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14) 정전제의 시행 (하)
국보315호 지증대사적조탑비, 신라 고승 지증대사의 토지기증 사건을 전한다.
국보315호 지증대사적조탑비, 신라 고승 지증대사의 토지기증 사건을 전한다.
이전에 지적한 대로 삼국의 발전과 상호 충돌 과정에서 대왕(大王)의 권력이 성장했다.
그에 따라 전국의 토지와 자원을 국왕 소유로 간주하는 왕토주의(王土主義)라는 정치
이념이 성숙했다. 722년의 정전제 시행은 그 정치이념을 전제하고 그에 추동됐다. 종래
왕토주의는 비실체적인 관념이거나 법적 픽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널리 수용됐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토지가 귀족과 관료의 사적 재산임을 보이는 몇 가지 사례에 근거해 그렇게 판단했다. 그들은 그 사적 재산의 실체와 특질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조성되고 관리됐는지, 무엇을 수취했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라의 토지제도에서 귀족의 수조권(收租權)과 농민의 경작권(耕作權)이 한 토지에서 중층적으로 성립했을 가능성에 주의를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토지가 귀족의 사적 재산으로 처분된 것은 그런 구조를 전제해서였다.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토지가 상업적이고 비인격적인 재산으로 취급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공전과 사전의 대립과 통합

왕토주의의 실태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사건이 잘 알려져있다. 798년 원성왕이 죽었다. 신라 왕실은 왕도 주변의 곡사라는 절의 터와 주변의 구릉을 능역으로 수용하면서 그 일대를 소유한 어느 귀족에게 2000석의 벼를 지급했다. 그러면서 “비록 왕토라고 하나 공전이 아니다”고 했다. 920년께 지증대사라는 귀족 출신 고승이 이천에 있는 자신의 농장을 문경 봉암사에 기증했다. 그를 위해 지증은 요로의 지인을 통해 헌강왕의 허락을 구했는데, “비록 나의 토지라고 하나 왕토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헌강왕은 지증의 청을 들어주면서 이천에 관리를 보내 그의 농장을 측량했다.

두 사건에서 이야기하는 주체는 다르지만, 그 취지는 사실상 동일하다. 신라의 국토는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뉘었다. 두 범주는 갈등하고 대립했다. 그렇지만 보다 상위의 왕토라는 범주로 통합됐다. 공전은 왕실에 속하는, 왕실이 수취하는 토지다. 사전은 귀족에 속하는, 귀족이 수취하는 토지다. 사전의 기원은 757년에 문무 관료에게 차등 지급한 녹읍(祿邑)에 있었다. 경주 출신인 지증대사가 이천이란 먼 곳에 농장을 소유하게 된 것은, 그러고도 경작, 수취, 운반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이 신라에 의해 지급되고 관리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은 사전을 세습적 가산으로 향유했다. 그 권리는 왕이라고 해서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실이 귀족의 토지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귀족의 권리도 절대적이지 않았다. 세습적 가산이라고는 하나 그 실체는 국가가 지급하고 관리하는 수조권이었다. 귀족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지만, 소정의 절차에 따라 왕의 허가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것은 그리 흔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9세기 나름의 역사적 시공

지증의 사례에서 보는 왕의 재가를 두고 절에다 재산을 함부로 바치는 폐단을 억제할 목적에서 취해진 공적 규제라는 해석이 있다. 토지 재산에 대한 그런 정도의 규제는 어느 시대에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왕토주의는 법적 픽션에 불과하다는 논리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 같은 해석은 한마디로 몰역사적이다. 긴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보편적인 범주는 그 예가 드물다. 9세기는 다른 시대와 혼동될 수 없는 제 나름의 역사적 시공(時空)을 지닌다. 역사가는 전후좌우를 살피며 각 시대 고유의 시공을 잡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9세기 신라 귀족의 농장은 이후 어떻게 됐나. 10~14세기 고려시대에 걸쳐 건재했나.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범주라면 그래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다. 신라 귀족의 농장은 신라와 운명을 같이했다. 고려왕조의 집권체계가 강화됨에 따라 귀족들의 농장은 11세기 말까지 현저하게 약화하거나 소멸했다. 이후 고려왕조의 녹봉제와 녹과전(祿科田)을 거쳐 조선왕조의 과전법(科田法)이라는 전혀 별개의 토지제도가 펼쳐졌다. 그 역사를 밀어붙인 한편의 힘은 왕토주의였다. 한마디로 8~14세기의 토지제도는 국왕의 공전과 귀족·관료의 사전이 밀고 당기는 역사였다. 드디어 15세기에 들어서 개인이 토지를 자유롭게 사고파는 시대가 열렸다. 그 역사에서 8~10세기의 왕토주의는 유년기에 해당했다. 그 미약함을 두고 노년기의 쇠약함을 연상해서는 곤란하다.

신라 때 토지는 왕실의 공전과 귀족의 사전으로 나뉘었죠…개인간 토지 매매가 가능해진 것은 15세기 이후에요
■기억해주세요

귀족은 사전을 세습적 가산으로 향유했다. 그 권리는 왕이라고 해서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실이 귀족의 토지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귀족의 권리도 절대적이지 않았다. 세습적 가산이라고는 하나 그 실체는 국가가 지급하고 관리하는 수조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