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2)
고종이 조선의 제26대 임금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였습니다. 원래 미성년이 임금이 되면 대비가 발을 내리고 그 뒤에서 정치를 돕는 수렴청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비가 된 신정왕후는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섭정을 하게 했습니다. ‘대원군’이란 자신은 왕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 그 아버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조선의 대원군들 중 정치에 직접 나선 사람은 흥선대원군밖에 없으므로 보통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을 가리킵니다.
대원군, 안동 김씨·서원 축출흥선대원군이 가장 먼저 시작한 개혁은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땅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집안이나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당쟁의 근거지가 되는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서원은 지방에 있던 유학자들의 사설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서원을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파당을 만들고 다른 파당과 싸우는 일이 잦아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름 없는 세금과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 제도도 없애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한 일 가운데 가장 대담한 일은 양반들에게서도 세금을 거둬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평민은 세금을 내는데 상대적으로 더 부유한 양반들은 오히려 세금을 안 내는 모순된 일이 그때까지 당연시되고 있었지요.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세도 정치를 몰아내고 민심을 수습했으며 국가 재정도 늘려나가는 등 개혁을 펼쳤습니다.
당백전·통행세·쇄국정책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잘못한 일들도 있었지요.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 벌인 일들이 백성들의 삶에 무리를 준 것입니다. 우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돈을 만들어내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이라는 돈을 발행했는데 그 때문에 화폐 가치가 폭락해버렸습니다. 또 도성의 사대문에서 통행세를 거뒀고 주인의 허락도 없이 전국의 커다란 돌과 나무를 궁궐 짓는 자재로 거둬들여 백성의 원망을 사기도 했습니다.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6년 동안 8000여 명의 신자를 학살한 것도 그의 커다란 잘못이었습니다. 나라 안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것도 큰일인 데다 프랑스 등 서양의 국가들이 조선을 침략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지요. 미국은 신미양요를 통해, 프랑스는 병인양요를 통해 조선을 침략해 왔습니다. ‘양요(洋擾)’란 서양 사람들이 일으킨 소동이란 뜻입니다. 조선은 소동이라고 여겼지만 그들은 서로 거래를 터서 통상을 하자는 명분으로 침략해 왔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한 것입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갈등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 사이의 갈등도 조선이 국력을 하나로 모으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9세 때 부모를 여읜 고아였습니다.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명성황후를 선택한 사람이 바로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부모 형제도 없고 별로 대단치 않은 집안의 딸이 왕비가 된다면 외척의 세도 정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자기 집안 사람을 최대한 많이 끌어들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집안의 사람들, 고종의 형인 이재면, 유림의 대학자인 최익현 등과도 손을 잡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였기 때문에 유학자들은 그에 대해 무척 불만이 많았던 터입니다.
1868년 고종은 기다리던 왕자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첫 왕자의 어머니는 명성황후가 아니었습니다. 이씨 성을 가진 상궁이 먼저 아들을 낳은 것이지요. 왕비의 아들이 아니었지만 흥선대원군은 이 아이 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려 했습니다. 이때부터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최익현, 대원군 퇴진요구
1873년 최익현은 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우선 경복궁 중건 사업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된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이 22세로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흥선대원군은 물러나라고 요구했지요. 무엇보다 두 번째 이유를 거스를 명분이 없었던 흥선대원군은 10년간의 섭정을 마치고 물러났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났다고 고종이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민씨 집안 사람들이 조정을 장악했습니다. 그 무렵이던 1876년 일본군이 군함을 이끌고 조선의 바다에 들어와 대대적인 공격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나라의 문을 열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은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지만 대표적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민씨 일가는 흥선대원군과 달리 개방 정책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과도 잇달아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열강의 힘에 밀려 조선의 문을 세계로 향해 활짝 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