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본능이 이끈 기술혁신 '게임'
☞옆에서 소개한 사례는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사진)의 책 《원더랜드》(프런티어 펴냄·444쪽·1만6000원)를 발췌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혁신이 획기적 아이디어나 기술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놀이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한다. 패션, 쇼핑, 음악, 맛, 환영, 게임, 공공장소 등 여섯 주제로 나눠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상업화 시도와 신기술 개발, 시장 개척으로 이어진 다양한 사례를 담았다.게임은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문화유물이다. 이집트 파라오는 동물의 발목뼈로 만든 ‘아스트라갈리’로 주사위놀이 비슷한 게임을 했다. 우르 왕릉에서는 오늘날의 ‘백개먼’과 비슷한 게임이 발견됐다.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런 정교한 게임도구들을 보면 우연과 무작위성을 향한 인간의 관심이 매우 뿌리깊은 듯하다. 자연의 기본원리를 아직 밝혀내지 못했던 과학 이전의 세상에서, 우연의 요소가 작용하는 게임은 날마다 삶이 던지는 무작위성에 대해 인간이 예행연습하는 셈이었다.
주사위게임에서 확률공식을 찾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주사위는 체스게임의 진행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1283년 스페인의 한 체스 플레이어는 “게임 한 판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지친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빨리 진행하기 위해 도입한 게 주사위”라고 기록했다. 체스는 논리와 정보에 기초한 게임이었기에 우연과 운이 작용하는 주사위를 도입한 방식은 얼마 안 가 사라졌다. 하지만 주사위는 체스 이외 분야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젊은 의학도 지롤라모 카르다노는 도박장에서 게임으로 돈을 버는 괴짜였다. 수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60대 초반 도박사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지침서 《운이 작용하는 게임들에 관한 책》을 썼는데, 여기서 주사위게임을 분석하는 수학등식을 개발했다. 주사위를 한 번 던져 발생하는 두 사건 중 하나의 확률을 계산하는 덧셈공식과 주사위를 연속으로 던지는 결과를 예측하는 곱셈확률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주사위를 던져 ‘3’ 아니면 ‘짝수’가 나올 확률을 알고 싶으면 전자인 1/6과 후자인 1/2를 더하면 되고, ‘6’이 세 번 연달아 나올 확률은 1/6×1/6×1/6=1/216이라고 정리했다.
여론조사·금융·항공 … 확률이론의 무한확장
17세기 프랑스 학자 블레즈 파스칼과 피에르 드 페르마는 카르다노의 이론을 더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두 사람은 주사위게임의 결과를 예측하는 법을 조언해달라는 한 귀족의 요청을 받고 서신을 주고받았다. 여기에 담긴 내용은 확률이론의 기초가 됐고, 이는 통계학이라는 현대과학의 발판이 됐다. 몇 년 뒤 이 개념을 활용해 에드워드 핼리가 영국인의 평균 사망률을 계산했고, 네덜란드 과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 형제는 새로 잉태된 아이의 자연수명을 예측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지금의 ‘기대수명’이라는 통계수치를 수학적으로 처음 고찰한 것이다.
확률이론은 오늘날 세상을 움직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화석연료 같은 존재다. 보험산업은 확률이론 덕분에 등장했다. 보험을 들 때 지불할 보험료가 얼마나 될지 계산할 수 있게 돼서다.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여론조사, 새로운 약품과 치료법의 효능에 대한 예측도 마찬가지다. 항공 분야에서 부품의 오작동 확률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 역시 통계학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모두 파스칼과 페르마가 분석한 주사위게임에 힘입은 바 크다.
룰렛 연구하던 공학도, 헤지펀드 CEO로
메사추세츠공대(MIT) 과학자 에드워드 소프는 1950년대 물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시절부터 룰렛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을 연구했다. ‘전략’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블랙잭이나 포커와는 달리 룰렛은 순전히 ‘운’이 작용하는 게임이다. 돌아가는 룰렛 휠 위의 특정한 숫자에서 공이 멈출 확률은 모든 숫자마다 똑같았다. 소프는 이런 물리학적 공정성이 도박꾼에게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최초의 속도를 측정할 방법을 알면 공이 어느 구역에서 멈출 확률이 더 높은지 파악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소프는 실제 카지노용 룰렛 휠을 사들여 회전하는 룰렛 휠 위에서 공이 그리는 궤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또 카메라, 특수 입력장치, 수신기 등이 복잡하게 연결된 컴퓨터를 제작해 1961년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로 날아가 실제로 실험을 감행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초소형’ 컴퓨터를 활용한 그는 10센트짜리 칩만 걸고 게임에서 이겼다. 수학지식과 확률에서 사소한 기회도 포착해내는 실력으로 무장한 그는 1974년 프린스턴·뉴포트 파트너스라는 회사를 창업한다. 이 회사가 취급한 상품이 금융시장에 큰 수익과 논란을 끊임없이 창출하고 있는 헤지펀드다.
모든 과학에 ‘유희의 혈통’이 흐른다
인간이 게임을 즐기게 된 데는 뚜렷한 진화 목적이 없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게임에 승부욕을 불태우는 인간의 본능은 자연스럽게 함께 노는 기계를 만드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컴퓨터 과학의 역사에서 분수령이 된 수많은 사건은 게임과 연관됐다. 소프가 룰렛의 비밀을 캐내려고 개발한 자그마한 컴퓨터는 50년 후 가장 흔한 형태의 컴퓨터가 됐다. 아이팟, 안드로이드 휴대폰, 애플 워치, 핏빗 같은 디지털 기기가 모두 직계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컴퓨터의 계보에는 놀이와 유희의 유구한 혈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리=임현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