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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성리학자 권력집단으로 변질하며 신분제 고착화…상공업 퇴조, 쇄국정책으로 국제 교류도 사라져
조선은 농업 위주의 정책을 강행했다. 벼농사는 식량을 제공하는 근간산업이며 낮은 산들과 들판, 길고 느린 강물이 발달한 자연환경에 적합한 산업이었다. 조세를 징수하고 백성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데도 편리했다. 조선은 농민들을 법령으로 토지에 묶어두면서 실질적으로 주거 이전의 자유를 빼앗았다. 반면 공업과 상업, 어업, 무역은 억압하고 천시했다. 산업은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고 확장할 수 있으므로 사회의 가치관과 신분제 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특정한 기술력을 갖추고, 정보를 공유하며, 부유한 데다 실용적이고 역동적인 세계관을 갖춘 전문가 집단은 중앙에서 통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성리학자들은 산업의 발달을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로 간주했다. 그 결과 산업과 경제활동은 정체 상태에 머무르거나 후퇴해 국가의 부가 증가할 수 없었다.조선은 쇄국정책을 강화했으며 멸망 때까지 고수했다. 건국 초기부터 표방한 ‘사대교린’은 중국에 사대하고, 일본과 교류한다는 방침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쇄국정책이었다. 명나라는 왜구의 발호와 내부의 정치적 문제, 성리학의 영향 등으로 해금정책을 추진했고, 일본은 쇄국이라는 기조 속에 부분적인 개항을 허용하고 왜구의 존재도 묵인하는 정책이었다. 반면 조선은 완벽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국제적인 환경과 명나라의 영향도 있었으나 내부적인 이유로 개방정책을 취하거나 여러 나라와 외교나 무역을 할 의도가 없었다. 개방을 허용하면 다른 체제의 존재와 성격을 확인할 수 있고,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수용하고 경험할 수 있어 서열 체제 속에서 누리는 양반들의 특권과 조선사회의 근간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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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성리학 사상으로 이상사회 건설하려 했지만…관념적이고 원론적인 선언·정강이 새로운 문제 낳아
1592년 음력 4월 13일 황혼이 깃들 무렵, 700척에 탄 일본 병력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란 명분을 내걸고 20여만 명의 대군을 파견했다. 4일째 아침나절에야 상륙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병력을 파견했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은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다. 그사이 도망간 정부와 군대 대신 의병들이 전국에서 항전했고,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승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를 이뤘다. 이어 정유재란을 거쳐 7년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은 막을 내렸다.국제정세를 보면 알 수 있었고, 일본이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한다는 정보들이 유구국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심지어 간첩으로 활동했고, 훗날 향도 역할을 한 승려 겐소는 일본이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기이하고 무능한 정부는 갑론을박 끝에 서인인 황윤길과 동인인 김성일을 정사와 부사로 일본에 파견해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공격 가능성을 놓고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두 사람의 의견은 정반대였다.불가사의 한 일이다. 존재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는 정부와 군대, 관리, 지식인 그리고 백성들이었다. 왜 조선은 국방을 무시해 생존을 위협받았을까? 조선과 국민은 어째서 항상 가난했을까?조선 사회 붕괴에는 현실적인 상황 변화도 작용했지만, 국체와 정체 등의 근본적 성격이 연관된 것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헌법의 전문과 1조 1, 2항에 국체, 정체를 선언했다. 조선의 정체성은 주도 세력인 정도전이 1394년 태조에게 바친 《조선경국전》에 국가의 목표, 정책의 대강과 방법론 등이 담겨 있다. 여기서 ‘국민(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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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귀족 특권에 맞선 '수공업자 조합' 길드…정치참여 늘며 시의원 절반 차지하기도
일찍이 게르만족은 무기 제작과 관련이 깊은 대장간 일처럼 특수한 기예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는 수공업을 존중했다.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금속을 다루는 일 외에도 제빵, 정육업, 목수 등이 별도의 수공업 분야로 등장했고,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동업조합(길드·Zunft) 체제로 발전해나갔다. 문헌에 등장하는 동업조합 중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106년 결성된 보름스 어류상인 단체를 꼽을 수 있다. 전설상으로는 마인츠 방직업자 단체가 1099년 결성됐다고 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이어 1128년 결성된 뷔르츠부르크 제화업 단체 등 다양한 단체가 등장한다.초창기 이들 단체는 라틴어로 ‘fraternitas’ ‘consortium’ ‘societas’ ‘unio’ 같은 단어로 불렸고, 훗날 독일어로 된 사료에 따르면 북부독일에선 ‘Gilde’ ‘Amt’ 등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동부독일에선 ‘Zeche’ ‘Einung’ ‘Innung’ 같은 용어로 불렸고, 16세기 이후엔 독일어권 지역에서 ‘Zunft’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12세기 동업자 단체 길드 등장길드가 도시국가의 정치 영역에까지 큰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에선 13세기 초까지 대부분 도시에서 30~40개 길드가 활동했다. 베네치아에는 142개 길드가 있었다. 1380년대 크레모나에는 8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볼로냐에는 9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활동한 것으로 전해질 정도다.이들은 도시를 장악한 귀족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쳐 무장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면세특권을 철폐하고자 조직적 활동도 했다. 무장 조합들은 성인 또는 구역의 이름을 따거나 별, 선원, 말, 사자, 용 등의 문양을 내세웠다. 피렌체에서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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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유럽 곡물값 크게 오르며 사망자 수 전쟁국가 앞질러
평균 곡물가격은 1738년에서 1740년 사이 60%나 뛰었다. 한번 높아진 곡물가격은 1742년까지 떨어지지 않고 지속됐다. 몇몇 지역에선 곡물 가격이 두 배나 오르기도 했다.구체적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선 1737~1738년보다 1740~1741년 곡물 가격이 77.0% 뛰었다. 덴마크에선 같은 기간 곡물가가 71.4% 올랐다. 핀란드는 67.1%, 스웨덴은 60.0%, 아일랜드는 56.7% 급등했다. 스코틀랜드(52.9%) 독일(47.6%) 노르웨이 (44.1%) 등도 식료품값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남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지만 이탈리아(37.2%) 프랑스(35.7%) 오스트리아(33.7%) 잉글랜드(32.9%) 스위스(30.7%) 등도 부담이 급증하긴 마찬가지였다. 곡물가 오르며 저소득층 영양부족이처럼 곡물 가격이 비싸지면서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장기 영양부족 상태가 야기됐다. 당시 저소득층이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인구의 절대다수가 굶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 중반 유럽의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들에선 음식물과 음료 소비에 드는 비용이 가계 전체 수입의 60~7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이 같은 곡물가 상승의 여파로 1735~1739년에 비해 1740~1742년의 사망 증가율도 크게 높아졌다. 다만 곡물가 상승률과 사망자 증가율이 비례하지는 않았다. 노르웨이 사망자 수가 81% 늘어난 것을 비롯해 핀란드(51.8%)와 아일랜드(25.3%) 등의 사망률 증가율이 높았다. 프랑스도 사망자가 24.5%나 늘었고 잉글랜드는 23.4% 상승했다. 아일랜드, 노르웨이, 핀란드 등은 식량 부족 여파로 사망자 증가율이 당시 러시아와 한창 전쟁 중이던 스웨덴(22.7%)을 크게 웃돌기도 했다. 전쟁보다 굶주림이 훨씬 무서운 재앙이었던 셈이다.당시 프로이센, 폴란드,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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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왜구 경험이 일본 무역발전·군사대국화 토대 이루는 사이, 명나라는 해금정책 고집·조선은 권력다툼으로 쇠락중
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해 후추 등 향신료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1511년 ‘향신료의 섬’인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고,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해협을 거쳐 1512년에는 자바섬에 진출했다. 그런데 1543년 영파로 가던 배가 표류해 규슈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고, 이때 철포(조총)가 일본에 전달됐다. 1549년에는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규슈 남부인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1553년 마카오에 진출했고, 1557년 영유권을 얻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무역망에 참여했다. 복건(푸젠), 절강(저장) 등 동남 연해지역에서 현지 상인들과 활발한 밀무역을 전개했으며, 특히 일본의 은을 명나라에 수출하는 일을 했다.이 무렵 일본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상인과 선원, 선교사들이 들어가 소위 ‘남만(南蠻)문화’가 발달했다. 의술, 천문학, 조선술 등의 신기술을 비롯해 시계, 조총 등의 서양 물건, ‘빵’ ‘덴푸라’ ‘카스텔라’ 등 포르투갈에서 흘러들어간 음식 문화 등이 유행했다. 천주교가 수용돼 1582년에는 규슈 서부인 오이타(大分)현의 소년 4명이 바다를 건너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로마로 가 교황인 그레고리 13세를 알현했다. 1584년에는 에스파냐인이 규슈 북서부의 히라도에 도착했다. 이처럼 ‘일본의 쇄국’과 ‘조선의 쇄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일본에 굴복당한 조선처럼 된다.1588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를 근절시키는 법령을 발표한다. 결국 왜구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활동과 경험은 일본의 무역 발전과 군사대국화의 인적, 물적 토대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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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8세기 유럽 부흥기에도 농경사회의 한계는 못 피해
서양에서 18세기는 ‘위대한 세기’ ‘찬란한 세기’ 등 긍정적인 이미지가 보통 따라붙는다. 절대왕정과 계몽주의, 시민혁명의 시대라는 프리미엄이 적지 않은 것이다. 또 이때는 꾸준한 경제발전이 이뤄진 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식민지 개척에 따른) 생활공간 확대와 식량 증대의 시기’로도 불렸다. 최근에는 이 기간을 소비혁명이 발생한 시기이자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의 때로 보기도 한다.그 결과 인구도 증가했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라 차이가 크긴 하지만, 18세기 100년 동안 유럽 인구는 9500만 명에서 1억46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세계 인구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도 1700년 17~18%에서 1800년에는 20% 수준으로 높아졌다. 1700년 70~80만 명으로 추산되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수는 1789년 대혁명 직전에는 230만 명까지 늘었다. 전체 인구 증가율을 훨씬 웃도는 자본가 계층의 증대는 상업의 발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경제 발전으로 유럽 인구 급증영국을 중심으로 도시화도 빠르게 이뤄졌다. 1600~1800년 영국 인구는 111% 증가했는데 도시 인구 비율은 600%까지 늘었다. 특히 1750~1800년 유럽 도시 인구 증가율의 70%는 영국 몫이었다. 1800년에도 영국 인구가 유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 미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국의 도시화 비율 증가 속도가 가팔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도시화 물결은 이 시기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각지로 빠르게 확산됐다.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괄목할 만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에선 자연환경이 인구를 조절하는 ‘맬서스적 인구조정’이 두 번이나 크게 작동했다. 농경사회에서 인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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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적질하던 왜구들 국제환경에 빠르게 적응, 다국적 무역상 변신…동남아까지 활동 범위 넓혀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났고, 82년이 지난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동안 왜구 무리들은 어떻게 활동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강력한 일본군으로 변신했을까. 그리고 조선의 관리와 선비들, 백성들은 무엇을 했을까.1419년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인해 전기 왜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본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 주민들과 왜구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강온양면 정책을 폈다. 하지만 왜구는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부산) 왜변, 1555년에는 을묘왜변(강진·진도·영암)을 도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왜구가 침략한 내용이 312건이나 나온다.이 무렵 동아시아에서는 ‘후기 왜구’들이 발호해 주로 중국 해안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1368년 건국된 명나라는 1371년 주민들이 바다로 나가는 행위를 막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 민간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푸젠성·저장성·광둥성 등 해안에 견고한 성을 쌓고, 군사를 양성했다. 군선도 건조해 곳곳에 배치했다. 이런 해금정책은 300년 이상 존속되다가 1684년에야 폐지됐다.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원나라를 멸망시킬 때 적대적인 관계였던 장사성 등의 해양 세력이 성장하고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였다. 또 명나라는 이민족인 원나라와 달리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이라는 전통적인 중화주의 체제를 복원하고, ‘해양과 무역’이 아니라 ‘내륙과 농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왜구의 발호 때문이었다. 명 정부는 책임을 물어 1386년에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와 무역을 금지했다. 이후 1392년 무로마치 막부(1336~1573년)가 왜구를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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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친경 부활했지만 농업생산량은 급감 '아이러니'
광해군 이후에는 현종 대에 이를 때까지 친경의식이 치러지지 않았다. 친경이 다시 논의된 것은 숙종 대로 남인의 대표 허목이 옛 기록을 근거로 친경의례를 시행하자고 적극 건의한 이후였다. 하지만 친경의 ‘부활’은 쉽지 않았다. 마침 천연두가 유행한 탓에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친경 당일 큰비가 내려 관경대에 설치된 일월오악도 병풍이 찢어지고 소를 끌고 쟁기를 밀 수 없을 정도로 땅이 질척대자 친경 행사가 연기된 것이다. 다음날 현종 왕릉인 숭릉의 능침이 무너지는 사고까지 생기면서 친경의례는 아예 무산됐다.이후 오랫동안 중단됐던 친경의식은 영조 때 되살아났다. 영조는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1753년(영조 29년)과 1764년(영조 40년), 1767년(영조 43년) 친경을 거행했다. 1767년 영조는 세손과 함께 친경하고 고사에 따라 친잠(누에치기)도 하기로 했다. 이때 곡식의 종자를 받아 보관하는 장종의식을 같이 치렀다. 정조 때는 대규모 행사로 친경은 하지 않았지만 1781년 윤5월에 적전에서 보리 베는 것을 보는 의식은 거행했다. 친경의식은 고종(1871)과 순종(1909, 1910) 때까지 명맥을 이었다.국왕의 친경의례가 제대로 부활한 시기는 쌀이 전국 장시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는 교역상품이 된 때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가난한 하층민까지 쌀을 주식으로 소비했던 것이다.윤용출 부산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농업노동 같은 비숙련 노동자가 받는 쌀임금은 18세기 초 하루 8되 수준으로 상당히 높았다. 이는 1970년대 수준에 필적하는 것이지만 이후 쌀임금 수준은 1900년까지 200년간 하락하게 된다. 경상도와 전라도 다섯 지역에서 관찰된 논 1두락당 소작료도 174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