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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나라들 세금 더 걷자 주민들 대탈주…경제 상황은 더 나빠졌죠
스페인은 1556~1696년 사이에 14차례에 걸쳐 채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행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557년 카를 5세는 바야돌리드 칙령을 통해서 장기 국채인 후로스의 금리를 5%로 동결했다. 그런데도 1562년 스페인 왕실은 1년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43만 두카트를 국가부채의 이자를 갚는 데 써야만 했다. 스페인 정부는 오늘날 미국 정부가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 전략으로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미국 중앙은행이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대신 단기 국채를 내다 팔아 장기 금리를 낮추는 정책)’ 정책을 쓴 것처럼 단기융자 채무인 아시엔토스를 장기 국채인 후로스로 전환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하지만 1625년 최고조(1240만 두카트)에 달한 아시엔토스 규모가 1654년에는 100만 두카트로 줄어들면서 재정정책을 쓸 수단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결국 국채 만기 연장이나 반강압적인 국채금리 인하, 금 가격 인상 등으로 대응해도 한계에 다다르면 부도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스페인 정부가 완전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만 따져 봐도 1575년, 1576년, 1607년, 1627년, 1647년 등에 이른다.근대 초기 프랑스도 정기적인 채무불이행 국가 중 하나였다. 앙리 4세는 “대금업자들을 스펀지처럼 쥐어짰다”는 평을 들었지만 빌린 돈을 갚는 데는 모범적이지 않았다. 앙리 4세 이후 프랑스 국왕들도 줄줄이 금융업자들에겐 큰 구멍이었다. 프랑스 왕정은 1559년, 1598년, 1634년, 1648년, 1661년, 1714년, 1721년, 1759년, 1770년, 1788년에 빚을 갚지 않고 ‘펑크’를 냈다.스페인과 프랑스 등에선 채무불이행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행보였다. 전쟁을 위해 돈을 빌리고,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리려 하지만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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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에 둘러 쌓인 한양…무역·개방적 국제도시로 발돋움엔 한계 있어
한양은 서해와 백두대간을 잇는 한강 수로망을 이용해 쌀 같은 특산물의 세금을 받아들이는 조운체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소작료, 땔감과 공공건축에 사용될 재목, 소금, 생선 등을 보급받았다. 한반도는 지형이 험한 데다 적의 침공 속도를 늦추려고 넓은 도로를 건설하지 않았으므로 한강 수로망에 크게 의지했다. 한양의 한강가에는 20여 개 나루터가 있었고, 몇 곳에는 창(창고)이 존재했다. 바다에서 올라온 곡식 등의 물품은 광흥창(서강), 상류에서 내려온 물산은 군자강창에 보관했다. 그러나 규모나 시설, 역할 등으로 보아 상업항 기능은 못했고, 개경과 비교하면 해양무역과 연결되는 항구의 역할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한양의 한계와 신수도 건설 시기에 대한 의문한양은 지식관료들의 수도, 방어적인 약소국의 수도로는 적합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국가 산업과 상업, 무역을 발전시키는 경제도시, 개방적인 국제도시의 역할을 하려면 시설을 보완하고 도시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했다. 사대문, 사소문과 연결된 육로를 확장하고 신도로를 개설해서 사통팔달하게 만들어야 했다. 한강에는 자연 나루터가 아닌 부두를 신축하고, 창고 시장 등의 시설을 보완해 항구들을 개발해야 했다. 청계천을 계속 준설해 수로망으로 활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처럼 용산강에서 남대문까지도 수레길이나 운하를 건설해야 했다. 외곽 도시들, 특히 인천(능허대), 김포, 강화 등에 항구도시들을 개발해 한양과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했다. 또 강변방어체제를 촘촘하게 쌓고 강상수군도 양성해야 했다.그런데 한양의 기본 구조와 역할은 천도 초기의 불가피한 급박한 상황이 지난 후에도 큰 변화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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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혁명세력들, 천연 요새인 한양으로 천도 단행…성리학 이상 실현할 공간의 재구성 필요했죠
조선 건설 세력은 왜 서둘러 천도를 결정하고, 한양을 수도로 선택했을까. 수도 선택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백성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이다. 세계 역사에는 수도를 잘못 선택해 멸망한 나라들이 많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러한 예들이 있다.이성계, 정도전, 승려 무학 등 조선을 건설한 이들의 천도 결정은 조선의 백성과 역사,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신세력은 개경 지역에 토대를 둔 구세력과 권력, 토지 및 자원 확보, 상업권, 그리고 명분과 정통성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개경은 왜구에 여러 차례 위협당했고, 홍건적에 점령당한 적이 있어 방어상에 취약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도전 등 성리학자들은 이상을 실현할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천도는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도시의 체계와 성립 조건수도의 조건은 무엇이었으며, 왜 한양을 선택했을까. 수도의 위치와 체계는 정치·군사·경제·문화·사상 등의 요구에 부응해 선택되고 형성된다.첫째, 교통과 통신망이 발달한 정치와 외교 중심지로 중앙 집중화와 관리체제의 일원화에 효율적이어야 한다.둘째, 전 근대에는 모든 권력과 기능이 수도로 집중되는 만큼 안전한 방어공간의 확보가 필수적이다.셋째, 물자의 집결이 편리해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고 경제중심지 역할에 효율적이어야 한다. 아테네 등 폴리스나 중국의 난징·카이펑·항저우·베이징, 일본의 오사카·에도 등은 수도이면서 상업도시, 항구도시였다.넷째, 중요한 문화의 생산지와 집결지이며, 소비지(수요)이면서 공급지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 신앙의 중심이고, 사상적인 의미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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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영국·프랑스·스페인 왕가 빚 안갚으려고 돈 빌려준 사람 감옥에 잡아넣기도 했죠
서양사회에서 국가부채의 채무불이행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배 째라’ 식의 완전한 채무불이행은 중세 및 근대 초기에 군주들이 채무상환 비용이 재정 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하자 흔히 쓰던 방법이었다.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1340년대에 이런 방법으로 당시 이탈리아의 금융 ‘거인’인 바르디 가와 페루치 가를 쓰러뜨렸다. 15세기 프랑스 자본가로 왕실 군대에 갑옷과 무기를 제공하고, 왕실 창고와 가구창고 등 축재와 관련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을 댔다는 자크 쾨르는 샤를 7세가 채무불이행을 단행하자 가장 큰 피해를 본 희생양이 됐다. 샤를 7세는 백년전쟁으로 피폐해진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해 자크 쾨르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 돈을 갚지 않으려고 쾨르를 투옥해버렸다. 동시에 그는 제노바 자본가들도 위기에 몰아넣었다.스페인 펠리페 2세는 부도 선언을 통해 푸거 가문을 뿌리째 흔들었다. 푸거 가의 대출금은 1510년 20만 플로린에서 16세기 중반 500만 플로린을 넘어설 정도로 급증했지만,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순식간에 900만 플로린 이상의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푸거 가의 자본수익률도 1520년대에는 50%를 넘었지만 1550년대 5.5% 수준으로 떨어졌고, 1560년대에는 순손실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펠리페 2세 국가부채 4배 늘려펠리페 2세 시절 스페인 재정을 복기해보면 국가 예산이 얼마나 위태위태하게 운영됐는지를 알 수 있다. 1562년 카스티야 후로스(장기국채) 이자 지급으로 50만두카트, 플랑드르 후로스 이자 지급으로 30만두카트가 지불됐다. 여기에 아라곤(5만두카트), 시칠리아(15만두카트), 밀라노(20만두카트), 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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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스페인선 물가 폭등때문에 저축하는 사람 줄었죠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스페인 사람들은 1550년대에 15만 명에 달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대량 유출이었다. 동시에 식료품 가격이 급등했다. 당대의 스페인 농학자 알론소 데헤레라는 “양고기 1파운드 가격이 예전 양 한 마리 가격에 육박하고, 빵 한 덩이가 밀 1파네가(17.21킬로그램)와 가격이 같다”며 “기름 1파운드(0.4535킬로그램) 가격이 예전 기름 1아로바(12.5킬로그램) 가격 수준”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이웃 프랑스 국왕인 샤를 9세도 1560년에 “선대에는 매일 먹을 고기가 넘쳐났고 와인이 물처럼 흘렀지만 지금은 값이 올라 구하기 힘들다”고 푸념했다. 동유럽 폴란드에서도 비슷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이런 배경 아래 미셸 모리노 같은 학자는 17세기에 16세기보다 귀금속이 유럽에 더 들어왔는데도 17세기에 인플레이션이 완화됐고, 18세기에는 브라질의 금과 멕시코의 은 등 다량의 귀금속이 들어왔는데도 물가 상승이 심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귀금속 대량 유입에 따른 물가인상설에 이견을 제시하기도 했다.아무튼 갑작스럽게 유입된 부(富), 그것도 인디오 노예 노동이라는 남의 손을 빌려 값싸게 얻은 재화라는 외부 환경 변화는 잠재돼 있던 인간의 욕망을 건드렸다. ‘게으름’이라는 존재를 당당하게 수면 위로 부각시킨 것이다. 포토시 은광에서 전대미문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규모로 은이 계속해서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낙관에 빠졌다. “오늘 돈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일 남미에서 돌아온 함대가 세비아에 정박하기만 하면 다시 엄청나게 풍족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계획을 세우고, 저축하고, 힘들여 일할 까닭이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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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조선의 설계자 '핵심 브레인' 정도전…성리학 중시하며 산업 억제정책 펼쳤죠
신진사대부는 성균관과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치른 학자적 관리들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비판의식이 강한 이상주의자로, 야망을 실현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도전과 같이 신분이 한미하거나,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중소 토지만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기득권에 막혀 중간 관료에 머물렀다. 따라서 권문세족과 기존 질서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력이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해 세력을 이룬 이들은 ‘내우외환’이라는 고려 사회의 위기를 통감했다. 따라서 개혁이라는 뜻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위기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과 학문적인 기반, 가계의 차이 등으로 점차 입장에 차이가 생겨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됐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서 최영이 죽고 우왕이 쫓겨나자 온건파의 위기감은 최대치로 증폭됐다. 결국 두 세력은 권력투쟁을 벌였고, 온건파의 대표였던 정몽주는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이색·길재 등을 비롯해 ‘두문동 72인’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다가 숙청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정도전이 추진한 혁명의 내용과 성격3단계는 건국에 성공한 이들이 사회를 개혁시키는 혁명 과정과 권력투쟁이다. 급진 개혁파는 다시 두 부류로 분열됐다. 하나는 힘을 장악한 이성계 이방원 등의 무장과 조준 같은 학자들이었다. 또 하나는 왕조 창업의 실질적 주역이자 혁명 이론과 정책의 근본 틀을 다진 정도전 중심의 강성 개혁자들이었다.정도전은 학식이 뛰어나고,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장량을 자처할 정도로 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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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려 지키자 vs 새 나라 세우자, 둘로 갈린 개혁파…이성계·정도전 등 급진파, 온건파 숙청 후 조선 세워
조선의 건국에는 ‘역성혁명’이란 수식어구가 따라붙는다. 왕조의 개창은 혁명에 해당할 수 있는 대사건이다.우리 역사에는 혁명에 해당하는 사건이 많지 않았으므로 정의와 개념, 평가에 대해 공감할 만한 기준이 없다. 혁명은 꼭 필요한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추진해야 하는 걸까. 성패의 기준은 무엇이며, 책임은 어느 단계까지 져야 하는 걸까.고구려 건국은 정권 교체나 새 나라의 건국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중국적인 질서와 구시대를 타파한 후 신체재와 원조선 문화의 회복을 실행한 혁명이다. 주몽이 선언한 ‘다물(옛 땅을 수복한다는 고구려말)’의 의미는 그것이다. 왕건의 고려 건국 또한 정변을 넘어 사회체제의 전면적인 변혁을 가져온 혁명이다. 그렇다면 ‘역성혁명’이 따라붙는 조선의 건국은 어떤 혁명이며, 성패와 공과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3단계로 보는 조선의 건국 과정조선의 건국 과정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1단계는 위화도 회군과 개혁파들의 등장이다. 고려 말은 원나라의 압박과 친원파의 발호, 그들과 결탁한 권문세족들의 부패로 인해 이미 붕괴가 많이 진행된 상황이었다. 체제 불안이 심각했고, 민란도 발생했다. 대다수가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했고, 명분도 충분했다. 이에 공민왕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문제는 외부상황이었다.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북원의 침략과 명나라의 간섭은 고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홍건적들이 대거 국경을 넘어 개경이 함락당하는 지경이었다.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들의 침입은 전 해안 지역에서 창궐했다. 국가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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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스페인, 남미에서 금과 은 대규모로 들여왔지만…대부분 사치품 구입과 화려한 건물 짓는데 사용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흥청망청 들여온 금과 은 덕분에 스페인은 무적함대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출 수 있었고, 최고의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 화려한 성당과 수도원을 건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귀금속의 유입은 스페인 경제를 한 단계 비약시킬 수 있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은의 대량 유입으로 스페인에 형성됐던 상업과 산업발전에 적합한 여건은 1550년대를 넘어서면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스페인이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썼음에도 스페인에 유입된 은은 순식간에 이베리아 반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펠리페 2세 궁정의 재무관은 “마치 스페인이 서인도제도의 조그만 나라인 것처럼 은이 유출되고 있다”고 한탄했다. 스페인을 빠져나간 은은 빌바오를 통하든지 아니면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거쳐 앤트워프나 잉글랜드 등 북부 유럽 지역으로 흘러갔다.그나마 쓸 수 있는 방대한 자원도 생산적인 곳에 투입되지 못했다. 대부분 부질없는 대외 전쟁 비용이나 대외 교육 수지 적자를 보전하는 데 쓰였다. 사치품을 사거나 허영을 반영한 건물을 짓는 데도 큰 돈이 쓰였다. 이렇게 된 원인으론 스페인이 제조업 제품을 생산하는 국가였다기보다는 원재료를 수출하는 경제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식량 구입도 외부에 의존해야 했다.이 시대 스페인에서 중산층이 매우 희박했다는 점도 이런 현상을 가속화했다. 카스티야 지역에서 일부 양모 거래 등으로 성장한 상인 계층이 있었지만 시몬 루이스 같은 일부 예외적인 상인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상업세력이 크게 미약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제노바 상인 가문 중 시몬 루이스보다 더 큰 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