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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군국주의 일본, 만주사변·중일전쟁 일으켜…가마솥·숟가락·쌀 모두 전쟁물자로 강탈

    1920년대 후반 세계에 경제 공황이 닥쳤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공황으로 각국의 수많은 기업과 은행 등이 문을 닫았습니다. 실업자가 늘어나서 생산해놓은 물건은 소비되지 못해 창고에 재고로 쌓였지요. 그러면 다시 기업이 문을 닫게 되고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이었습니다.미국은 뉴딜정책을 펼쳐서 실업자를 구제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블록 경제를 형성해 공황을 극복했습니다. ‘블록 경제를 형성한다’는 말은 몇 나라가 경제적으로 통합해 하나의 지역(블록)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나라나 지역과 무역할 때 자기들끼리 보호하며 경제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이들 경제 블록에도 못 끼고 스스로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체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전체주의’는 국가 권력이 강제와 억압으로 개인 생활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지시하는 통치 체제를 말합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가 부정될 수밖에 없지요. 전체주의는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으로, 독일에서는 나치즘으로, 일본에서는 군국주의로 나타났습니다.군국주의를 내세운 일본은 군사력을 키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습니다. 우선 대륙인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한반도를 전쟁을 준비하는 기지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일본은 일부러 사건을 조작해 중국과 전쟁할 빌미를 만들었습니다. 1931년 일본은 중국 만주의 류탸오후 철도를 폭파하고 중국인들이 폭파했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만주 지방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일어난 전쟁이 만주사변입니다. 만주 지역을 점령한 일본은 길

  • 역사 기타

    "내 살림은 내 것으로" 물산장려운동, 윤봉길, 폭탄 투척…항일정신 이어가

    3·1 만세운동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이 자극제가 돼 일어났습니다. 자기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정하게 두라는 것이 민족자결주의의 핵심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우리 민족이 일본과 다른 민족이고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이었음을 세계 여러 나라에 밝히면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힘을 가진 여러 나라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습니다. 1921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태평양평화회의 등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문제는 회의 주제로 선택되지도 못했습니다.태평양평화회의에서 외면받다우리 민족은 크게 실망했지요. 하지만 그냥 포기하거나 넋 놓고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당장 독립을 맞이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 민족이 힘을 기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며 실력 양성에 다시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일어난 대표적인 실력 양성 운동은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등이었습니다. 또 6·10 만세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 등 3·1운동의 맥을 잇는 항일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물산장려운동은 1907년 일어났던 국채보상운동과 그 성격이 비슷했습니다. 국산품을 사용하고 근검절약해 민족 기업을 키울 자금을 마련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민족 기업이 많아지면 우리 민족이 경제 자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일본에 맞설 힘도 갖추게 될 것이라는 게 이 운동의 취지였습니다.‘내 살림은 내 것으로’라는 표어를 내건 물산장려운동에는 전국 각지의 많은 국민이 호응했지요. 하지만 일본은 이 운동을 항일 민족운동으로 여겨 심하게 탄압했습니다. 또 국산품을 쓰고 싶어도 늘어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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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순 "누굴 죄인으로 몰아 재판하느냐", 3·1운동 후 임정 수립…이승만 초대 대통령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3·1만세 운동에는 3개월 동안 200만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합니다. 시위 횟수는 1500여회에 이르고 5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체포당했습니다. 그 기간에 사망한 사람이 8000명에 이르니 일본의 탄압이 얼마나 무자비했는가를 알 수 있지요. 만세 운동을 하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독립 열사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유관순입니다. 유관순은 3·1운동 당시 이화학당 고등부 학생이었습니다. 그때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학생들이 다치거나 잡혀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나가서 시위에 참가했습니다.시위 격렬…조선총독부 휴교령시위가 격렬해지자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휴교령을 내렸지요.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고향 아우내(병천)에 내려간 유관순은 그곳 주민들에게 함께 만세 운동하기를 독려했습니다. 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유관순은 시위대의 가장 앞에 나섰습니다. 유관순은 단상에 올라 “지금 세계의 피압박민족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합시다”라고 군중에게 외쳤습니다.이날 시위에 일본군은 총칼로 맞섰습니다. 유관순의 부모도 이날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지요. 주동자로 잡혀간 유관순은 재판에서 5년형을 받았습니다. 유관순은 재판장에서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 일본인은 우리 땅에 몰려와 숱한 동포를 죽이더니 마침내 나의 부모님까지 죽였다. 대체 누가 누굴 죄인으로 몰아 심판한단 말인가?”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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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국토 40%를 일본인에게 팔아넘겨 문화재 강탈· 훼손…'3·1운동' 폭력 진압

    ‘식민’이라는 낱말은 ‘심을 식(植)’자와 ‘백성 민(民)’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만 보면 ‘백성을 심는다’라는 뜻입니다. 대체 어디에다, 어떤 백성을 어떻게 심는다는 말일까요? 물론 심을 곳은 지배를 당하는 식민지입니다. 그런데 심을 백성은 지배하는 나라 사람들이지요.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땅에 자기네 나라 사람들을 데려다 살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살던 땅을 빼앗아야 했지요. 일본은 자국민의 ‘식민’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했습니다.소유권 개념 없던 땅 주인들일본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정해진 날짜 안에 관청에 신고하라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토지 조사 사업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일본은 토지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두는 ‘조사’이며, 신고하면 원래 주인에게 그 땅의 소유권을 인정해주겠다고 했으니까요.하지만 당시 현실로는 일본의 토지 조사 사업에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토지 조사 사업을 한다는 것부터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당시에는 토지 소유권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문중의 땅 등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에게는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을 수도 있지요.교육을 받지 못한 농민들은 복잡한 신고 절차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조상 대대로 농사짓고 살아온 땅에 무슨 신고가 필요하냐, 설마 땅을 퍼가기야 하겠느냐 등의 생각으로 신고를 안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일본은 신고를 돕기 위한 계몽이나 홍보, 교육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땅을 빼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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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빼앗긴 뒤 '되찾자 운동' 시작…신문발행·국채보상 계몽운동 '역부족'

    1910년 8월29일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이 선포되면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1945년 8월15일, 전쟁에 패배한 일본이 물러갈 때까지 36년 동안을 일제강점기라고 합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로 점령한 시기’라는 뜻입니다. ‘제국주의’는 한마디로 자기네 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여기고 그 밑에 여러 식민 국가를 거느리겠다는 생각입니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가지려던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로부터 자원과 노동력을 거의 공짜로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였습니다.국력 안 키운 잘못…경제이권 빼앗겨조선이 나라의 문을 연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때까지 여러 힘센 나라가 한반도에서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일본은 물론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은 철도를 놓을 수 있는 권리, 광산에서 금 등을 캘 수 있는 권리, 산에서 나무를 베어갈 수 있는 권리 등 돈이 될 만한 권리는 앞다퉈 차지했습니다. 그중 철도 부설권은 빼앗은 자원을 자기네 나라로 싣고 가기 편하게 길을 놓는 아주 중요한 권리였습니다.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런 권리를 인정하려면 조약을 맺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때 조선(대한제국)이 맺는 조약에는 ‘최혜국 대우’라는 말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최혜국 대우는 어떤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이라도 뒤에 다른 나라에 인정한 내용은 앞서 맺은 나라에도 인정해야 한다는, 억지나 다름없는 대우입니다. 이는 불평등 조약의 대표적인 조항이지요. 힘이 없던 조선은 이런저런 불합리한 이유 때문에 한반도의 거의 모든 이권을 힘센 나라들에 내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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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 총격 사살…일본,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 강제 합병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황태자였던 순종을 황제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완전히 자신들의 독차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 황제가 언제 다시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일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있었던 1907년부터 대한제국을 어떻게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처럼 무찔러버릴 것인가, 보호국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합병할 것인가? 일본의 야욕 앞에 대한제국은 바람 앞에 선 등불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이토 히로부미의 15개 죄목을사늑약이 맺어진 이후 울분을 참을 수 없었던 우리 국민은 일본의 만행에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고,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나 일본인에 대해 응징하기도 했습니다. 그중 가장 대단한 일은 이토 히로부미 총살 사건입니다. 서른 살의 청년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을사늑약의 원흉이고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를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1909년 7월 이토는 대한제국과 만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상의하기 위해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만났습니다.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안중근은 역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일본인으로 변장했기 때문에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이토와 코코프체프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다가가는 순간 안중근은 권총을 쏘았습니다. 그중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습니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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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 분위기 속 을사늑약 강제 체결…고종, 조약무효 알리려 밀사 파견

    을사늑약 근거로 일본 침략1905년 11월17일, 일본은 한일협상조약이라 불리는 불평등 조약을 고종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날 일본은 어전회의가 열리는 덕수궁 중명전 안팎에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황제의 도장인 옥새 찍는 것을 끝내 거부하였습니다. 고종을 설득하지 못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데리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입니다. ‘늑약’은 ‘굴레 륵(勒)’자와 ‘맺을 약(約)’자로 만들어진 낱말입니다. 굴레 쓰인 짐승은 고삐를 잡은 사람 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늑약’은 강제로 맺은 조약을 뜻하게 되었습니다.일본은 힘센 나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후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은 나라 사이의 약속이기 때문에 체결 때는 각 나라 최고 책임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을사늑약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무대신 박제순이 체결했지요. 황제가 도장을 안 찍은, 그것도 총칼과 대포로 무장한 군대에 포위되어 맺은 조약을 국가 사이의 정식 약속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을사늑약을 내걸고 한반도를 침략했습니다.일본 통감부 설치…황궁 자유출입을사늑약의 주요한 내용은 첫째,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 업무를 지휘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할 때는 반드시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것이지요.둘째, 일본 정부는 서울에 통감부를 만들고 한 명의 통감을 두겠다고 했습니다. 통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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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를 삼키려는 일본과 러시아 전쟁, 약소국 대한제국 운명… 전쟁 결과에 좌우

    역사적 사건 가운데 원인이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건이 원인이 있어서 만들어진 결과지요. 고종이 임금으로 있는 동안 수많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사건들이 한결같이 조선 혹은 대한제국의 망국을 재촉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친러 정권이 세워졌습니다. 러시아는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군주를 1년 동안이나 자신들의 공사관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러시아는 조선에서 확실하게 세력을 뿌리내린 듯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일본의 의지는 그보다 더 확고했습니다. 조선은 요충지…러·일 각축전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부설 등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과 타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두고 일본과 러시아는 한판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러시아에도 일본에도 한반도를 양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러시아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이른바 부동항(不凍港)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유럽 쪽으로 진출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 의해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보기에 한반도는 부동항이 줄지어 있는 훌륭한 장소였지요. 게다가 당시 러시아 안에서는 곧 혁명이 일어날 듯 불만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황제는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한편 일본은 좁은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북진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