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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진정한 동양 평화를 위하여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 도착한 초대 통감이자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옮기는 순간, 세 발의 총탄이 발사됩니다. 곧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지고 저격한 인물은 러시아군에 체포되는 순간까지도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칩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입니다. 1910년 2월 뤼순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당당히 말합니다. “고종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으며 국권을 빼앗아 간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처단한 것이다. 따라서 형사범이 아닌 만국공법상의 전쟁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지요.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던 안중근 의사황해도 해주 출신인 안중근 의사는 부친이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한 터에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가 높았습니다. 한때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기도 했으며 프랑스 신부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최우선 방법은 교육이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 직접 민중 계몽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1907년 일제에 진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에도 헌신하여 자신의 재산을 대부분 헌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07년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파견한 헤이그 특사를 계기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각서에 따라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 해산당하자,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항일 전쟁을 결심합니다.1907년, 우선 북간도로 망명하였으며 그 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 경제 기타

    초고령화 사회에서 주목할 직업…은퇴설계사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당면 과제 중 하나로 고령화 문제를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관련 분야 전문가 및 언론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고령화가 우리 사회의 주요 담론 대상이 됐지만 많은 사람이 고령사회·고령화사회·초고령사회 등의 용어가 명확히 구분되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고령화와 관련한 용어를 정확히 알고 구사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많지 않은 듯하다.국제기구를 비롯한 많은 국가는 인구를 나이에 따라 크게 세 그룹으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0~14세까지 인구는 유소년인구로 분류한다. 이들 유소년인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음으로 15~64세 인구는 생산가능인구라고 부른다. 이들을 생산가능인구라 부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산가능인구는 실질적으로 해당 국가의 경제활동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65세 이상 인구를 고령인구라고 부른다.이런 인구 구분 기준을 바탕으로 UN은 고령화사회·고령사회·초고령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UN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해당 국가를 고령화사회로 분류한다. 또한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다시 20% 이상까지 올라가면 해당 국가를 후기고령사회 또는 초고령사회로 구분하고 있다. 현재 많은 국가가 UN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준용해 자국의 상황을 진단하고 있다. UN의 분류체계는 국가마다 놓인 특수성으로 인

  • 역사 기타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5년 11월18일 새벽 2시, 경운궁 수옥헌(덕수궁 중명전)에는 다섯 명의 대한제국 고위 관료들이 모입니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리고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와 외부대신 박제순이 대표로 이토 히로부미가 제시한 조약을 체결합니다. 바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을사늑약입니다.러일 전쟁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노림수이미 11월9일부터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자신들의 침략을 숨긴 ‘동양평화’라는 허울뿐인 명분을 들고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에게 보호국이 될 것을 인정하는 조약 체결을 강요합니다. 외교권을 박탈한 후 한반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겠다는 것이지요. 고종과 당시 조정 대신들은 당연히 거부합니다. 그러자 일본공사는 물론 무장한 일본군까지 궁궐 안으로 진입시키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이토는 하세가와 주한일본군 사령관과 함께 고종을 세 번 찾아가 계속해서 압박을 가합니다. 고종 황제는 계속 거부했고 대한제국의 어전회의에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의견이 강했습니다. 결국 이토는 헌병까지 동원해 강제적으로 회의를 열게 하고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에게 강제적이고 불법적인 조약 체결에 관한 찬반을 묻게 됩니다. 11월17일,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강하게 반대했고 법부대신 이하영도 반대합니다. 결국 맨 처음 언급한 다섯 명의 대신들이 찬성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18일 새벽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흔히 역사는 인과 관계 또는 흐름을 중시합니다. 전후 맥락 속에서 사건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

  • 경제 기타

    커피의 등급을 결정하는 커피감별사, 큐그레이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돼 이슬람 문화권을 통해 전 세계에 퍼진 커피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중국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커피는 당시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특히 고종 황제가 커피애호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덕수궁에 정관헌(靜觀軒)이라는 회랑을 짓고 커피와 다과를 곁들인 연회를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당시 커피는 지배계급만의 전유물에 불과했을 뿐, 지금과 같이 전 국민이 애음(love to drink)하는 음료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종로와 명동 등지에 커피를 파는 다방이 존재했지만, 가격이 비싸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부유층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이러한 커피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이 끝난 직후부터였다.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함께 들어온 인스턴트커피가 시장에 유통되면서 일반 시민들도 커피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도 커피는 여전히 고급 음료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수입 금지 품목에서 풀리기는 했지만 커피 수입이 여전히 제한돼 있어 소량의 원두 수입만이 가능했고, 이로 인해 커피 한 잔 가격은 서민이 감당하기에는 아직 높았기 때문이다.그러던 커피가 실질적인 대중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1970년대 인스턴트커피의 국산화와 세계 최초의 믹스커피 개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커피의 시장 가격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해졌고, 자판기 보급에 힘입어 커피를 찾는 손길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즈음 경제개발로 국민소득이 증가한 것도 커피에 대한 수요를 창출

  • 역사 기타

    제국을 선포하다

    오늘날 덕수궁(경운궁)에서 약 500미터 정도 걸어가면 조선 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의 즉위식이 치러집니다. 더 이상 청 황제의 제후국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임을 선포하고 고종 황제는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조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이에 근대적 입헌 체제를 수립한 제국, 대한제국이 있었습니다.근대적 개혁 군주를 자처한 고종 황제당시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조선은, 그리고 고종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있었던 을미개혁, 그리고 당사자인 고종 자신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것까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풍전등화와 같은 날들이었지요. 독립협회는 물론 전 현직 관료들조차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국임을 선포해야 한다는 호소와 주장이 계속해서 고종에게 올라왔습니다. 결국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단, 이 과정을 저는 고종의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당히 상황에 떠밀려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아관파천 당시인 1896년 고종은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보냅니다.또한 다음해인 1897년 민영환을 영국대사로 임명하고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행사에 참석케 합니다. 제정 러시아는 여전히 황제권이 막강했지요. 영국은 이미 의회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기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지요. 이 두 가지 경우를 고종은 민영환

  • 경제 기타

    주식 시장의 거래를 활성화시키는 주식브로커

    성공이 확실시되는 사업 아이템은 있는데 이를 제품화할 자금이 없는 사람, 밀려드는 주문으로 공장을 확장해야 하는데 자본금이 없어 고민하는 사람, 주식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주식을 통해 자금을 모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자금이 필요할 때 가장 흔히 이용하는 방법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신용이나 담보가 있어야 하며, 만약 대출을 받았다 하더라도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러나 주식을 통해서 자금을 모집하면 이자를 갚아야 할 부담도 없으며, 담보가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보다 구체적으로 주식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전에 먼저 주식과 증권 그리고 주권에 대한 정확한 개념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일상생활에서 이들 용어가 정확한 개념 정리 없이 혼용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먼저 주식이란 회사에 투자한 자금과 이 투자금을 통해 얻게 되는 주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말한다. 이러한 주식의 내용을 표시한 문서를 주권이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증권은 유가증권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유가증권이란 재산에 대한 권리를 표시한 증서들을 말한다. 이 증서를 통해 재산권이 발생, 행사, 이전되는데 어음, 수표, 채권, 주권, 상품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요컨대 주식이란 회사에 투자한 자금단위와 그로 인해 획득한 권리와 의무 등을 나타내는 말이고, 이는 주권을 통해서 내용이 문서화된다. 이러한 주권은 유가증권, 즉 증권의 한 종류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주식의 내용을 표시한 문서를 주권이라 한다.우리가 흔히 말하는 증권은 유가증권을 줄여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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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다

    개항 이후 조선은 내부의 근대적 개혁 요구와 외부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동시에 들이닥치는 위기의 순간이자 환골탈태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지난호에서 보았듯 1884년 급진개화파가 중심이 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후 딱 10년 뒤 이번에는 조선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시대의 개혁을 온몸으로 요구한 그들, 바로 전봉준과 동학 농민 운동입니다.시대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일어선 농민들비록 갑신정변 이후 정부는 나름대로 개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각 지역의 농민들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1880년대 이후 내륙으로 진출한 청과 일본의 상인들이 판매하는 값싼 영국산 면직물 등에 의해 경제적 타격을 심하게 입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삼남 지방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많은 공감을 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동학은 기존 양반 중심의 신분제를 거부하고 평등 사상과 함께 이른바 ‘후천개벽’이라 하여 조선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가 다가올 것을 설파하였습니다. 당연히 조선의 지배층은 동학을 용인할 수 없었지요. 반대로 농민들에게 동학은 새로운 희망의 빛 줄기였지요. 2대 교주 최시형의 포교 활동과 좀 더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구한 전봉준의 활동으로 동학은 하나의 사회 세력으로 성장해 갑니다.처음에는 동학 포교의 자유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종교적 운동에서 시작하여 점차 탐관오리 숙청과 외세에 반대하는 사회 정치 운동으로 확장되어 갔지요. 결정적 사건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발발합니다.반봉건, 반외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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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을 높은 가격에 빨리 팔아주는 매매주택연출가

    주택, 특히 아파트 등의 공동주택을 짓기에 앞서 완공 후의 모습이나 구조 등을 알아볼 수 있도록 미리 지어 보여주는 견본주택을 모델하우스라고 한다. 집을 사고자 하는 수요자에게 모델하우스는 자신들이 살게 될 집의 구조가 어떤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게 하고,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여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밀지를 계획할 수 있게 해준다. 최근에는 내부 인테리어에 사용하는 마감재는 무엇이고,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혹은 추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설비와 기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모델하우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수요자에게 모델하우스는 단순한 모형의 의미를 넘어서 자신(들)의 미래 거주 모습을 명확히 형상화할 수 있는 표본으로 작용하고 있다.한편, 집을 판매하는 공급자의 입장에서 모델하우스는 주택의 판매 촉진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작용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공동주택은 완공되기 전, 시공 과정에서 주택을 판매하는 선(先)분양 방식으로 지어지고 있다. 이 경우 수요자는 아직 실재하지도 않는 주택을 그것도 거금을 들여 사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해 분양이 저조해지면 건축업자의 수익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때 모델하우스가 수요자들의 선택을 유도하여 주택 거래를 활성화하면 건축업자의 이익을 향상시키는 증폭제가 될 수 있다.문제는 주택을 판매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문제가 비단 건축업자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건축업자로부터 구입한 집에 거주하던 사람들도 때로는 이주의 필요성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주택 판매와 수익 창출이라는 동일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통근이 불가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