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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사치와 한탕주의가 불러온 금융위기 후 쇠퇴의 길로

    사치는 정말로 망국의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불변의 요인일까?베네치아나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같은 16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쇠퇴 원인으로 저명한 경제사가 킨들버거를 비롯해 대부분의 역사가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무역 및 생산의 약화,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의 경쟁에 따른 몰락, 해외시장 독점체제 붕괴, 목재 부족, 흉작, 기상악화 등)과 함께 ‘사치’를 빼놓지 않는다.15세기 피렌체에선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지배층이 고대 전성기 아테네 시민계급처럼 그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려고 했다. 덕분에 이때는 르네상스기 예술가들의 호황기가 됐다. 로렌초 기베르티는 1425년부터 피렌체 세례당의 화려한 동쪽 현관문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가 10만 굴덴을 주고 수출항인 리보르노 항구를 사들이던 해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계획해 완수하도록 위촉받았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를 ‘제2의 아테네’로 만들고자 했다.베네치아에선 15세기 갤리선에서 노를 저을 노수를 확보하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몰타섬 같은 식민지 출신 사람과 죄수들까지 동원해 갤리선 근무를 시켜야 할 정도로 경제 환경이 급변했다. 오스만투르크에서 노예가 수입된 반면, 탁월한 항해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베네치아 뱃사람들은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피사 등 다른 이탈리아 도시는 물론 멀리 영국 함대로까지 일자리를 옮겼다.이 같은 상황에서 베네치아에서 이미 한자리를 차지한 선원들은 흰담비 가죽으로 안을 댄 금색 옷과 같은 정교한 제복을 입기 시작했고, 점점 부패했다. 선원의 임금은 1550년대부터 1590년대까지 두 배로 올랐지만, 임금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권력 유지 위해 한자 고수하는 기득권자에 대응…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 만들어

    세종은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등과 《월인천강지곡》 500여 곡을 비롯해 《석보상절》 같은 불교 서적에 훈민정음을 활용했다. 이후 신권(臣權)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왕들은 《훈몽자회》 《삼강행실도》 《소학》 《천자문》과 각종 의서 편찬에 훈민정음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 ‘기적의 문자’ 훈민정음은 공문서 등 국가의 공적 역할은 하지 못하고, ‘언문’ ‘암글’ ‘중글’ 등의 비칭으로 불렸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왜 450여 년 만인 1894~1896년 갑오개혁 때야 비로소 나라글로 인정받았을까.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 조선 시대에 ‘문자’는 필수적인 기호가 아니었다. 우리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생태환경과 유별난 역사, 생물학적 특성 탓에 샤머니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매우 감성적이었고, 논리나 합리적인 사고에 서툴렀으며, 사회구조의 필요성도 약했다. 또한 조선은 농업 중심의 씨족공동체 사회였다. 따라서 상업·산업이 발달한 사회보다 거래와 소통이 덜 필요했고, 효율적이고 계량적인 문자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둘째, 한글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성리학자는 신분적으로는 양반이고, 경제적으로 유일한 재화이자 생산수단인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도덕과 학문·예술을 만들고 보급하며 감독하는 고위 관리 또는 출세를 고대하는 예비군이었다. 더구나 사대교린 정책을 선택했고, 자의식도 부족했으므로 임금의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이들은 끝까지 한자와 한문을 고집했다. 어려운 한자 … 해석에도 유추 심해한자는 ‘동이인&rsq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존 로의 무모한 시도로 '서방회사' 망하자…국민들 지폐와 주식에 강한 거부감 갖게 돼

    자신의 투자수익률을 확인하기 위해 백작과 공작, 백작 부인, 자작 부인 등이 매일 존 로의 집 앞에 줄을 섰다. 로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몰리면서 희망자의 10분의 1도 로를 보지 못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30분만 기다려도 난리가 났을 고관대작들이 로와 잠시 환담을 나누기 위해 6시간씩 기다리는 것도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로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술 한 모금이나 유리구슬 세 개를 받고 금덩어리를 통째로 내주는 팸플릿 광고로 사람들을 유인했는데, 실상 프랑스 파리의 투자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더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었던 셈이다.서방회사는 오늘날 루이지애나 등 미국 8개 주에 해당하는 지역의 상업권과 채광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지역 토지는 당시 프랑스 내 토지처럼 부가가치가 크지 않았다. 말라리아가 기승하는 늪지대였던 탓에 초기 식민지 개척자들이 잇따라 목숨을 잃었고, 기대했던 엄청난 규모의 광맥도 발견되지 않았다. 식민지 소유권은 주식을 매입한 사람들에게 약속한 배당금을 지급할 수 있는 만큼의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했다.존 로는 화폐의 본질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공공의 신뢰라고 믿었고, 프랑스 절대왕정이 그 같은 절대적 신뢰를 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서방회사가 수익을 내지 못했고, 존 로와 왕실은행은 화폐 발행을 통해 서방회사 주가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무너졌다. 1720년 10월 1만8000리브르에 달했던 주가는 순식간에 40리브르 수준까지 떨어졌다. 1720년 프랑스 국민에겐 엄청난 투자 손실을, 정부에는 막대한 부채를 남긴 채 은행과 회사 모두 문을 닫았다.존 로는 베네치아로 도망가 극도의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볼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영국 '남해회사' 투기열풍에 거품법 제정…주식회사 제도 100년 이상 인정하지 않아

    17세기 후반 스페인과의 전쟁 등으로 국채가 급속히 늘면서 영국 정부는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1711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를 설립했다. 회사가 국채를 매입하도록 하고, 정부가 남아메리카 지역의 무역독점권을 회사에 부여한 것이다. 1720년 영국은 투기 광풍에 휩싸였고 남해회사 주가는 10배 이상 올랐다. 남해회사 뒤를 이어 수많은 주식회사가 난립하는 등 투기 열풍이 전국에 확산됐다.위험을 인식한 영국 정부는 1720년 ‘거품법(Bubble Act)’을 제정해 민간회사가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되는 것을 금지했다. 거품법은 투기를 선동한 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새로운 회사를 설립할 때 의회의 허가를 받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미 거품이 가득 낀 남해회사의 주가가 폭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수많은 투자자가 파산했고 영국의 주식시장은 혼란에 휩싸였다. 남해회사 파산을 계기로 기업 경영의 투명성 확보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세졌다. 주식회사 제도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경계심도 커졌다.결국 영국 경제는 이후 100년 이상 주식회사를 현실적 제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남해회사 파산 충격으로 영국 경제의 성장과 산업혁명은 적어도 거품법이 폐지되는 1825년까지는 주식회사라는 근대적 기업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홀로 진행돼야 했다. 이에 대해 론도 캐머런 교수는 일시적 장애물에 불과했다고 보지만 영국의 역사학자 존 카스웰은 거품법이 영국에서 상업혁명의 출현을 40~50년가량 지체시켰다고까지 평가하기도 한다.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름만 ‘남해 버블’이 아니라 ‘미시시피 버블’로 달랐을 뿐이다.네덜란드 암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통하지 않으니…애민군주 세종, 독창성·탁월함 갖춘 한글 만들다

    한글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탄생한 글자다. 동시에 인류의 지적 성장, 향상된 사고능력, 과학의 발전, 진보된 사상(인간주의)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특히 개인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단기간에 창작한 글자란 점에서 주목받는다. ‘표음문자’여서 학습하기 쉽고 사용이 편리하다. 논리적인 음운체계 덕분에 사용자가 수리적 사고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가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구조와 제정 방식에 관심이 많다.필자는 역사학자로서 한글을 창조한 목적이 궁금하다. 세종은 세상을 변혁시킬 능력을 소유한 최고의 권력자였다. 국가경영자인 동시에 뛰어난 학자였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에 그의 사상과 구현 방식(논리)이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홍익인간 사상과 ‘3의 논리’이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표현됐다. 1446년 반포한 훈민정음 해례에는 목적을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했다. 당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이두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사정을 ‘어엿비’ 여긴 ‘어린 백성(愚民)’은 그리스나 로마의 특수한 시민이나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등장한 신사(부르주아지)가 아니었다.세종의 정책 근간은 백성의 생활 편의와 풍족함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농사에 도움을 준 점, 조세를 감면해 ‘공평화’를 도모한 점에서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의창, 혜민서, 활인서 등을 설치해 백성의 굶주림과 질병을 치료했다. 당시 이미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는 법까지 제정했다. 이런 세종은 모든 백성이 자기 존재를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민족 간 충돌·구성원 간 갈등이 판치는 시대…단군신화는 조화·합일 통한 상생 사상 추구

    일연은 《삼국유사》 첫머리에 ‘고조선(왕검조선)’ 조항을 세 부분으로 구성해 기록했다. 1부와 3부는 역사 서술의 형태고, 2부는 ‘석유환인(또는 석유환국) 호왈 단군왕검’인데, 24개의 신화소를 이용해 치밀하게 논리를 구성했다. 필자는 이 신화에 담긴 논리와 사상을 분석해서 세 가지로 정리했다.첫째, 천손의 후손이면서 농경문화를 선택한 집단이라는 자의식을 선언했다. 원조선의 성립과 우리 문화의 근간에 큰 역할을 한 이주민 집단은 서북방 초원에서 왔고, 하늘과 해를 신령스럽게 여겼다. 환웅과 임금인 환인의 ‘桓(환)’은 밝다·크다·하나다·빛나다 등의 뜻을 가졌고, 한국·한글·칸(王) 등과 동일하다. 그가 내린 태백산 꼭대기(太伯山頂) 당나무(神壇樹) 아래의 신시(神市)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가장 성스러운 원형이다. 따라서 이런 천손강림신화는 부여·고구려(백제)·가야·신라·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계승됐다.또 신화 속 웅(熊)은 지금도 곰을 숭배하는 동시베리아와 동북만주의 수렵삼림문화, 토지와 달을 숭배하는 남만주와 한반도의 농경문화라는 두 가지 논리축이 겹쳐 완성된 지모신(地母神)의 상징이다. 때문에 ‘웅’은 동물이 아니라 감·검·금·고마·개마 등과 마찬가지로 무당이나 신, 왕 등을 의미하는 알타이어다. 신라 왕인 이사금과 금성(경주), 고구려의 일본식 명칭인 ‘고마’, 백두산보다 먼저 고구려 때 사용된 개마산·개마대산 등의 명칭, 백제 수도인 곰나루(熊津) 등은 이와 연관이 깊다. 그러니까 ‘단군왕검’은 하늘과 땅의 결합으로 탄생한 신령스러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소금상인들이 화가 후원…학문과 예술의 전성시대 열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모두 청나라의 전성기라고 하는 건륭제 시대, 당시 장쑤성(江蘇省)의 상업도시 양저우에는 상인문화가 가미된 독특한 도시문화가 형성됐다. 양저우는 신사와 문인들에게 생계수단을 모색하고 문화·사교계에서 지위 상승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도시로 인식됐다. 융성하던 고증학의 대가들이 양저우를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배출됐고, 이를 기반으로 ‘양주학파’가 형성됐다.사대부가 아니더라도 학문에 대한 관심이 많은 곳이 양저우였다. 유명한 상인이었던 마왈관과 그 가문은 장사로 번 돈으로 집에 10만 권의 장서를 모았다. 마왈관의 아들 마진백은 건륭제가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 다수의 귀중본을 제공했다. 마진백은 제공한 책 중 776종이나 진본으로 채택돼 건륭제로부터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하사받았다. 마진백뿐 아니라 포사공, 왕계숙 등 지역 상인들도 500종 이상의 책을 기증해 《고금도서집성》을 받았다. 양저우의 염상 마유도 귀한 책을 많이 바친 기증자 명단에 포함됐다. 휘상 가문 출신 정진방은 베이징 한림원에서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 함께 《사고전서》의 교감과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당시 상인 중 상당수는 학위를 가진 신사이기도 했다.《사고전서》 편찬 당시 중국 각 성의 순무들이 제출한 4831종의 책이 《사고전서》에 수록됐는데 이 중 17.8%인 861종이 장쑤성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장쑤성 제출 저서의 대부분은 양저우에서 수집된 것이었다.하지만 양저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문화적 특색은 미술이었다. 부유한 재력을 지닌 소금상인(염상)들이 적극적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자연스럽게 각지의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조선시대 마을마다 글 읽는 소리 낭자하고…양반 문중마을로 숨는 사람 늘어난 까닭은

    조선시대 평민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기 시작한 것은 1626년이다.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명나라를 돕기 위해 용병을 모집했는데, 이 비용을 충당하고자 군포제를 시행했다. 문제는 이때 인조가 양반층엔 군역을 면제해주고 평민에게만 군역 면제 대가로 포(布)를 받았다는 데 있다. 조선 초에는 양역(良役)이라 하여 원칙적으론 양인을 대상으로 군역이 부과됐고, 양반가의 자제라 해도 군역을 지게 했지만 이제 양반들은 이 같은 속박에서 합법적으로 벗어나게 됐다. 이념상 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계급적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 관계로 상정돼 조세가 최대한 공정하고 가벼워야 한다는 ‘겉치레’마저 사라져버렸다.인조는 이 같은 세금 면제 정책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1626년 일반인과 양반층을 구별하는 새로운 호적을 마련했고, 이에 따른 호패를 발급했다. 후금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정부가 새로운 호적을 작성하자 조금이라도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군역을 피하려고 모두 (양반 대우를 받고자) 향교나 서원에 입학했다. 조상을 위조하는 환부역조(換父易祖) 등으로 양반을 칭하면서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재물을 관가에 바치거나 벼슬을 사고, 의원 역관 화원의 신분으로 지방의 수령을 얻거나 족보를 위조해 양반 행세를 하는 부류가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군역을 질 젊은이들이 모두 ‘국방과 조세의 의무’를 행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유학생으로 자처하고자 소리 높여 글을 읽으니 ‘전국에 글 읽는 소리가 낭자했다’고 전해진다.이제 병역 의무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만 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이들이 피해간 세금은 힘없는 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