 해양 외교를 유리하게 추진하는 교두보였다.장수왕은 475년 백제 수도인 한성을 점령한 뒤 남진을 계속했다. 서쪽은 금강 이북과 대전 일부 지역을, 동쪽은 경북의 순흥 안동 청송을 지나 영해까지 영토로 삼았다. 481년에는 포항 외곽까지 공격해 육지 영토를 넓혔다. 동해 중부 이북, 서해 중부 이북, 요동만에서 해양력을 강화했고,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경기만을 안정적인 내해로 삼아 평양, 강화, 남양(화성시) 등을 항구로 삼았다. 중국 남북조와 치열한 해상권 다툼서해를 중심으로 한 동아지중해 각국의 해상권 다툼도 치열했다. 북위는 480년 고구려가 남제에 파견한 사신선을 나포했으며, 6세기 초에는 남제가 고구려 안장왕에게 파견한 사신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서해 해상을 봉쇄한 적도 있었다. <위서> 백제전에는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가 펴는 일종의 해상봉쇄에 위기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무역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황금, 은, 모피, 무기, 말, 인삼 등 수출품의 질도 뛰어났다. 제주도(涉羅)에서 ‘가(珂)’라는 보물을 구해 북위와 무역하기도 했다.4세기부터는 일본 열도와도 교류했다. 지금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기마군단 못지 않은 정예 수군 보유한 고구려…왕성한 정복·외교활동 펼친 '해륙국가'였다

    고구려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약소국의 설움 속에서 우리가 꿈꾸고 닮고 싶었던 나라의 이미지다.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한 ‘기마민족국가설’이 불을 지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는 뛰어난 무장력을 갖춘 기마군단을 운용하는 동시에 정예 수군과 왕성한 해양활동으로 이름난 ‘해륙국가’였다.한반도에선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18개의 강을 이용해 교통과 물류가 발전해왔다. 만주는 서북쪽 일부 초원과 건조 지대를 빼놓고는 송화강, 요하, 흑룡강, 모란강을 비롯한 60여 개의 강에서 큰 배들이 다녔다. 비록 사료에는 없지만 자연환경, 역사적 상황,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을 보면 고구려 시대에도 강상(江上) 수군이 활동했다. 훗날 조선시대에 와서도 효종이 청나라에 파견한 병사들은 러시아군과 송화강에서 수상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1930년대 초 일본군은 흑룡강에서 강방함대(일본 관동군의 함대)를 운영했다.3세기 오나라와 해상무역고구려는 원조선의 능력을 계승한 데다 전기부터 한반도의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요동만과 서해 북부, 동해 북부에서 활발한 해양활동을 벌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장거리 항해를 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한 사례는 3세기 전반에 처음 나타난다. <삼국지>의 주역인 조조, 유비가 차례로 죽고 손권이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233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구려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오나라에 값비싼 담비가죽 1000장, 할계피(꿩가죽), 전략물자인 각궁(고구려의 활) 등을 보냈으며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