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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왕권과 신권의 대결은 조선체제의 불가피한 특성 숙종 주도 세번의 환국…권력·사상투쟁에 매몰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결은 태조 때부터 시작된 조선 체제의 불가피한 특성이었다. 관료이자 학자들 간의 권력과 사상 투쟁인 당쟁은 숙명이었다.환국(換局)은 일반적인 당쟁과 달리 국왕이 주도해 ‘국면 전환’, 즉 기존의 권력 집단을 빠르고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교체시킨 정변이자 친위 쿠데타다. 현종의 외아들이었던 숙종은 2명의 왕비와 빈들이 연관된 추악하고 비윤리적인 세 번의 환국을 일으켜 왕권을 강화했다.첫 번째는 1680년 일어난 ‘경신환국’이다. 13세에 등극한 숙종은 현종 때 벌어졌던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을 중용하고 외척에 의지했다. 그러나 6년 동안 정치를 경험한 그는 왕권을 강화하는 비상 조처를 취했다. 영의정인 허적이 궁중의 법도를 어기는 사소한 행동을 빌미로 자신의 장인을 훈련대장에 임명해 병권을 장악했다. 신속하게 영의정과 도승지, 삼사의 요직을 교체했다. 그 직후에 공교롭게도 남인들이 인조의 손자인 복창군 3형제와 반역을 도모한다는 고발 사건이 생기자 즉각 관련자들과 복창군 등 두 형제를 죽였다. 이어 영의정인 허적을 비롯해 윤휴 등 남인들을 죽이고 일부는 유배 보냈다. 그리고 최고의 성리학자로 대우받고 있는 송시열을 고향에서 불러올려 재등용시키면서 조정을 순식간에 서인으로 교체했다. 때마침 왕비가 죽자 서인의 딸인 인현왕후를 새 중전으로 맞이하면서 20세 청년왕은 친위 쿠데타를 이용해 전광석화처럼 권력의 틀을 바꿨다.두 번째는 1689년 일어난 ‘기사환국’이다. 역관 집안 출신으로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지만, 숙종의 어머니였던 명성왕후의 미움을 사 궁에서 쫓겨났다. 다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반인륜적 일이 생기고 사회 붕괴 가속됐지만, 적극 대응보다 공리공론으로 권력 투쟁 몰두

    사회는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고, 반인륜적인 일들까지 발생했다.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한 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시장에서 아이들, 부녀자들, 종들이 개돼지보다 못한 값으로 팔려나갔다.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건도 발생해 충청도에서 어미가 자식들을 삶아 먹은 사건을 구체적으로 보고한 일도 있다. 현종은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길러 노비로 삼는다는 법령을 공포했다.아사와 전염병으로 시신이 많아졌고 연고 없는 시신은 길거리에 버려져 파리들과 까마귀, 솔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성문 밖으로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시신과 함께 수레로 실려 나가기도 했다(현종실록). 또한 추위 때문에 무덤을 파고 시신의 옷을 훔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거기에다 도성 밖에 있는 관우사당(關王廟)의 사람 형상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이렇게 민심이 불안해지면서 몇몇 관리가 예측한 대로 도적이 나타났다. 유리걸식하던 백성은 관곡과 공물을 강탈했고, 도둑질에 가담했다. 금산에서는 유력한 지방 세력이 포수, 승려 수백 명을 모아 무주 적상산성의 군량곡을 겁탈하려고 모의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런 전대미문의 참상이 일어난 상황에서 정치권력과 학문권력을 독점한 조정의 사대부들은 어떤 자세로 어떤 정책들을 추진했을까?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정부가 세금을 받으며, 소수 특권층이 정치와 부를 독점할 때 내건 명분은 비슷하다. 능력자로 자연재앙을 예측해 예방 시설을 만들어 해결하며, 때로는 자기희생을 한다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美 대공황 키운 것은 글로벌 리더십 실종 때문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은?’과 같은 질문에 답하기 힘든 것은 아마도 인류사를 뒤흔든 대사건의 원인을 한두 가지로 꼽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설명이 엇갈린다.경기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장기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실물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화폐 요인 때문인지를 놓고 대립했다. 기원이 미국에 있는지 유럽에 있는지를 놓고도 논박을 거듭했다. 1920년대 기술 발전에 따른 대량생산 체제 도입과 대규모 실업 간 상관관계에 대한 의견도 엇갈렸다. 글로벌 경제가 동시에 대혼돈에 빠지게 된 치명적 약점이 국제자본주의 시스템의 본질에 있는지, 단순히 운영상 실수였는지를 놓고도 의견이 갈렸다.대공황의 원인을 짚은 경제학자들의 면면만 봐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급 거장들의 집합소라 할 만하다. 미국 금융정책 원인설(밀턴 프리드먼), 금본위제 오용설(라이어널 로빈스), 디플레이션 실책설(존 메이너드 케인스), 장기 정체설(앨빈 한센), 구조적 불균형설(잉바르 스베닐손) 등 ‘한가락’ 한다는 경제학자들은 한마디씩 경제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내놓은 것이다.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찰스 P 킨들버거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주장이다. 킨들버거 교수는 경제대공황 발생 당시 글로벌 지도력 부재를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1929년 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심각하며 장기적이었던 이유로 국제경제 시스템이 불안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불안정의 배경에는 글로벌 정치 리더십의 상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제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책무와 관련해 영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패전 후 돈값 추락…우표 사는 데 아파트 살 돈 필요

    역사적으로 독일은 돈이 휴지 조각이 돼버리는 것을 경험한 나라다. 그 여파로 유럽 재정위기가 몇 년째 계속되지만 독일은 여전히 물가 상승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돈 풀기를 거부하고 있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영국 파운드나 프랑스 프랑, 이탈리아 리라화에 비해 매우 안정돼 있었다. 하지만 패전으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패전에 따른 전쟁배상금 지급을 위해 대규모 재정적자가 불가피했고, 정부가 세금을 크게 올릴 것이라는 예상으로 민간자본의 해외 도피가 발생하면서 화폐가치 안정성이 크게 떨어졌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1파운드는 20마르크 선에서 교환됐지만 1918년 12월 파운드당 43마르크로 화폐가치가 추락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엔 파운드당 60마르크가 됐고, 그해 겨울엔 파운드당 185마르크까지 폭락했다. 이어 1923년 파운드나 프랑, 리라와 마르크화를 교환하기 위해선 외국 통화당 무려 1조 마르크가 필요했다. 전국의 133개 인쇄소에서 1783기의 인쇄기가 밤낮으로 돈을 찍어댔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기에 돈은 언제나 모자랐다.당시 달러 대비로 마르크화 가치 추이를 복기하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바이마르공화국의 화폐인 파피어마르크가 종이(파피어)라는 이름처럼 휴지 조각이 돼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 달러당 4.2마르크였던 마르크화 가치는 전쟁 이후 달러당 8.9마르크로 떨어졌고, 1920년 달러당 14마르크가 됐다. 불과 1년 뒤에는 달러당 64.8마르크로 하락한 뒤 1922년엔 달러당 191.8마르크로 추락했다. 1923년에는 ‘천문학’에서 쓰일 법한 단위들이 동원된다. 1923년 1월 7260마르크에서 4월 2만 마르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가뭄·돌림병 등 전례 없는 자연재앙 발생…경신대기근으로 100만명이 아사 추정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처참한 살육 현장을 겪은 조선 백성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양 난을 겪으면서 많은 농토가 유실되고, 노동력도 부족했던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에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인구의 4분의 1인 무려 100만 명의 아사자가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경신대기근은 세계적 소빙기 현상과 관련된 기후변화의 산물이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실록 등 사료를 보면 전례 없는 자연 재앙들이 발생했다.1670년 초봄부터 한양에 눈과 우박이 내렸고, 3월에는 평안도에 운석이 떨어졌다. 1670년 5월 4일 평양 감사인 민유중은 편지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금년 같은 가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국운이 걸려 있어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한여름인 7월에도 우박·서리·눈이 전국에 내렸고, 함경도의 피해가 제일 심각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9월에는 목사가 처참한 피해 상황을 보고하면서 남해안 지역의 식량 지급을 요청했다.(현종실록)다행히 정부는 신속한 조처를 취했다. 벼 등을 운반했고, 유배수들을 육지로 옮겼으며, 세금 감면과 특별 과거를 실시했고,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5월에 이르러서는 경기도를 시작으로 황충, 즉 메뚜기떼들의 공격이 극심했다. 7월 함경도에서는 황충과 함께 참새(黃雀) 1000만 마리가 들판을 덮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병충해들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떨었다.그러자 조정도 위기 상황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기근 대책을 모색하는 1670년 8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허적은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경성 백화점들 활황…외제 사는 조선인 수두룩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대중 잡지인 ‘별건곤’은 1929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경성우편국을 끼고 돌아서면 요지경 같은 진고개다. 하라다 상점에 들어서니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그래도 놀라지 말라. 반수 이상이 조선남녀다. ( … ) 미스코시에 들어가니 아래층은 음식과 과자를 팔고, 이 층으로 가니 거기는 일본 옷감뿐이더라. 삼 층에 가니까 장난감, 학용품, 아동복, 치마감이 있다. 길거리에 나서니 진고개 2정목, 3정목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나는 조선 부인들….”1920~1930년대 당시 경성의 번화가인 혼마치(서울 명동 근처)에선 거리를 구경 다니는 혼부라(혼마치와 어슬렁거리다의 합성어)가 득시글거렸다. 백화점 구경을 즐기는 주 고객인 여성과 학생에 대한 당대 언론인들의 시각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별건곤’은 “조지야 하라다 상점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이라며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 게 아니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했다. “미스코시, 오복점(기모노점)이 또 낙성되었으니 제일 기뻐할 이는 조선 여학생일 것 같다”며 “어쨌든지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인가보다”라는 비꼼과 함께.당시 ‘모던 걸’(물론 ‘모던 보이’도)은 사회에서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혼마치 상가의 구매자로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당대인의 묘사와 평가도 늘어난다.이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왕과 양반들, 북벌론에도 모화사상 못 벗어나…청나라 요청으로 파병…'나선정벌'로 변질돼

    인조 때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박연)는 귀화해 무기 제조 등에 참여했다. 이어 표착한 동인도회사의 직원 하멜 등도 군기 개발에 참여했고, 효종도 활용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난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헤이룽강(아무르강) 일대에 진출해 부가가치가 높은 담비 가죽을 비롯한 모피 등의 자원을 획득하고, 식민단을 정착시켜갔다. 청나라도 북진하면서 북만주의 삼림과 헤이룽강 상류의 다구르족, 예벤크족 등 소수 종족과 전투를 벌였다.따라서 헤이룽강 일대에서 청과 러시아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면전은 고사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전술적인 공격조차 불가능했다. 더구나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을 뿐 모화사상은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과 양반 사대부라 해도 정치생명과 직결된 모험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없다. ‘북벌론’은 명분과 윤리라는 관점에서는 시대의식과 필요한 행위일 수 있지만 실천이 아닌 명분상의 자존심 회복, 정권 안정이라는 내부용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훗날 숙종과 대원군처럼 망상과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선례를 남겼다.가정해 본다. 만에 하나 북벌론이 추진됐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수많은 백성이 살육되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어쩌면 독립마저 상실하고 청 제국의 일개 성(省)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역사에서는 때때로 우연이 발생한다.북벌 준비는 ‘나선 정벌’이라는 기묘한 사건으로 변형됐다. 러시아와 전투를 벌이며 패배하던 청나라는 북벌론으로 강해진 조선군의 화포 등 무기 수준을 시험하고,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효종과 서인들의 실천 의지에 의구심 생기는 북벌론 국론 통일에는 효과적 수단…추후 나선정벌로 연결돼

    효종의 ‘북벌론’은 비록 꿈이었을지라도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이성계는 1388년 음력 5월 하순, 압록강가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탄 말의 눈빛과 꼬리짓, 울음소리는 어땠을까. 이후 이종무가 1419년 잠시 대마도에 발을 디뎠고, 세종 때 김종서와 최윤덕은 멀리서 그림자만 봤을 뿐이다. 이후 조선은 ‘남정북벌’을 꿈꾼 적은 없다. 한정된 인식과 무능함, 현실에 안주하는 습성 때문이었다.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에 포위된 채 울음을 터뜨린 인조는 포로로 끌려가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냉대하고 그의 가족을 멸한 뒤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정책기조로 삼고, 실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과 추진했다. 왕을 방어하는 어영청군을 강화해 수도에 상주시켰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군도 재정비했다. 기병전에 대비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기병을 재편했고, 신병기들을 제조했다. 북벌론의 실상효종의 ‘북벌론’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첫째, 효종을 비롯한 서인 일파들은 정말로 실천할 의지가 있었을까.함께 포로생활을 겪었지만 소현세자는 조선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위해 청을 학습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효종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대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인은 국력과 국제관계의 실상을 외면했고, 전쟁의 참상과 백성의 희생을 가볍게 여긴 죄로 역사와 백성에 책임져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반청정책과 자주성의 표방은 피해의식과 복수심, 자주라는 감성을 이용해 정책적인 과오를 반전시키고 면피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와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재야의 거두이자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