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3)
[한국 근현대사 공부] 최익현 '도끼상소'·임오군란·대원군 납치…조용한 날이 없었던 조선의 하루하루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인천항과 부산항, 원산항을 개방했습니다. 조선의 문이 활짝 열리자 여러 나라가 조선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가까이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는 물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저 멀리 큰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들까지 기다렸다는 듯 조선으로 모여들었지요. 그들은 겉으로는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교역을 원한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조선에 있는 자원을 독차지하여 헐값에 가져가거나 아예 식민지로 만들 기회를 노리고 접근한 것입니다.
대마도 최익현 유배지. 최익현은 을사조약 후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일본에 붙잡혀 갔고 대마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한경 DB
대마도 최익현 유배지. 최익현은 을사조약 후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일본에 붙잡혀 갔고 대마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한경 DB
개화와 외국의 침탈

고종은 정부 조직과 군대 조직을 개혁하고 선진 문물을 배워 들이기 위해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보냈습니다. 고종이 개화 정책을 펴는 과정에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온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개화의 바람이 침탈과 함께 불어닥치자 개화에 반발하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위정척사파였습니다. ‘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악한 것이란 서양 문물을 말하지요. 주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위정척사파와 서양 문명의 장점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개화파는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로 최익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던 사람이지요. 그는 1876년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 엎드려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른바 ‘도끼 상소’입니다. 상소를 올리는 데 도끼를 들고 온 이유는, 자신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일 것이고 혹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져온 도끼로 목을 치라는 의미입니다. 고종은 최익현을 흑산도로 귀양보냈지만 그 이후에도 위정척사운동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외세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은 1882년까지 미국과, 영국과, 그리고 독일과 연이어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선이 망국의 길에 본격적으로 접어든 것은 임오군란 이후입니다. 1883년에 일어난 임오군란부터 1904년 러일전쟁까지 정말 여러 가지 큰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요. 그 사건들의 결과 일본이 조선에서 최종적으로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조선에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승자였던 일본에 의해 조선이 왕조의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모래와 쌀을 섞어준 급료

대마도 수선사라는 절에 있는 최익현의 순국비.
대마도 수선사라는 절에 있는 최익현의 순국비.
임오군란은 ‘임오년에 군인들이 일으킨 난리’라는 뜻입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두 해 전 고종은 양반집 아들 100명을 선발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습니다. 신식 군대는 구식 군대에 비해 훨씬 좋은 대우를 받았지요. 같은 해에 구식 군대가 해산되었는데 남아 있던 군인들도 13개월 동안이나 급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뒤늦게 급료를 주었는데 그것도 한 달분밖에 안 주면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나눠줬답니다. 군인들은 당연히 분노했지요. 군인들은 급료를 나눠주던 관리를 때렸고 이 일이 폭동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크게 화가 난 군인들은 선혜청 당상이던 민겸호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민겸호는 고종의 외삼촌이었지만 명성황후에게는 친척 오빠뻘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민씨 집안 세도 정치의 중심 인물이었지요. 신식 군대 별기군을 만들었던 민겸호는 결국 임오군란 때 살해되었습니다. 부정부패로 군인들의 급료를 빼돌린 것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한 사건이 민씨 정권과 외세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상황이 되어버린 군인들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지원할 사람은 대원군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운현궁으로 몰려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기꺼이 군인들의 배후가 되어주었습니다. 민씨 집안 사람들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명성황후까지 잡겠다며 창덕궁으로 몰려갔습니다. 창덕궁에서 간신히 도망 나온 명성황후는 경기도 장호원에 몸을 숨겼습니다.

청나라 대원군 납치

사태를 수습한다며 궁궐에 들어간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죽었다며 국상을 발표했습니다. 명성황후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녀를 찾아 진짜 죽여도 상관없다는 뜻이 됩니다. 또 그녀가 살아 있다 해도 다시 궁궐로 돌아오기는 힘들어지겠지요. 고종은 왕비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가지고 장사지내도록 하였습니다. 대신들은 장례를 치르는 일이 급할 것 없다며 더 찾아보자고 했습니다.

“정말 더는 찾아볼 방도가 없다. 찾아내지 못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고종은 이렇게 말하며 장례를 지내라고 대신들을 재촉했습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권력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청나라에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갔기 때문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의 개방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 했는데 개방에 부정적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으면 방해가 될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 후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청나라는 본격적으로 조선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