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경제의 만남 (87)
요즘 여학생들은 어떤 장래 희망을 꿈꾸고 있을까? 2012년 실시된 청소년 희망직업 조사에 따르면 여학생들은 교사와 의사, 연예인 등을 미래의 직업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직업들이 근래 들어 갑자기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이뤄진 비슷한 조사에서도 여학생들의 선호 직업은 비슷하게 나타났고, 이보다 앞서 1994년의 조사에서도 교사와 의사, 연예인과 변호사 등이 상위 순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눈 뜨고 나면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고 또 사라지는 시대인 요즘이지만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직업은 십여 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1970~1980년대만 해도 상황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많은 여학생이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장래 희망으로 삼고 살았다. 심지어 미인대회에 나온 참가자들이 심사위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현모양처를 꿈으로 으레 대답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어진 어머니이자 착하고 좋은 아내를 뜻하는 현모양처는 얼마 전만 해도 많은 여성의 꿈이자 희망이었고 실제 그들의 미래 모습이었다. 즉, 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아가며 그들이 사회에 나아가 책임을 다하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뒷바라지하는 전업주부(full-time housewife)가 대다수 결혼한 여성들의 소임이자 운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사회와 여성들 스스로도 이러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이견을 달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현모양처로 대표되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인식이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요즘이다.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들의 대부분은 더 이상 현모양처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고 있다. 여성에 대한 교육의 기회가 늘어나고 그로 인해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또 사회 진출 후 보이는 여성의 역량이 남성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능가하면서 여성의 장래 희망 리스트에서 현모양처, 다시 말해 전업주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최근에는 여성들도 남성과 같이 학업을 마치면 직장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혹 현모양처나 전업주부를 꿈꾸는 여성이라도 있으면 “도대체 왜?”, “그것도 꿈이 될 수 있니?” 하고 의아하게 쳐다볼 정도의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런데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의아한 반응은 결코 틀리다고 할 수 없다. 장래 희망을 직업의 관점에서 묻는 것이라면 현모양처나 전업주부는 결코 직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업이라 함은 그 종류에 관계없이 사업이나 사업장에서 근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이나 봉급, 그 밖의 어떠한 명칭으로든 일체의 금품을 지급받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사업장이란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을 위한 행위나 활동이 이뤄지는 곳으로, 전업주부가 가사노동을 펼치는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은 사업장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집안일과 자녀의 육아와 교육 등을 주활동으로 하는 전업주부는 직업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통계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전업주부가 직업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연령대, 즉 만 15세 이상의 인구를 가리켜 ‘생산가능인구’ 또는 ‘노동가능인구’라고 한다. 이때 경제활동을 할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당장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현역 군인, 전투·의무경찰, 형이 확정된 교도소 수감자, 소년원 또는 치료감호소의 수감자 등은 노동가능인구에서 제외된다. 노동가능인구는 다시 일을 할 의사나 능력 여부에 따라 경제활동인구와 비경제활동인구로 구분된다. 이 중 경제활동인구(economically active population)는 만 15세 이상의 인구 중 돈을 벌기 위한 일에 이미 종사하고 있거나 직장을 구하기 위해 구직활동 중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취업자와 실업자를 합한 것이 경제활동인구인 셈이다.
한편 비경제활동인구는 취업자도 실업자도 아닌 사람들로, 현재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서 직장을 구할 의사가 없거나 일을 할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학업에 전념하고 있는 학생, 일을 할 수 없는 연로자나 장애인, 자발적 의지에 따라 자선사업이나 종교단체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 등이 속한다. 또한 일을 할 의지와 능력은 있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최근 4주간 구직활동을 하지 않은 구직단념자도 비경제활동인구에 속한다. 이와 더불어 가정에서 가사 또는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 역시 비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된다. 따라서 전업주부는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고 또 그럴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므로, 비록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그 길을 걷고 있다 할지라도 전업주부는 직업으로 인정받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전업주부가 가족들에게 제공하는 가사노동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가사노동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처리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 가족 구성원이 아닌 제3자에 의해 이뤄진다면 그 순간부터 가사노동은 사업장에서 만들어지는 서비스가 되어 경제활동이 되고 직업이 된다. 하지만 부인 또는 어머니에 의해 제공되는 가사노동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발적 헌신과 봉사가 되고 당연한 희생과 무보수 노동이 되고 만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이러한 말들로 폄하되어서는 안 되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를 지탱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노동력의 재생산과 인적 자본의 양성에도 가사노동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가사노동은 가정 내의 영역에만 그 영향이 미치는 사적 활동이라 하기 힘들고, 생산활동과 전혀 무관한 비경제활동으로 치부해서도 곤란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직까지 전업주부가 베푸는 가사노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보상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있다. 또한 가사노동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에도 자가소비를 위해 생산한 서비스라는 이유로 생산으로 인정하지도 GDP에 포함하지도 않고 있다. 게다가 가사노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제도, 규칙 등이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가사노동은 비경제활동으로 남을 것이고 전업주부는 정식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도 우리의 아내들, 또 어머니들은 특별한 휴가나 별다른 인센티브 없이 해도 빛이 나지 않는, 오히려 안할 때 빈자리가 커 보이는 무보수 가사노동을 가족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들의 희생과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가사노동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하루속히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비경제활동인구 = 만 15세 이상의 인구 가운데 취업자나 실업자가 아닌 사람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할 의사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비경제활동인구는 경제활동인구 조사기간 중 취업자도 실업자도 아닌 만 15세 이상의 인구, 예를 들어 집안에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 학교에 다니는 학생,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연로자, 장애인, 구직단념자나 취업준비생 등을 일컫는다. 통계청에서 조사·발표하는 실업률 통계는 경제활동인구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비경제활동인구는 실업 통계에서 제외된다.
정원식 < KDI 전문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