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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백성들 소액 거래에 반드시 동전만 사용하게…시전 상인 동전 안 쓰면 장 100대·가산 몰수

    종이 화폐가 종이 조각이 돼 버리면서 동전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결국 1425년 전국 폐사(廢寺)와 각 도에서 거둬들인 동을 원료로 하는 주전 사업이 이어졌다. 동전 1문의 가치를 미 1승으로 해 기존 저화와 달리 소액 거래에도 쓸 수 있게 했다. 동전 전용 유통 방침을 정해 저화 1장을 동전 1문의 비율로 교환하기도 했다.동전 사용을 강제하기 위해 시전의 부상대고(많은 밑천을 가지고 대규모로 장사하는 상인)나 다양한 공장 가운데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자에게 장 100대, 가산 몰수 등을 규정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일상적인 두승 이하 소액 거래에도 반드시 동전만 쓰도록 했다.하지만 동전 사용이 공포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1425년 5월에 시중의 백성들은 동전 이용을 기피했다. 동전가도 하락해 미 1승에 전 3문으로 거래되는 지경이 됐다. 최초 화폐 발행 3개월 만에 화폐가치가 3분의 1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동전 가격이 하락하면서 동전을 녹여 동그릇을 제작하는 자도 늘었다.원활한 동전 유통을 위한 구리 채굴 양도 부족했다. 동전 통용이 결정된 뒤 전국적으로 동광산 개발이 추진됐지만 산출량이 미미했다. 1427년(세종 9)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3개월간 채굴한 동의 양이 300근에 불과했던 반면 이듬해 정월 일본 사신이 한번에 가져온 동철은 2만8000근에 달했다. 동전가격 하락하고 구리 채굴 양도 부족해결국 1445년 10월에 동전도 포기하고 저화를 다시 사용하는 방침을 강구하면서 세종의 동전 유통 실험도 끝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구리 채광은 무기재료를 얻기 위한 명목으로 그저 명맥만 지속했다.상업에 대한 국가 통제도 건국 초기부터 주요 국정 과제였다. 건국과 함께 조선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사신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된 몽골의 침략, 고려는 결국 개경서 강화로 도읍을 옮기는데…

    고려는 등거리 외교와 활발한 무역을 바탕으로 분열된 중국과 공존해왔다. 하지만 몽골의 등장으로 공존과 굴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정부는 강화로 천도했다. 고려의 강화 천도 사건은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고려 정부의 정통성 문제, 우리가 외세를 대하는 방식 등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고려와 몽골의 갈등은 1225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1231년 1차 침입이 있었다. 이후 몽골은 내정을 간섭하고, 압박을 가해 무신정권은 천도를 제의했다. 실권자인 최우의 힘으로 고종과 정부는 1232년 7월 6일 강화로 천도했다. 출륙하는 1270년까지 38년 동안 몽골은 고려를 총 아홉 차례 공격했다. 강화 천도를 두고 몽골의 고압적인 태도와 과중한 경제적 보상, 군사의 파병과 군비의 조달, 그리고 정치적 간섭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명분보다 중요한 실질적 이유가 있었다.첫째, 강화도는 수전 능력이 약한 몽골의 공격을 방어하며 장기간 항전하는 데 유리하다.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복잡해 외부 세력이 근접하기 힘든 지형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일부만 맞을 뿐이다. 강화 수로는 폭이 매우 좁고, 밀물과 썰물을 이용할 수 있어 도강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몽골군은 절대 수전에 약하지 않다. 몽골군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발하슈호·카스피해·흑해·볼가강 등을 건넜다. 그들은 최고의 기술자 군을 거느린 다국적 군대였다.둘째, 강화도는 경제적인 타격을 덜 받으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의 국가 재정은 대부분 초기에 설치한 13개 조창을 활용한 시스템으로 충당됐다. 납부된 세곡은 일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농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억제했던 조선초기…비단은 중국·금은 일본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1394년 집필한 《조선경국전》에서 장인과 상인에 대해선 아주 적은 분량밖에 할애하지 않았다. 이는 국가의 기반인 농업이 아닌 ‘부차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또 상공업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농업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생겨선 안 된다는 유학사상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실제 조선은 정도전의 구상처럼 ‘무본억말(務本抑末: 근본에 힘쓰고 말업을 억제함)’이라는 구호 아래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억압했다. 모시와 비단의류, 신발, 가구, 부엌가구, 가죽제품, 벽돌, 종이, 자기, 무기, 갑옷 등을 만드는 직업적인 장인은 언제나 소수였다. 제철과 야금인력도 극소수로 제한됐다.전국에서 중앙정부에 고용된 장인 숫자는 6600명가량으로 법률로 제한했다. 중앙에 130개 분야에서 2800명 정도가 배치됐고, 지방에는 27개 분야에 3800명이 할당됐다. 장인들은 중앙에 편중됐고, 주로 지배계층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다. 중앙정부 고용 장인 숫자 6600명 제한지방에선 노동 분화가 별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부분의 장인이 무기, 농기구, 종이, 베개 등을 생산했다. 지방에 등록된 장인 중 3분의 1은 경상도에 거주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마을별로 살펴보면 한 마을이나 지역에서 두세 명을 넘지 못했다. 종이 생산으로 유명했던 전라도 전주와 남원은 해당 기술 장인이 각각 23명씩 있었다. 경상도 경주 상주 안동 진주 같은 큰 도시에서도 대장장이나 야금장이는 한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 감영에는 12명 안팎의 ‘많은’ 장인이 배속됐다.조선은 건국 초부터 비단산업을 증진하려고 했지만 마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하이힐 굽 높이가 여성의 계급 드러내…프랑스 귀부인들은 16㎝ 킬힐 신기도

    여성들의 지위가 하이힐 높이로 구분되던 시대가 있었다. 신발의 높이만 봐도 신을 신은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었고, ‘천한 것’들은 감히 높고 세련된 신발을 신을 수 없었다.하이힐은 16세기까진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17세기 초가 돼서야 서서히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하이힐의 등장은 우연이 아닌 단계적 발전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우선 스페인의 무어인 여성들이 신었던, 목재의 높은 굽이 붙은 신이 하이힐의 선구로 여겨진다. 이어 물림쇠로 채우게 된 신의 굽이 이탈리아에서 유행했고, 나무신이란 뜻의 ‘조콜리’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이 신은 인기가 좋았는데, 특히 높은 굽의 신발이 인기를 끈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이 진흙과 쓰레기, 대변 등으로 지저분한 거리를 건너는 데도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신은 이 같은 실용적 목적 외의 다른 목적에서 더 주목을 받고, 그것이 사용 이유가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이힐을 신으면 키가 커 보여서 위엄 있는 인상을 풍긴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거리에 진흙탕이 없을 때도 여자들은 하이힐을 계속 신었고, 하이힐이라는 게 치마 밑에 교묘히 감출 수 있는 것인 만큼 키높이 구두처럼 애용됐다. 키 크게 보여서 위엄있는 인상 풍겨힐의 모양도 투박한 것에서 세련된 것으로 점차 변해갔고 여자들 간의 ‘구분 짓기’에 따라 힐의 모양도 세분됐다. 소시민이 신는 투박한 굽과 귀부인이 신는 신의 굽이 달랐고, 매춘부들이 신는 굽은 모양이 또 구분됐다. 특히 매춘부들은 결코 성큼성큼 걷는 법 없이 언제나 높은 하이힐을 신고 아장아장 걸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선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수도 빈에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양강국 고려의 밑거름 된 뛰어난 조선기술…'거북선의 원조' 과선으로 여진 해적 물리져

    해양의 나라 고려는 500년 역사에서 해군력과 조선술이 발달할 수 있는 다섯 번의 계기를 맞이했고, 잘 활용해 역사의 성공을 이뤘다. 건국자인 왕건은 ‘해군대장’·‘백선장군’의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제독이었다. 전형적인 해양세력이었다. 그가 초기에 사용하던 큰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 16보요, 위에 다락을 세우고,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방이 16보라면 20m 정도로 대형 돛대를 몇 개 설치한 큰 함선이다. 여진 해적들의 바다로 변한 동해11세기에 들어오면서 동해는 여진 해적들의 발호로 혼란스러웠다. 고려는 국가정책으로 해적 대응책을 강구했다. 동해안의 원흥진(함경남도 정평)과 진명진(원산)에 ‘선병도부서(해군함대 기지에 해당함)’를 설치했고, 예하부대로서 진(鎭)과 수(戍)에 수군을 뒀다. 그리고 해군력의 핵심인 함선 건조에 돌입했다. 1008년에 처음으로 과선(戈船)이라는 신형군함을 75척 건조했는데, 선체의 곳곳에 창을 꽂아 근접전을 펼 때 적병들이 갑판 위로 뛰어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접근이 어렵게 만들었다. 선수에는 쇠로 뿔(충각)을 부착해 적선과 충돌시켜 선체를 깨뜨려 침몰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70여 명 정도가 승선하며, 적재용량은 1000석 정도라고 한다.고려는 1050년에 전함 23척을 이끌고 초자도의 여진 해적을 공격했다. 1107년에는 육군과 협동으로 해륙양면작전을 벌이면서 북쪽에 있는 여진 해적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동해에서 활용한 이 전투선들은 높고 거친 파도, 편북풍 계열의 바람, 원양항해구역 등 동해의 해양환경과 여진족의 배·무기·전투방식을 고려해 만든 전선이었다. 필시 파도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대검귀족·법복귀족…신흥 귀족 늘어나자 대대손손 '귀족 혈통' 증명하는 족보 집착

    서양 역사에서 귀족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귀족의 어원이 된 라틴어 노빌리스(nobilis)는 ‘고귀한’이란 뜻의 형용사로 ‘사회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월함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노빌리스란 단어가 ‘고귀한’이라는 뜻 외에 ‘평판이 좋다’라는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귀족을 가름하는 기준은 자명해진다. 바로 평판이 좋은 집단을 가리켰던 것이다.귀족이란 평판을 얻기 위해선 귀족의 혈통과 미덕은 물론 ‘귀족다운 삶’의 방식을 좇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귀족의 영지를 구입하고, 상업을 포기하고, 검을 차고, 방패와 투구에 문장을 사용하고, 이웃의 혈통 좋은 다른 귀족과 친교를 맺어야만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준 없이 말이 근거가 되는 평판을 통해 귀족과 귀족이 아닌 것이 구분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확실한 측면이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경계는 불명확했고 손쉽게 귀족을 참칭하는 게 가능해졌다. 귀족의 일원이 되면 다른 계층에겐 허락되지 않던 특권과 기회의 문이 적지 않았기에 귀족이 되고자 하는 수요는 끝이 없었다. 실제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귀족에 합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이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귀족을 자처하는 일은 반복해서 일어났다. 때로는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들이 최고 귀족의 지위를 차지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특권 누리기 위해 귀족 자처하는 경우 급증영국의 울지 추기경을 비롯해 토머스 모어, 크롬웰 등이 한미한 출신에서 귀족으로 탈바꿈한 케이스였다. 그레이셤 가문, 세이무어 가문, 더들리 가문, 세실 가문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요·송 갈등 속…줄다리기 외교·무역으로 성장

    고려 50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는 요나라·송나라·서하·금나라·원나라(몽골)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 흥망을 거듭했다. 일본 또한 내부 갈등으로 혼란이 끝없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유동적이고, 전쟁으로 점철된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를 성공시킨 외교정책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현재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고려의 외교정책을 중국 지역의 상황과 연관 지어 단계별로 살펴보자. 후삼국 시대에 중국 지역은 남과 북에서 15개의 나라가 70여 년 동안 명멸하는 5대 10국이라는 대분열 시대(907~979년)였다. 만약 당나라가 존속했다면 통일신라의 내정에 간섭했고, 고려는 통일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천운인지, 이후에도 중국은 40년 동안 분열이 계속됐다. 만주에서는 거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고, 947년에는 요나라를 건국하면서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만리장성 남쪽의 북경 등 지역)를 차지했다.요나라는 배후가 되는 고려를 우호세력으로 만들 필요 때문에 사신을 계속 파견해 국교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국경선을 접한 요나라와는 불편한 관계였으나, 요나라를 배척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송나라는 문화와 경제, 무역을 중시하는 국가였고, 황해로 인해 군사적인 충돌의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요나라에 대항해 송나라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송나라는 고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려와 요의 관계를 의심해 외교의 중단이라는 파국 상태까지 이르렀다. 이때 특사 형식으로 바다를 건너가 송태조를 설득해서 7년 동안 단절된 외교관계를 복원시킨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역사상 국제무역 가장 활발했던 고려…인삼·청자 찾아 마팔국·아라비아서 오기도

    시대와 백성들이 선택한 고려는 출발부터 다양한 종류의 산업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사회였다.고려는 통일을 성취하기 전인 924년에도 7월에는 상선이, 10월에는 사신선이 황해를 건너가 산둥반도 북부의 등주(펑라이)에서 후당과 무역을 벌였다. 정국이 안정된 11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송나라는 운하도시인 동경(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상업과 무역을 추진했다. 거란을 의식하고 고려의 편의를 위해 국가항구를 산둥반도의 남단인 판교진(지금 산둥의 고현)으로 옮기고, 무역 업무를 도와주는 ‘시박사’라는 관청까지 설치했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하자 상업의 중심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1078년에는 명주(닝보우)에서 먼 바다로 나가는 주산군도로 들어가는 진해(칭하이)에 고려 사신과 상선들을 맞이하는 영빈관을 지었다. 1117년에는 닝보우에 고려사관을 설치했다.고려와 송나라는 보통 100명에서 300명이 승선한 선박을 이용해 상당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의복, 상아, 물소뿔, 옥제품, 술, 새(鳥), 차, 칠제품, 악기 등을 수출했다. 반면에 고려는 비단, 금제품, 은제품, 나전 세공품, 꽃방석(화문석), 자개박이 그릇, 인삼, 소나무, 부채, 종이, 붓, 먹, 가죽 등 수천 점을 수출했다. 1078년에는 송나라가 무려 100종이 넘는 품목과 6000건에 달하는 물건을 보냈고, 고려도 역시 그에 버금가는 물건을 보냈다.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는 민간무역이 발달했다. 기록을 보면 송나라 상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012년부터 북송이 멸망하는 1278년까지 266년 동안 무려 129회에 걸쳐 약 5000명이 왔다. 송 상인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산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