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4)
[한국 근현대사 공부] 길 잃은 조선왕실과 조급한 개화파…3일 천하로 끝나버린 갑신정변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구식 군대를 지원했던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잡혀갔습니다. 이로써 고종은 아버지에게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았고 명성황후도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큰 난리를 겪으면 지배자들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요. 역사적으로 수많은 민란과 봉기가 있었고, 그중 성공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래도 사건 이후 권력자들의 반성과 개선의 노력, 민중의 깨달음이 조금씩이라도 있었기에 오늘날 같은 자유로운 세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정각 보춘정 =갑신정변 때 개화파와 고종이 혁신 정강을 만들던 관물헌 일대. 뒤에 보이는 관물헌에는 고종이 어린 시절에 쓴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성정각 보춘정 =갑신정변 때 개화파와 고종이 혁신 정강을 만들던 관물헌 일대. 뒤에 보이는 관물헌에는 고종이 어린 시절에 쓴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혼란 또 혼란…제물포 조약

그런데 조선의 왕실은, 왕비의 생사를 알 수 없어서 장례까지 치러야 하는 큰 난리를 겪고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난리가 진정되자 먼저 주동자를 잡아다 고문하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나 바람이 무엇인지 알려는 노력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데 골몰한 것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배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군란으로 공사관이 부서지고 일본 외교관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군함과 군대를 이끌고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에 와서 조선을 위협했습니다.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일본과 조약을 맺게 됐지요. 바로 ‘제물포 조약’입니다. 이 조약의 결과 조선은 5년 동안 50만원을 일본에 배상하고 일본이 자신들의 공사관에 군대를 두는 것을 허락해야 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이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더욱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3000명의 군사를 조선에 데려다 놓고 청나라의 황실을 배신하면 안된다고 협박했습니다. 정치와 외교를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보내서 조선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간섭했지요. 그럼에도 조선의 왕실은 청나라에 항의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청나라 덕분에 권력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우정총국(서울 종로구 안국동)=본관 앞에 서 있는 500년 이상 된 회화나무는 갑신정변을 비롯한 역사의 상처를 온몸 가득 담고 있는 듯하다.
우정총국(서울 종로구 안국동)=본관 앞에 서 있는 500년 이상 된 회화나무는 갑신정변을 비롯한 역사의 상처를 온몸 가득 담고 있는 듯하다.
“일본 메이지 유신처럼 개화”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조선의 개화파 인물들은 속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물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급속한 개화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에 기댄 수구파가 권력을 잡았으니 기대처럼 빨리 개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였지요. ‘수구(守舊)’란 말 그대로 풀이하면 ‘옛 것을 지키자’는 뜻입니다. 당시 수구파는 중국처럼 서서히 개혁을 해나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84년 드디어 개화파에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청나라가 군사 3000명 중 1500명을 베트남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때 청나라는, 베트남을 차지하려는 프랑스와 전쟁을 해야 했지요. 심지어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계속 지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일본은 개화파에 솔깃한 제안을 했습니다. 300만엔을 빌려주고 150명의 군대를 보내줄 테니 청나라를 몰아내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일본군 150명이면 청나라 군사 1500명을 물리칠 수 있다고 큰소리까지 쳤습니다.

1884년 10월17일, 이 날은 우정총국 건물을 완성한 기념식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우정총국은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우편 업무를 하기 위해 만든 관청이었지요. 이날 밤, 우정총국에서 기념 잔치가 끝나갈 무렵 담장 너머에서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보고 밖으로 뛰어나갔던 민영익이 괴한의 칼을 맞고 돌아와서 쓰러졌습니다. 민영익은 대표적인 수구파 인물이었습니다. 이 화재를 신호로 개화파는 수구파 인물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갑신정변입니다.

혁신 정강은 물거품이 되고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는 곧이어 경복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침전에 있던 고종에게 수구파와 청나라 군대가 난리를 일으켰으니 급히 몸을 피해야 한다고 속였지요. 고종은 이들을 따라 경우궁(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 피신했습니다. 일본 공사는 군사를 보내서 경우궁을 호위했습니다.

다음날 창덕궁 관물헌으로 돌아온 고종에게 개화파는 14개조의 혁신 정강을 내놓았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원군을 귀국시키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 조공을 폐지할 것(1조). 문벌을 폐지해 인민 평등의 권리를 만들고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2조). 국가에 해독을 끼친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5조). 일체의 국가 재정은 호조가 관할할 것(12조).

그러나 개화파는 이 혁신 정강을 끝내 발표하지 못했지요.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청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창덕궁을 공격한 것입니다. 명성황후는 먼저 북묘로 달아났고 곧이어 고종도 왕비가 있는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북묘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 부근에 있던 관우의 사당입니다.

사태가 불리해진 것을 알아차린 일본 공사는 개화파를 돕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10월19일, 김옥균 등 갑신정변의 주동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로써 정변은 실패로 끝이 났지요. 개화파가 권력을 쥐고 있던 시간은 단 3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갑신정변에 의한 개화파의 집권을 ‘3일 천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