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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커피의 등급을 결정하는 커피감별사, 큐그레이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돼 이슬람 문화권을 통해 전 세계에 퍼진 커피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중국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커피는 당시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특히 고종 황제가 커피애호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덕수궁에 정관헌(靜觀軒)이라는 회랑을 짓고 커피와 다과를 곁들인 연회를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당시 커피는 지배계급만의 전유물에 불과했을 뿐, 지금과 같이 전 국민이 애음(love to drink)하는 음료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종로와 명동 등지에 커피를 파는 다방이 존재했지만, 가격이 비싸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부유층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이러한 커피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이 끝난 직후부터였다.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함께 들어온 인스턴트커피가 시장에 유통되면서 일반 시민들도 커피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도 커피는 여전히 고급 음료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수입 금지 품목에서 풀리기는 했지만 커피 수입이 여전히 제한돼 있어 소량의 원두 수입만이 가능했고, 이로 인해 커피 한 잔 가격은 서민이 감당하기에는 아직 높았기 때문이다.그러던 커피가 실질적인 대중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1970년대 인스턴트커피의 국산화와 세계 최초의 믹스커피 개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커피의 시장 가격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해졌고, 자판기 보급에 힘입어 커피를 찾는 손길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즈음 경제개발로 국민소득이 증가한 것도 커피에 대한 수요를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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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제국을 선포하다
오늘날 덕수궁(경운궁)에서 약 500미터 정도 걸어가면 조선 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의 즉위식이 치러집니다. 더 이상 청 황제의 제후국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임을 선포하고 고종 황제는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조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이에 근대적 입헌 체제를 수립한 제국, 대한제국이 있었습니다.근대적 개혁 군주를 자처한 고종 황제당시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조선은, 그리고 고종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있었던 을미개혁, 그리고 당사자인 고종 자신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것까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풍전등화와 같은 날들이었지요. 독립협회는 물론 전 현직 관료들조차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국임을 선포해야 한다는 호소와 주장이 계속해서 고종에게 올라왔습니다. 결국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단, 이 과정을 저는 고종의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당히 상황에 떠밀려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아관파천 당시인 1896년 고종은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보냅니다.또한 다음해인 1897년 민영환을 영국대사로 임명하고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행사에 참석케 합니다. 제정 러시아는 여전히 황제권이 막강했지요. 영국은 이미 의회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기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지요. 이 두 가지 경우를 고종은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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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주식 시장의 거래를 활성화시키는 주식브로커
성공이 확실시되는 사업 아이템은 있는데 이를 제품화할 자금이 없는 사람, 밀려드는 주문으로 공장을 확장해야 하는데 자본금이 없어 고민하는 사람, 주식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주식을 통해 자금을 모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자금이 필요할 때 가장 흔히 이용하는 방법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신용이나 담보가 있어야 하며, 만약 대출을 받았다 하더라도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러나 주식을 통해서 자금을 모집하면 이자를 갚아야 할 부담도 없으며, 담보가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보다 구체적으로 주식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전에 먼저 주식과 증권 그리고 주권에 대한 정확한 개념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일상생활에서 이들 용어가 정확한 개념 정리 없이 혼용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먼저 주식이란 회사에 투자한 자금과 이 투자금을 통해 얻게 되는 주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말한다. 이러한 주식의 내용을 표시한 문서를 주권이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증권은 유가증권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유가증권이란 재산에 대한 권리를 표시한 증서들을 말한다. 이 증서를 통해 재산권이 발생, 행사, 이전되는데 어음, 수표, 채권, 주권, 상품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요컨대 주식이란 회사에 투자한 자금단위와 그로 인해 획득한 권리와 의무 등을 나타내는 말이고, 이는 주권을 통해서 내용이 문서화된다. 이러한 주권은 유가증권, 즉 증권의 한 종류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주식의 내용을 표시한 문서를 주권이라 한다.우리가 흔히 말하는 증권은 유가증권을 줄여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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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다
개항 이후 조선은 내부의 근대적 개혁 요구와 외부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동시에 들이닥치는 위기의 순간이자 환골탈태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지난호에서 보았듯 1884년 급진개화파가 중심이 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후 딱 10년 뒤 이번에는 조선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시대의 개혁을 온몸으로 요구한 그들, 바로 전봉준과 동학 농민 운동입니다.시대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일어선 농민들비록 갑신정변 이후 정부는 나름대로 개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각 지역의 농민들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1880년대 이후 내륙으로 진출한 청과 일본의 상인들이 판매하는 값싼 영국산 면직물 등에 의해 경제적 타격을 심하게 입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삼남 지방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많은 공감을 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동학은 기존 양반 중심의 신분제를 거부하고 평등 사상과 함께 이른바 ‘후천개벽’이라 하여 조선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가 다가올 것을 설파하였습니다. 당연히 조선의 지배층은 동학을 용인할 수 없었지요. 반대로 농민들에게 동학은 새로운 희망의 빛 줄기였지요. 2대 교주 최시형의 포교 활동과 좀 더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구한 전봉준의 활동으로 동학은 하나의 사회 세력으로 성장해 갑니다.처음에는 동학 포교의 자유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종교적 운동에서 시작하여 점차 탐관오리 숙청과 외세에 반대하는 사회 정치 운동으로 확장되어 갔지요. 결정적 사건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발발합니다.반봉건, 반외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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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주택을 높은 가격에 빨리 팔아주는 매매주택연출가
주택, 특히 아파트 등의 공동주택을 짓기에 앞서 완공 후의 모습이나 구조 등을 알아볼 수 있도록 미리 지어 보여주는 견본주택을 모델하우스라고 한다. 집을 사고자 하는 수요자에게 모델하우스는 자신들이 살게 될 집의 구조가 어떤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게 하고,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여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밀지를 계획할 수 있게 해준다. 최근에는 내부 인테리어에 사용하는 마감재는 무엇이고,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혹은 추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설비와 기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모델하우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수요자에게 모델하우스는 단순한 모형의 의미를 넘어서 자신(들)의 미래 거주 모습을 명확히 형상화할 수 있는 표본으로 작용하고 있다.한편, 집을 판매하는 공급자의 입장에서 모델하우스는 주택의 판매 촉진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작용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공동주택은 완공되기 전, 시공 과정에서 주택을 판매하는 선(先)분양 방식으로 지어지고 있다. 이 경우 수요자는 아직 실재하지도 않는 주택을 그것도 거금을 들여 사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해 분양이 저조해지면 건축업자의 수익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때 모델하우스가 수요자들의 선택을 유도하여 주택 거래를 활성화하면 건축업자의 이익을 향상시키는 증폭제가 될 수 있다.문제는 주택을 판매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문제가 비단 건축업자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건축업자로부터 구입한 집에 거주하던 사람들도 때로는 이주의 필요성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주택 판매와 수익 창출이라는 동일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통근이 불가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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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저녁 7시 종로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에서 이 낙성식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개최됩니다. 당시 실세였던 민씨 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민영익부터 청을 위해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에 간섭하던 묄렌도르프 등이 대거 이 연회에 참여하였지요.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곧 창문밖으로 불이 난 광경이 포착됩니다. 사람들은 불이야 불이야 라고 소리지르고 있었지요. 놀란 민영익은 우정국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곧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옵니다. 급진 개화파가 주축이 된 개화당의 칼에 맞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국가를 지향한 사건, 바로 갑신정변의 시작이었습니다.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겠다는 김옥균제가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정변의 핵심 인물인 김옥균이 남긴 말입니다. 그는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개화당)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불란서(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이 영국의 17세기의 명예혁명처럼 왕정을 유지하면서도 근대 입헌 체제로 나아가는 것에 비교하여 우리나라는 프랑스혁명처럼 근대 국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김옥균은 명확하게 당시 세계 정세와 역사의 흐름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처럼, 근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기득권 세력과 구체제를 강한 의지로 밀어부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사실 조선은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으로 근대 경제 체제, 즉 자유 무역이라는 틀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정치적 근대 개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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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기업의 회계업무 담당하는 '전산 회계 전문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게 입사한 회사의 출근 첫날, 그동안 우리 회사가 어떤 성과를 보여 온 회사인지 단숨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회사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고, 친절해 보이는 회사 선배에게 물어봐서 회사의 상황에 대해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용기 있게 사장님을 직접 찾아가 회사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회사의 경영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는 방법 중 재무제표만큼 유용한 도구는 아마 없을 것이다.회계란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경제 주체들에게 기업의 경영활동에 대한 정보를 화폐 단위로 측정해 제공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배운 바 있다. 재무제표란 이러한 목적을 가진 회계정보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보고되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회계가 회사의 경영성과에 대해 성적을 매기는 방법이라면, 재무제표는 회사의 성적이 표시돼 있는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재무제표는 기업 외부에 있는 경제 주체들 다시 말해 기업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업과 관련된 회계 정보를 제공해 주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재무제표는 기초적인 회계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회사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작성돼 있다.학생의 성적표가 부모님이 알아보기 어렵게 작성돼 있다면 학생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기업 외부에 있는 경제 주체들이 재무제표를 통해 회사에 대한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올바른 경제적 의사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재무제표는 회계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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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1863년 왕권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철종이 후사없이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대까지 안동 김씨 등 세도가들이 오히려 조선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신정왕후 조씨의 전교로 지명된 고종입니다. 그런데 그는 당시 12세밖에 안 되는 나이라 처음에는 신정왕후가 잠시 수렴청정을, 그리고 곧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맡게 됩니다. 왕의 적통이 없어, 종친 중에서 새 왕을 뽑았을 때, 그 아버지를 대원군이라 합니다. 흥선대원군 외에도 선조, 인조, 철종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고 불렀지요. 단 이들은 모두 죽은 후에 대원군이라 칭해진 것이고 살아서 대원군이라 칭해진 이는 흥선대원군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그는 10년 동안 살아있는 권력으로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였습니다.10년간 왕권 강화를 위해 일한 흥선대원군한 마디로 말하면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 왕을 대신해 10년 동안 집권한 것이지요. 훗날 임오군란 때 잠깐, 그리고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도 잠깐 집권한 적이 있지만 여러분은 주로 이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집권기에 대해 배웁니다. 당시 44세였던 그의 눈에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왕권은 땅에 떨어져 있었고 백성들은 이미 1862년 임술 농민봉기를 일으킨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외부에서 들여오는 소리는 큰 나라로 섬기는 청 왕조가 서양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으며, 바로 위의 러시아도 점차 세력을 넓힌다는 것이었지요. 안팎의 위기 속에 흥선대원군의 선택은 과감한 개혁이었습니다.우선 외척일 뿐인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안동 김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