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16) 개선사 석등기의 비밀 (하)
논농사만이 아니었다. 밭농사에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쟁기의 보급이 그 원동력이었다. 삼국시대까지 쟁기의 보급은 제한적이었다. 쟁기가 출토된 유적의 수가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고구려의 영역에 한정되고 있다. 통일신라기에 이르면 쟁기 유적은 그 수가 일층 많아지고 그 분포도 전국적으로 광역화한다. 쟁기의 보급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쟁기의 보습에 볏이 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개 9세기부터다. 볏은 쟁기로 가는 흙을 한 방향으로 몰아 왕복 쟁기질로 높낮이가 뚜렷한 이랑과 고랑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콩·밀의 건조작물과 보리의 습윤작물이 같은 포장에서 재배될 수 있는 농사의 큰 진전을 보게 됐다.
앞서 소개한 대로 전쟁이 끝나자 문무대왕은 무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쟁기가 대량으로 제작돼 널리 보급됐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무기를 녹였다고 했으니 쟁기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유였다. 쟁기는 신라의 지방행정 체제를 통해 농촌 구석구석으로 보급되고 관리됐다. 쟁기 유물이 대개 산성(山城)이나 현성(縣城)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사실로부터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신라 국왕은 전국의 토지만이 아니라 주요 철제 농구를 지배하고 통제했다. 그와 더불어 국왕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왕토주의가 점점 강화됐음이 8~9세기의 역사적 추세였다.
인구의 증가
정보가 빈약한 시대를 두고 지나치게 상상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괴이한 환상이 널리 자리를 잡는다. 적절히 통제된 상상은 권장돼야 한다. 이전에 지적한 대로 3세기께 한반도 인구는 110만명 내외였다. 그 정도의 인구를 상상해야 당시 한반도의 생태에 대한 상상이 추가로 발동되는 법이다. 이후 7세기까지 인구는 통일 전쟁에 따른 혼란과 피해로 증가할 수 없었다. 이후 인구에 관한 정보를 듣는 것은 중국 《송사(宋史)》로부터인데, 고려 인구가 210만 명이라 했다. 이로부터 역사가들은 몽골이 침입하기 이전인 12세기의 인구를 250만~3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근대에서 인구는 좀처럼 증가하지 않는다. 총인구가 11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증가하기 위해서는 식료 공급에서 무언가 큰 진전이 필수적이다. 나는 그 시기가 8~9세기의 통일신라기가 아닐까 상상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1인당 조세량의 변화에서도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47배나 증가한 조세 5회 연재(편집자주: 생글생글에선 10~11회)에서 지적한 대로 7세기 초 고구려는 개별 세대로부터 벼 1두의 조세를 수취했다. 그런 기준으로 세대복합체와 취락에 조세를 부과한 것이다. 국가 수취의 중심은 초기 농경사회의 복합적 생태를 반영해 비단과 같은 공물에 두어져 있었다. 이후 조세의 수취 규식이 자세하게 전하는 것은 992년 고려시대 일이다. 그에 의하면 고려 농민은 1결의 논에 벼 47두의 조세를 부담했다. 당시 논 1결은 개별 세대가 보유한 경지에 해당했다. 다시 말해 7세기 초에서 10세기 말까지 개별 세대의 조세 부담은 무려 47배나 증가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1인당 경지면적이, 곧 노동생산성이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소개한 대로 9세기 말 개선사가 구입한 논의 단위 필지는 1400평으로 삼국시대의 그것(30평)보다 47배나 컸다. 나는 출처가 상이한 수치 정보가 이렇게나 정확히 일치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2세기까지 인구를 3배나 증식시킨 농업혁명은 아무래도 석등이 세워지기 전인 통일신라기의 일이었다. 석등기는 경문왕의 아내이자 진성여왕의 어머니를 문의 황후(文懿皇后)라 칭하였다. 황후라는 존호! 거기엔 당(唐)을 이기고 농업혁명을 통해 승평의 시대를 연 신라의 드높은 자존심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 전쟁의 희생과 뒤이은 영광이 없었다면 후대의 한국사는 존속하지 않았을 터다.
■기억해주세요
7세기 초에서 10세기 말까지 개별 세대의 조세 부담은 무려 47배나 증가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1인당 경지면적이, 곧 노동생산성이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