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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대로 전해져 온 '한민족 삶의 지침' 단군신화…인본주의·생명주의 품은 가치 높은 유산이죠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집단이 자기 사상이나 고유종교가 희미한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는 생활문화에서 전통의 흔적이 잘 안 보이는 현상은 어찌 된 일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자의식이 부족하고, 창조보다 모방을 선호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자유의지가 약해지고, 남에게 습관적으로 구속당하는 것이 역사인데 말이다.문화가 풍성하고 뛰어나려면 적극적인 교류와 능동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특히 21세기는 시공의 한계가 희미해지고, 하나의 ‘장(field)’에서 문화의 보편성이 급팽창되는 추세여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하지만 교류와 수용에는 최소한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첫째, 교류의 방식이다. 충돌과 갈등(새뮤얼 헌팅턴)인가, 협력과 공존(표트르 크로포트킨)인가? 문명의 발생 이후 끝없는 논쟁거리다. 그런데 현재도 그렇지만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 주인과 종속이라는 나쁜 관계가 더 많았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다른 집단과 만나는 방식은 명분과 이상이 아니라 현실과 힘을 갖추고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공평하다. 그렇다면 생활의 편의나 소수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양적 팽창보다는 삶의 본질과 다수의 이익을 구현하는 질적 성숙이 중요하다.둘째, 주체와 객체의 구분과 역할이 분명해야 한다. 이는 일부의 오해처럼 자존심이나 명분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수용의 주체인 토대의 문화, 사람 등은 양적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현실의 문제점과 해결 방법을 간파하는 경험과 능력도 더 많다. 그런데 현실과 상황을 잘 모르는 외부 세력이 정치력, 군사력, 경제력, 심지어는 문화력까지 동원해 교류를 주도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발트해 소금 교역 주도한 네덜란드…한자동맹 제치고 세계 무역 강자 됐죠

    17세기 세계 경제사의 ‘승자’는 네덜란드였다. 그리고 그 성공의 배경에는 ‘소금’이 있었다.조너선 이스라엘 런던대 교수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7세기 초중반 세계 무역을 주도하면서 다른 경쟁자들이 ‘잃어버린’ 교역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글로벌 교환 시스템이라는 계서제 사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게 네덜란드였다. 사실상 일극체제의 허브로서 세계 유일의 물자창고 역할을 했다.네덜란드가 국제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5세기 후반 발트해 교역에서부터다. 원래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 발트해 주변 지역은 필요한 소금을 북독일이나 폴란드의 암염광산에서 생산된 것을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사용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부터 발트해의 소금 교역은 네덜란드인의 주무대가 되고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 도시들의 북해 주도권은 끝나게 된다. 채굴하기 어렵고 운반도 힘든 독일산 암염에 비해 양질의 바닷소금을 대량으로 운반한 네덜란드인들이 한자동맹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네덜란드인들은 서프랑스와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바닷소금을 공급하며 부를 쌓았고, 이어 프랑스산 와인 등으로 교역 품목을 확대했다. 벌크선을 통한 각종 화물 교역도 점차 늘려나갔다.이 같은 성공가도에 네덜란드의 조선업 경쟁력도 한몫했다. 16세기 후반 들어 네덜란드 선박은 화물 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경쟁국인 영국 배가 중무장한 채 사람을 많이 태우고 지중해를 가는 목적으로 튼튼하게 건조되는 데 중점을 뒀다면, 네덜란드 선박은 최소의 선원으로 최대의 경제효과를 얻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는 곧바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정치의 근본은 '백성의 유복한 생활'임을 안 세종…농업 기술개발에 힘쓰고 세금 공평하게 내게 했죠

    세종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장비를 만들고, 무기를 개량했다. 1448년 신기전이 발명됐는데, 한 번에 15발씩 연속으로 100발을 발사할 수 있고 사거리가 1000m 이상인 신병기였다. 수레 등으로 운반이 가능한 조립식 대포(총통 완구)를 만들고 화포 주조와 화약 사용 방법, 규격 등을 그린 《총통등록》도 발간했다. 해전을 위해 일본인과 유구인의 도움을 받아 개선한 선박을 한강에서 시험운행했다.‘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고 했던 태종의 평가처럼 뛰어난 전제군주라고 볼 수 있지만, 세종은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대지주인 신하들 반대 무릅쓰고 조세공평화세종은 백성들의 생활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착취경제가 아닌, 생산경제의 도입을 시도했다. 정치의 근본은 백성들의 유복한 생활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인본주의자였다. 농법 개량에 노력을 기울여 1429년에는 농사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농사직설》을 편찬했다.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비록 통치기술로도 활용했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 강했다. 1433년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이듬해에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1442년부터는 측우기를 사용, 전국의 강수량을 골고루 측정해 농사에 도움을 줬다.그는 조세를 감면하는 정책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전국의 토지를 풍흉(豊凶)에 따라 9등급(연분 9등법)으로, 비옥도를 검사해 6등급(전분육등법)으로 나눴고 20년마다 재측량했다. 이렇게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하는 일은 당연히 대지주인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7년 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즉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소빙기 흉년으로 기근 이어지고 전염병까지 돌자…독일 등 타격 큰 중부유럽서 마녀사냥 광풍 불었죠

    17세기 초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가장 격렬하게 발생한 곳은 독일지역이다. 당시 독일에는 8000만 유럽 인구의 5분의 1이 살고 있었지만 유럽 대륙에서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희생자의 절반가량이 이 지역에서 생겼다. 1631년 프리드리히 슈페라는 독일인은 “독일에는 마녀 어머니가 너무나 많다”는 말로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마녀와 관련된 문제에 천착해온 볼프강 베링거 교수는 중부 유럽이 마녀 박해의 중심지가 된 이유로 16세기와 17세기 초의 환경위기를 거론한다. 소위 ‘소빙기’가 닥치면서 인구 밀도나 거주 구조, 농업 구조 같은 사회 문화 인프라와 경제 기반이 가장 취약했던 독일이 큰 타격을 입게 됐다는 설명이다. 지중해 유역과 기타 해안지역은 기온 하강의 영향이 크지 않았지만 주민들이 밀집해 있던 유럽 대륙의 내륙지역은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이웃과의 사회적 갈등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환경 요인은 이웃을 마녀로 의심하고 몰아붙이는 구조적 문제로 이어졌다. 위기의 책임을 공동체 약자에게 돌려이는 농업사가 빌헬름 아벨의 연구에서도 방증되는데, 1670년 기아위기(Hungerkrise)에 관한 연구에서 중부 유럽의 물가 상승은 서유럽이나 남유럽 도시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소빙기란 자연 위기 상황에서 날씨가 추워지고 우박 서리 등의 피해는 증가하고, 여름이 짧아지면서 자연스레 흉년이 늘어 농업 생산량이 축소된 영향이 컸다. 흉년이 자주 반복되면서 식량 부족이 다시 기존 사회질서의 존속을 위협하는 사회적 긴장을 키우는 악순환이 됐다. 주민들의 영양 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모든 책임이 ‘마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집현전 설치해 젊고 뛰어난 학자들 등용, 건국세력 대체…정치의 세대교체 추진했죠

    역사에서 천재가 등장할 때 사회는 급변하고, 동시대 사람들은 그 덕분에 풍족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역사의 천재’란 어떤 성격과 능력을 갖췄을까. 이들은 머리가 좋고,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과 현상의 불확실성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졌다. 더불어 모든 사람을 아끼고, 시대와 자연까지 돌보는 마음씨를 지녀야 한다. 나아가 타인과 조직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단군, 고주몽, 김춘추, 왕건, 이순신 등은 우리 역사의 천재들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그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세종대왕 이도(李)는 1397년 태어나 1418년 6월 갑자기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의 선택으로 두 달 만에 4대 임금이 됐다. 피비린내와 풋내를 벗지 못했던 조선은 세종대왕이 즉위한 1418년부터 과로와 당뇨병으로 운명한 1450년까지 32년 동안 질적으로 변신했다. 고려를 없앤 명분과 조선을 존속시킬 힘을 동시에 얻었다.불가사의하다. 그의 업적을 보면 한 인물이, 한 시대에 이렇게 의미 깊고 다양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다. 그를 역사의 천재로 만들었을 시대 상황, 정책에 참여한 인물, 업적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본다. 세종대왕을 정치인의 관점에서 살펴보자.첫째, 젊은 임금은 야망과 집권 의지를 가진 건국세력을 견제하면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정원을 강화하고, 도승지(비서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반대를 무릅쓰고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해 젊고 실력이 뛰어난 학자들로 신권력집단을 양성했다.둘째, 성리학을 활용해 ‘성(性)’과 ‘법’, ‘률’로 합리적인 국가 체제의 토대를 완성했다. 귀족, 무신, 권문세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나라들 세금 더 걷자 주민들 대탈주…경제 상황은 더 나빠졌죠

    스페인은 1556~1696년 사이에 14차례에 걸쳐 채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행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557년 카를 5세는 바야돌리드 칙령을 통해서 장기 국채인 후로스의 금리를 5%로 동결했다. 그런데도 1562년 스페인 왕실은 1년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43만 두카트를 국가부채의 이자를 갚는 데 써야만 했다. 스페인 정부는 오늘날 미국 정부가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 전략으로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미국 중앙은행이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대신 단기 국채를 내다 팔아 장기 금리를 낮추는 정책)’ 정책을 쓴 것처럼 단기융자 채무인 아시엔토스를 장기 국채인 후로스로 전환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하지만 1625년 최고조(1240만 두카트)에 달한 아시엔토스 규모가 1654년에는 100만 두카트로 줄어들면서 재정정책을 쓸 수단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결국 국채 만기 연장이나 반강압적인 국채금리 인하, 금 가격 인상 등으로 대응해도 한계에 다다르면 부도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스페인 정부가 완전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만 따져 봐도 1575년, 1576년, 1607년, 1627년, 1647년 등에 이른다.근대 초기 프랑스도 정기적인 채무불이행 국가 중 하나였다. 앙리 4세는 “대금업자들을 스펀지처럼 쥐어짰다”는 평을 들었지만 빌린 돈을 갚는 데는 모범적이지 않았다. 앙리 4세 이후 프랑스 국왕들도 줄줄이 금융업자들에겐 큰 구멍이었다. 프랑스 왕정은 1559년, 1598년, 1634년, 1648년, 1661년, 1714년, 1721년, 1759년, 1770년, 1788년에 빚을 갚지 않고 ‘펑크’를 냈다.스페인과 프랑스 등에선 채무불이행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행보였다. 전쟁을 위해 돈을 빌리고,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리려 하지만 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에 둘러 쌓인 한양…무역·개방적 국제도시로 발돋움엔 한계 있어

    한양은 서해와 백두대간을 잇는 한강 수로망을 이용해 쌀 같은 특산물의 세금을 받아들이는 조운체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소작료, 땔감과 공공건축에 사용될 재목, 소금, 생선 등을 보급받았다. 한반도는 지형이 험한 데다 적의 침공 속도를 늦추려고 넓은 도로를 건설하지 않았으므로 한강 수로망에 크게 의지했다. 한양의 한강가에는 20여 개 나루터가 있었고, 몇 곳에는 창(창고)이 존재했다. 바다에서 올라온 곡식 등의 물품은 광흥창(서강), 상류에서 내려온 물산은 군자강창에 보관했다. 그러나 규모나 시설, 역할 등으로 보아 상업항 기능은 못했고, 개경과 비교하면 해양무역과 연결되는 항구의 역할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한양의 한계와 신수도 건설 시기에 대한 의문한양은 지식관료들의 수도, 방어적인 약소국의 수도로는 적합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국가 산업과 상업, 무역을 발전시키는 경제도시, 개방적인 국제도시의 역할을 하려면 시설을 보완하고 도시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했다. 사대문, 사소문과 연결된 육로를 확장하고 신도로를 개설해서 사통팔달하게 만들어야 했다. 한강에는 자연 나루터가 아닌 부두를 신축하고, 창고 시장 등의 시설을 보완해 항구들을 개발해야 했다. 청계천을 계속 준설해 수로망으로 활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처럼 용산강에서 남대문까지도 수레길이나 운하를 건설해야 했다. 외곽 도시들, 특히 인천(능허대), 김포, 강화 등에 항구도시들을 개발해 한양과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했다. 또 강변방어체제를 촘촘하게 쌓고 강상수군도 양성해야 했다.그런데 한양의 기본 구조와 역할은 천도 초기의 불가피한 급박한 상황이 지난 후에도 큰 변화가 없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혁명세력들, 천연 요새인 한양으로 천도 단행…성리학 이상 실현할 공간의 재구성 필요했죠

    조선 건설 세력은 왜 서둘러 천도를 결정하고, 한양을 수도로 선택했을까. 수도 선택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백성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이다. 세계 역사에는 수도를 잘못 선택해 멸망한 나라들이 많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러한 예들이 있다.이성계, 정도전, 승려 무학 등 조선을 건설한 이들의 천도 결정은 조선의 백성과 역사,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신세력은 개경 지역에 토대를 둔 구세력과 권력, 토지 및 자원 확보, 상업권, 그리고 명분과 정통성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개경은 왜구에 여러 차례 위협당했고, 홍건적에 점령당한 적이 있어 방어상에 취약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도전 등 성리학자들은 이상을 실현할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천도는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도시의 체계와 성립 조건수도의 조건은 무엇이었으며, 왜 한양을 선택했을까. 수도의 위치와 체계는 정치·군사·경제·문화·사상 등의 요구에 부응해 선택되고 형성된다.첫째, 교통과 통신망이 발달한 정치와 외교 중심지로 중앙 집중화와 관리체제의 일원화에 효율적이어야 한다.둘째, 전 근대에는 모든 권력과 기능이 수도로 집중되는 만큼 안전한 방어공간의 확보가 필수적이다.셋째, 물자의 집결이 편리해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고 경제중심지 역할에 효율적이어야 한다. 아테네 등 폴리스나 중국의 난징·카이펑·항저우·베이징, 일본의 오사카·에도 등은 수도이면서 상업도시, 항구도시였다.넷째, 중요한 문화의 생산지와 집결지이며, 소비지(수요)이면서 공급지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 신앙의 중심이고, 사상적인 의미도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