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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기타

    전업주부는 직업이 될 수 없다?

    요즘 여학생들은 어떤 장래 희망을 꿈꾸고 있을까? 2012년 실시된 청소년 희망직업 조사에 따르면 여학생들은 교사와 의사, 연예인 등을 미래의 직업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직업들이 근래 들어 갑자기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이뤄진 비슷한 조사에서도 여학생들의 선호 직업은 비슷하게 나타났고, 이보다 앞서 1994년의 조사에서도 교사와 의사, 연예인과 변호사 등이 상위 순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눈 뜨고 나면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고 또 사라지는 시대인 요즘이지만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직업은 십여 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1970~1980년대만 해도 상황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많은 여학생이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장래 희망으로 삼고 살았다. 심지어 미인대회에 나온 참가자들이 심사위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현모양처를 꿈으로 으레 대답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어진 어머니이자 착하고 좋은 아내를 뜻하는 현모양처는 얼마 전만 해도 많은 여성의 꿈이자 희망이었고 실제 그들의 미래 모습이었다. 즉, 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아가며 그들이 사회에 나아가 책임을 다하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뒷바라지하는 전업주부(full-time housewife)가 대다수 결혼한 여성들의 소임이자 운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사회와 여성들 스스로도 이러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이견을 달지 않는 분위기였다.하지만 현모양처로 대표되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인식이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요즘이다.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들의 대부분은 더 이상 현모양처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고

  • 역사 기타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올해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1795년(을묘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한 지 2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수원화성박물관 등에서 특별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지요. 1795년 당시, 윤2월 2일부터 8일 동안 치러진 이 행차를 찬찬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 두 행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바로 사도 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합니다. 둘째, 그 직후 정조는 자신이 만든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군사훈련을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주요 신하들과 직접 참관합니다.조선 왕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삶을 산 정조당시 이 행렬에 참가한 인원만 1779명, 말도 779필이나 됩니다. 그 규모가 엄청나 한강을 건널 때는 배가 아니라 아예 수많은 배를 엮어 만든 배다리를 사용합니다. 아, 참고로 그 배다리를 제작하는 데 실학자이자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이 적극 참여하였지요. 자, 이렇게 대규모 행렬이 먼저 간 곳은 영조의 노여움으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입니다. 그리고 왕권 강화의 필수적 요소인 친위부대의 군사훈련을 참관한 것이지요. 사실 어머니 환갑잔치보다 이 두 가지가 먼저 있었다는 점에서, 결국 사도 세자의 죽음을 지지했던 세력 또는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신하들은 매우 불편한 자리이거나 왕의 숨은 뜻을 헤아려 보기 위해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요.정조, 그는 1776년 왕위에 올라 24년 여 동안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실시하며 조선 후기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끈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1800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매 순간이 드라마

  • 경제 기타

    제품의 작명가, 네이미스트와 지식재산권

    우리는 신문 지면상에서 인수합병(M&A) 관련 기사를 통해 특정 회사가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얼마의 인수 금액을 지급했다는 등의 기사들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사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수대상 기업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해당 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기계, 공장 등과 같은 실물자산 가치보다 해당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특허, 상표 등의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하여 인수 금액이 결정되는 모습을 목격하곤 한다.사실 재산권에는 실체를 가지는 유형의 재산권과 그 실체를 만질 수 없는(intangible) 무형의 재산권이 있다. 이 중에서 유형자산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재산적 가치를 부여했던 대상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동산, 현금, 유가증권 등과 같은 것이 유형자산에 해당한다. 반면 무형의 재산권에는 광산을 채광할 수 있는 광업권이나 어업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어업권과 같은 영업권 그리고 사람의 지식 창작의 결과물인 저작권이나 산업재산권과 같은 지식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이 해당한다. 이 중 지식재산권이란 산업, 과학, 문화, 예술 분야 등 인간의 지적활동의 결과 얻어지는 법적 권리를 의미한다.최근 국제적으로 지적 활동 결과물인 지식재산권이 경제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미국 OCEANTOMO社에 따르면 미 500대 상장기업의 시장가치에서 지식재산권 등 무형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 30%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최근 84%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지식재산권을 중심으로 한 KBC(Knowledge Based Capital)가 향후 OECD 국가들의 성장과 투자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이

  • 역사 기타

    18세기 조선의 미(美)…달항아리

    지난 호에서 저는 100년이나 걸려 완성된 개혁 민생 법안 대동법을 언급하였는데요. 이번 호에서는 대동법이 완성된 직후부터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그 후 100년 동안이나 유행을 지속한 최고의 예술품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숙종 말년부터 영조 시기에 최절정의 예술적 완성도를 뽐낸 문화재이자 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을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는 백자, 바로 18세기의 ‘달항아리’가 그것입니다.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은 ‘달항아리’사실 백자는 이미 고려 시기부터 제작되었고, 중국의 징더전에서 제작된 매우 다양하고 화려한 백자가 엄연히 존재하였지요. 더구나 조선에서도 이미 세조의 통치 후반이었던 15세기 후반에 경기 광주 일대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소, 즉 ‘관요’을 설치하고 지속적으로 제작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시대하면 곧 백자를 떠올릴 만큼 상징적 존재이기도 했지요. 왜냐하면 백자는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를 오롯이 담은 최고의 미적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고결하고 검소하면서도 청렴한 성인 군자의 정신 세계를 그대로 드러난 도자기가 바로 백자였습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무나 이 백자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최고의 성인 군자를 상징하는 왕이 사용하는 그릇이기 때문이지요. 실제 15세기 후반 『경국대전』에는 백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청화백자를 왕실이 아닌 신분이 사용하면 장 80에 처하도록 규정하였어요. 그만큼 왕실이 백자를 독점하였던 것이고요.반대로 양반 사대부 입장에서는 성리학적 고결함을 담은 이 백자를 『경국대전』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어했지요. 그래

  • 경제 기타

    경기변동과 IT전당포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일하고 있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유망하기를 바란다. 구직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분야 또는 앞으로 종사하게 될 직업이 각광받기를 희망한다. 직업의 안정성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거니와 벌이 면에서도 유망 직종이 유리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떤 직업이 현재 유망하고 또 앞으로 각광받게 될까. 직업의 흥망성쇠는 우리 사회가 처한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전망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2000년대 초반 정보보안 전문가가 각광받았던 것은 정보기술(IT) 발달로 개인정보의 보호가 과거와는 다르게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사회복지사가 유망 직업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1인 가구의 폭발적 증가로 복지 수요가 머지않은 미래에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처럼 유망 직업은 현재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미래 사회가 어떠할지를 예측하는 길라잡이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물론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겠지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기의 흐름, 즉 경기변동을 파악해보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경기변동(business fluctuation)이란 경제활동이 어떤 형태로 변화하고 또 이를 유발하는 사회적경제적 원인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경제학 이론을 말한다. 쉽게 말해 경제가 어떤 흐름으로 변모하는지, 그에 따른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경기변동인 것이다.그렇다면 경기변동은 어떤 요인들에 의해 발생할까. 우선 수요의 측면에서 볼 때, 미래에 대한 사람들

  • 역사 기타

    100년 만에 완결된 수취 제도 '대동법'

    17세기는 한편으로 전쟁의 시대였지만, 또 한편에서는 서서히 상품 경제가 발전하는 이른바 ‘상업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혼란기였으나 이미 명대에 들어온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외래 작물의 보급과 양쯔강 중류의 발전으로 상업에서도 활기를 띠었지요. 일본에서는 17세기 초에 에도 막부가 일찍 들어서면서 지역별로 거점 도시가 발전하는 양상을 띠며 조닌이라는 상공업자들의 성장이 두드러집니다.조선 후기 사회의 활력소, 대동법조선의 상황은 좀 더 극적입니다. 이미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됐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부터는 반전을 거듭하며 시장과 상업의 물꼬가 트이며 조선 후기 사회가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요인은 바로 ‘대동법’입니다.대동법은 간단히 말하면 기존 공납제를 쌀로 환산해 내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이 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데 걸린 시간만 무려 100년입니다. 그리고 이 대동법의 원인이 되는 공납제의 문제점은 이미 16세기부터 드러났고 우여곡절 끝에 대동법이라는 개혁 법안이 탄생하게 됩니다.사실 조선은 과전법이라는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을 보호하면서 대신 전세(토지세), 공납(토지세), 역(군역과 요역)이라는 수취 체제를 만들어 톱니바퀴처럼 국가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점차 양반지주 등이 더 많은 토지를 가지려 하고, 탐관오리들

  • 경제 기타

    완전경쟁시장과 웨딩 플래너

    경제학에서는 시장을 특성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한다. 독점시장, 과점시장, 독점적 경쟁시장, 완전경쟁시장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완전경쟁시장은 가장 이상적인 시장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시장원리에 따라 수요자와 공급자가 자유롭게 거래할 경우 사회 전체의 만족이 가장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완전경쟁시장은 다른 시장과 다른 어떠한 특성을 갖고 있기에 이러한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을까?먼저 완전경쟁시장은 다수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있는 시장이다. 완전경쟁시장에는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는 사람도 다수이고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도 다수라서 특정 경제 주체가 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시장을 말한다. 따라서 각 경제 주체들은 자신의 수요량이나 공급량을 줄이거나 늘려도 시장가격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시장이다. 다시 말해 완전경쟁시장에 참여하는 경제 주체들은 가격 순응자이다.두 번째로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가 모두 동질적이어서 완전대체가능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공급자나 수요자 모두 제품들이 동일한 물건들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가격 순응자가 되기 위해서도 필요한 요소이다. 특정 제품마다 소비자나 공급자가 다른 제품이라고 평가하게 될 경우 해당 제품에는 다른 가격을 부여할 수 있게 되지만, 제품이 다른 제품과 동일한 제품이라고 생각될 경우 동일한 가격이 부여될 것이기 때문이다.세 번째로 공급자나 소비자는 가격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물건에 한 가지 가격만이 존재하는 시장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공급자가 파는 물건이 다른 공급

  • 역사 기타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어떻게 사회 질서를 회복시켜나갔을까요. 한편에서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 운동이 추진됐으며 또 한편에서는 성리학적 예법을 바로 세우려는 양반 지배층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북벌을 추진하던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 조선을 통치하던 효종이 의외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붕당정치의 정점이라는 예송논쟁으로 조선은 휘말려 들어가게 됩니다.어떤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을 것이냐1659년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세상을 떠납니다. 원래 그에게는 형이 있었죠. 바로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입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이미 소개된 서구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 중 일부를 가지고 귀국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에게는 오히려 외면당합니다.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해 둘째였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효종에게는 두 명의 걸출한 스승이 있었죠. 한 명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어부사시사>의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남인 계열의 윤선도이며, 또 다른 이는 율곡 이이를 계승하고 김장생에게서 예법을 배운 서인 계열의 우암 송시열입니다. 둘은 같은 성리학을 탐구했지만 학문적으로 미묘하게 갈라지며 경쟁관계기도 했죠. 주자의 성리학을 누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선의의 경쟁 구도에 놓이기도 했습니다.그런데 효종이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나자 상복 문제로 본격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현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