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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의 문이 열리다…일본에 이어 미국·프랑스·러시아 등과 조약
고종이 조선의 제26대 임금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였습니다. 원래 미성년이 임금이 되면 대비가 발을 내리고 그 뒤에서 정치를 돕는 수렴청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비가 된 신정왕후는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섭정을 하게 했습니다. ‘대원군’이란 자신은 왕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 그 아버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조선의 대원군들 중 정치에 직접 나선 사람은 흥선대원군밖에 없으므로 보통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을 가리킵니다.대원군, 안동 김씨·서원 축출흥선대원군이 가장 먼저 시작한 개혁은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땅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집안이나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당쟁의 근거지가 되는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서원은 지방에 있던 유학자들의 사설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서원을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파당을 만들고 다른 파당과 싸우는 일이 잦아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흥선대원군은 이름 없는 세금과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 제도도 없애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한 일 가운데 가장 대담한 일은 양반들에게서도 세금을 거둬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평민은 세금을 내는데 상대적으로 더 부유한 양반들은 오히려 세금을 안 내는 모순된 일이 그때까지 당연시되고 있었지요.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세도 정치를 몰아내고 민심을 수습했으며 국가 재정도 늘려나가는 등 개혁을 펼쳤습니다.당백전·통행세·쇄국정책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잘못한 일들도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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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데이터 분석가
미래 사회에 가장 유망한 직업은 데이터 분석가다.국가 전반의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 일은 특정 개인이나 회사의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지식과 방법을 요구한다. 일개 개인이나 회사의 경제 상황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 개인, 정부 등 다양한 경제 주체가 수많은 경제 활동을 전개한 결과가 투영된 국가 경제 전반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지식과 방법이 요구된다.대개의 경우 경제 전반의 상황을 다소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인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 정책 입안자나 기업체 의사결정권자들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그들은 국가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뿐만 아니라 자신이 활동하는 산업 또는 지역에 대한 세세한 상황까지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최근에는 경제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일반인 또한 경제 전반의 상황을 더 정밀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국가 전반의 경제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 단순히 주변에서 목격하는 상황에만 의존해 경제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상황을 종합해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답은 경제지표에 있다.경제지표란 경제 활동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해당 경제 현상을 통계 수치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현재 한국은 한국은행, 통계청, 금융위원회 등 여러 정부기관이 통화, 물가, 금리 등 국가 경제 전반의 경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다양한 경제지표를 집계해 정기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제지표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경제학자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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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우리나라 근대는 언제부터인가요?…부정부패로 조선이 망하면서 시작
우리 역사에서 근대(近代)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두부를 자르듯 딱 떨어지게 시대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근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와 ‘가까운 시대’입니다. 근대 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와 어떤 점이 달라진 것일까요. 근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체제가 도입됐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1876년(고종13)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해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의 힘에 떠밀려서 맺은 불평등 조약입니다. 하지만 이 조약으로 조선의 항구가 열리고 서양의 문물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조선의 근대화가 시작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분 제도와 노비 제도가 폐지된 갑오개혁(1894)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근대의 시작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있지요.아무튼 우리 역사에서의 근대는 조선 말기부터 시작됐습니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한 시기를 근대로,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를 현대로 구분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앞으로 필자가 쓸 ‘펭귄쌤이 들려주는 근현대사’는 안타깝게도 조선이 기울어가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조선이 망하는 길로 접어든 것은 1800년대 초부터입니다.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학문과 국방,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이뤄냈던 제22대 임금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였지요. 정조는 후계자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조가 제23대 임금에 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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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3·1 운동, 겨레의 독립 만세 운동
1919년 3월 13일, 미국 뉴욕타임즈 신문에는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 그리고 “수천 명의 운동 가담자들이 일본에 연행되다”라는 기사가 실립니다. 기사에는 이 운동이 예상보다 더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 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되었고 일본이 대규모 헌병대를 추가로 부를 것이다고 보도하였습니다. 또한 AP통신의 보도로,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천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쯤되면 여러분도 이 운동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겨레의 독립 만세 함성이 울려퍼진 바로 3·1 운동입니다.1919년 뉴욕타임즈에 소개된 3·1 운동3·1 운동이 발발한 직후 이를 소개한 신문은 더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은 한국인들이 비무장(비폭력) 혁명을 일으켰다고 대서특필하였으며 프랑스의 앙탕트, 영국 모닝포스트는 물론 일본 반도신문과 조일신문 및 중국 민국일보에도 기사화하였지요. 이처럼 전세계 언론이 주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그것은 3·1 운동이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채택된 민족 자결주의와 같은 세계사적 흐름을 반영하였으며,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만세 운동을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1919년 4월 1일자 베이징대 학생들의 잡지 <<신조>>에는 3·1 운동에 대해 첫째, 무기를 갖지 않은 혁명, 둘째 불가능한 것을 알고 한 혁명, 셋째 순수한 학생혁명에서 출발한 점 등을 주목하며 '혁명계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심지어 인도의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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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기준금리는 우리가 결정한다 - 금융통화위원
한국은행은 1950년 5월 공포된 ‘한국은행법’에 근거해 같은 해 6월 설립된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이다. 동법(同法) 제1조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하여 물가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즉, 한국은행이 존재하는 것은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함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화신용정책을 운용하고 있다는 의미다.통화신용정책이란 시중의 통화량이나 금리(이자율)가 사회적경제적으로 바람직한 수준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여러 수단을 활용해 조정하고 관리하는 정책을 말한다. 통화신용정책을 펴는 이유는 이를 통해 통화량을 조정하면 총수요가 변화해 경기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기가 침체에 있을 때 통화를 공급하면 금리가 하락해 소비와 투자가 증가한다. 반면 경기가 과열 상태에 있을 때 통화량을 줄이면 금리가 올라 소비와 투자가 감소하게 된다. 즉, 통화신용정책을 잘 활용하면 침체된 경기를 진작할 수도, 과열된 경기를 안정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그런데 만약 이런 통화신용정책을 정부나 정치권에서 책임지고 있다면 어떨까. 정권을 유지하고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부와 정치권은 선거에서의 승리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따라서 선거에 임박해 경제 상황이 특정 정파에 유리하게 조성된다면 경제가 만사(萬事)인 요즘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선거에서의 승리는 따 놓은 당상과 다름없다. 예컨대 선거가 있기 전 경기가 호황에 있다면 유권자들은 이를 정부나 여당의 치적으로 인식하기 쉽다. 반면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펼쳐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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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진정한 동양 평화를 위하여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 도착한 초대 통감이자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옮기는 순간, 세 발의 총탄이 발사됩니다. 곧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지고 저격한 인물은 러시아군에 체포되는 순간까지도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칩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입니다. 1910년 2월 뤼순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당당히 말합니다. “고종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으며 국권을 빼앗아 간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처단한 것이다. 따라서 형사범이 아닌 만국공법상의 전쟁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지요.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던 안중근 의사황해도 해주 출신인 안중근 의사는 부친이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한 터에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가 높았습니다. 한때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기도 했으며 프랑스 신부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최우선 방법은 교육이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 직접 민중 계몽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1907년 일제에 진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에도 헌신하여 자신의 재산을 대부분 헌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07년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파견한 헤이그 특사를 계기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각서에 따라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 해산당하자,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항일 전쟁을 결심합니다.1907년, 우선 북간도로 망명하였으며 그 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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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초고령화 사회에서 주목할 직업…은퇴설계사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당면 과제 중 하나로 고령화 문제를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관련 분야 전문가 및 언론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고령화가 우리 사회의 주요 담론 대상이 됐지만 많은 사람이 고령사회·고령화사회·초고령사회 등의 용어가 명확히 구분되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고령화와 관련한 용어를 정확히 알고 구사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많지 않은 듯하다.국제기구를 비롯한 많은 국가는 인구를 나이에 따라 크게 세 그룹으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0~14세까지 인구는 유소년인구로 분류한다. 이들 유소년인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음으로 15~64세 인구는 생산가능인구라고 부른다. 이들을 생산가능인구라 부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산가능인구는 실질적으로 해당 국가의 경제활동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65세 이상 인구를 고령인구라고 부른다.이런 인구 구분 기준을 바탕으로 UN은 고령화사회·고령사회·초고령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UN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해당 국가를 고령화사회로 분류한다. 또한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다시 20% 이상까지 올라가면 해당 국가를 후기고령사회 또는 초고령사회로 구분하고 있다. 현재 많은 국가가 UN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준용해 자국의 상황을 진단하고 있다. UN의 분류체계는 국가마다 놓인 특수성으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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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5년 11월18일 새벽 2시, 경운궁 수옥헌(덕수궁 중명전)에는 다섯 명의 대한제국 고위 관료들이 모입니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리고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와 외부대신 박제순이 대표로 이토 히로부미가 제시한 조약을 체결합니다. 바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을사늑약입니다.러일 전쟁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노림수이미 11월9일부터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자신들의 침략을 숨긴 ‘동양평화’라는 허울뿐인 명분을 들고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에게 보호국이 될 것을 인정하는 조약 체결을 강요합니다. 외교권을 박탈한 후 한반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겠다는 것이지요. 고종과 당시 조정 대신들은 당연히 거부합니다. 그러자 일본공사는 물론 무장한 일본군까지 궁궐 안으로 진입시키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이토는 하세가와 주한일본군 사령관과 함께 고종을 세 번 찾아가 계속해서 압박을 가합니다. 고종 황제는 계속 거부했고 대한제국의 어전회의에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의견이 강했습니다. 결국 이토는 헌병까지 동원해 강제적으로 회의를 열게 하고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에게 강제적이고 불법적인 조약 체결에 관한 찬반을 묻게 됩니다. 11월17일,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강하게 반대했고 법부대신 이하영도 반대합니다. 결국 맨 처음 언급한 다섯 명의 대신들이 찬성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18일 새벽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흔히 역사는 인과 관계 또는 흐름을 중시합니다. 전후 맥락 속에서 사건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