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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 후예 이정기와 후손이 세운 제나라, 55년 만에 멸망…망각한 우리 역사의 일부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한 요서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이정기였다. 안녹산의 군대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그는 761년에 사촌인 후희일과 함께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산둥의 등주로 이주했다. 산둥 지역은 우리와 연관이 깊은 동이인들의 핵심 터전이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은 물론, 끌려오거나 자발적으로 정착한 백제 유민도 거주했다.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데 필요한 우호집단이 충분히 있었고,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에도 적합했다. 유라시아 정치 질서의 변화와 이정기의 등장이러한 지역을 토대로 이정기 세력이 성장하고 있을 무렵 동아시아의 정세는 어떠했을까? 일본은 나당연합군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한 후유증과 새나라 건국이라는 혼란기를 극복하고, 신라를 공격한다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전쟁준비를 벌이는 한편 당나라의 현실을 정탐하고, 안정기에 들어선 발해의 문왕 정부와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반면에 신라는 경덕왕 때 지방을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등 안정적이었으나, 이미 분열과 갈등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현재 운남성 일대에서는 737년에 남조국이 통일을 이룩하였고, 이어 토번과 동맹을 맺으면서 당나라와 대결했다. 754년에는 진압하러 간 당나라 군대 7만 명을 전멸시키기도 했으며, 이 무렵인 779년에는 수도를 대리(大理)로 옮기면서 성장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갓 서른을 넘긴 이정기는 사촌인 후희일을 축출한 부하들에 의해 절도사의 지위에 올랐다. 당나라 조정은 765년 그에게 평로치청절도사의 관직과 이정기라는 이름, 그리고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陸運海運押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요서지역서 두각을 나타낸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 당 혼란기에 산둥반도 장악…제나라 건국으로 이어져

    사래 긴 논밭을 일구며 식구들과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 있는가 하면, 격동과 해일, 절망과 환희, 죽음과 죽임을 오가는 역사의 삶도 있다. 고구려를 부활시킨 대조영, 고선지, 그리고 망각된 이정기 같은 삶 말이다.781년 뜨거운 여름날 그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지척에 두고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을 주력으로 산둥지역을 지배하고, 영역을 넓히면서 오랫동안 숨기고 준비해 온 유민들의 한과 희망을 폭발시키려는 순간이었다. 당나라 정부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순간, 그는 악성종양으로 49세의 나이에 급서했다. 아들인 이납은 제나라를 선포했고, 멸망할 때까지 무려 55년 동안 고구려인들의 나라는 번영을 누렸다. 이정기의 탄생과 국제질서의 변화고구려는 70년 동안의 긴 전쟁에서 패배했고, 복국전쟁까지 실패했다. 유민들은 산둥성, 장쑤성, 심지어는 간쑤성, 칭하이성, 쓰촨성까지 끌려갔고, 남은 일부는 요하를 사이에 둔 벌판에서 고달픈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해의 수륙군이 732년에 당나라를 공격해서 대승했고, 바로 그 해에 이회옥(이정기)이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구려의 역사와 발해인들의 존재를 알았고, 10대 후반에는 ‘고선지’라는 인물이 파미르를 통과하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거둔 탄구령 전투와 751년에 ‘탈라스’에서 벌어진 동서문명의 대결전에서 대패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그때 고선지와 그 병사들이 자기와 같은 핏줄임을 안 청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이렇게 성장한 그가 역사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또 다른 고구려를 부활시키는데 기회를 마련한 것은 국제환경이었다. 당나라는 통념처럼 안정되고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약탈하고 쓸모있는 사람을 강제이주시켰던 몽골, 역참 설치해 교류…'진정한 세계화의 첫발' 평가

    칭기즈칸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서아시아의 패자였던 호레즘과의 일전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218년 몽골이 보낸 상단이 오트라르에서 살해되면서 불거진 호레즘과 몽골의 대결은 칭기즈칸 군대의 ‘잔인함’과 군사적 ‘천재성’이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호레즘의 심장이었던 부하라 공략은 칭기즈칸의 번뜩이는 기지가 빛난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사마르칸트를 경유하는 통상의 루트 대신에 현지인 투항자들을 길잡이로 활용해 키질쿰(붉은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강수를 뒀다. 1220년 전방전선 650㎞ 뒤에 있던 부하라 성문 앞에 몽골의 대군이 나타나자 부하라시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저항하면 학살 … 전문가는 몽골로 보내몽골군이 출현하자 방위병들은 400명의 투르크 병사만 성채 안에 남겨둔 채 줄행랑을 쳤다. 부하라 시민들은 다음날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항복했다. 일부 병사는 부하라시 요새를 점거한 채 12일간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몽골군의 공격에 결국 제압됐다. 이후 몽골군이 부하라에 대해 처한 행동은 이후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칭기즈칸 군대에겐 일종의 행동규범이 됐다. 특히 인력, 고상한 표현으로 인적 자원 처리에 있어서 그러했다. 우선 장인들(특히 무기 제조장인과 방적공)처럼 쓸모 있는 사람들은 엄선돼 동쪽의 몽골지역으로 보내졌다. 젊은이들은 몽골군의 다음 전투에서 활용될 ‘화살받이(arrow fodder)’로 잡혀갔다. ‘화살 폭풍(arrow storm)’이라고 불리는 집단 사격으로 적군의 혼을 빼놨던 몽골군은 적군의 공격에 대한 ‘싸고도 유용한’ 그러면서 ‘살아 있는’ 방어수단도 확실하게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중앙아시아를 떨게 한 고구려 출신 부대…끝내 모함에 몰린 '유민 2세대'의 좌절

    8세기 당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숙적인 투르크(돌궐)는 망했다가 다시 성장하는 중이었고, 서남쪽의 고산 지대에서는 토번(현 티베트)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왔다. 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불사했고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에게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고선지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단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발해 타클라마칸을 횡단했다. 그 속에는 용맹스러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평가되는 고구려 병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고선지는 평균 높이가 5000m가 넘는 파미르 고원을 건너 100일 동안을 행군한 끝에 오식닉국(현재 시그난 지방)을 급습했다. 연운보 전투를 벌여 적군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1000마리의 말과 무기 등을 노획했다. 72개 소국 점령한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그런데 그는 지친 병사들을 남겨둔 채 3일 동안 더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토번의 거점인 탄구령 정상에 도달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을 마침내 넘은 것이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소발률국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현시킨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그는 72개의 소국들에게 항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재빠르게 다가오는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그의 명성과 고구려 부대의 강인함은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 때문에 승리자인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선물거래 등 법·제도까지 만들게 한 튤립 투자…계속 오를 것이란 믿음이 사라지자 공황에 빠져

    당나라에서 모란꽃에 대한 투기 광풍이 불었는데 17세기 네덜란드의 모습은 당나라의 재판이었다. 16세기 중반 유럽에 들어온 튤립은 1634년 네덜란드에서 ‘튤립 광풍(tulipomania)’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반까지 확산된다. 부자는 물론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까지 튤립 거래에 뛰어들었고, 사람들이 튤립에 열광할수록 튤립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635년에는 튤립구근 40뿌리에 10만플로린이 투자됐다. 튤립이 너무 고가다 보니 미세한 무게 단위인 ‘그레인(0.064799g)’보다도 작은 ‘페리트’ 단위로 팔렸다. “완벽한 구근은 세상에 두 개만 존재”튤립이 귀한 존재가 되면서 사람들은 튤립을 ‘장군’ ‘제독’ ‘총독’ 등으로 불렀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스키피오 같은 역사상 위인의 이름이 붙기도 했고, ‘장군 중의 장군’ ‘제독 중의 제독’이라는 이름도 등장했다.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매케이에 따르면 17세기 튤립 광풍 기간에 ‘리프켄 제독’이라고 이름 붙은 400페리트짜리 튤립은 4400플로린 가치를 평가받았다. ‘반 데르 에이크 제독’ 튤립은 446페리트에 1260플로린으로 가격이 매겨졌다. ‘총독’으로 불린 튤립은 400페리트짜리가 3000플로린이었다. 가장 비싼 튤립은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라는 것으로 200페리트짜리가 5000플로린에 달했다. 이 종자는 상태가 좋지 않은 것조차도 보통 2000플로린은 갔고, ‘완벽한’ 구근은 암스테르담과 할렘에 1개씩 단 두 개만 존재한다고 발표됐다. 할렘에 있는 완벽한 구근을 얻기 위해 12에이커 건축물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제안까지 나왔다. 암스테르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당나라의 서역 정벌 영웅, 고선지 장군…고구려 출신 병사들과 파미르 고원 넘어

    지칠 대로 지친, 수 백 명의 당나라 군인들이 3일 동안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의 탄구령(坦駒嶺) 정상에 도달했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현재의 키르키트인 소발률국(小勃律國)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당나라를 압박한 토번과 사라센 제국당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숙적인 투르크(돌궐)는 망했다가 다시 성장하는 중이었고, 서남쪽의 고산 지대에서는 토번(현 티베트)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당태종은 토번의 임금인 송챈감포(松贊岡保)에게 딸인 문성공주를 왕비로 보낼 정도였다. 울면서 멀고도 먼 티베트까지 시집을 간 그녀의 애달픈 사연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토번은 이 무렵에는 더욱 막강해져 당나라의 장안을 위협하고, 서북쪽으로 진출해 파미르 고원의 산악 지대와 수십 개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그러면 당나라는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약화될 뿐만 아니라, 동로마까지 이어지는 물류망이 위험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받는 상황이었다.한편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왔다. 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불사했다. 3번이나 군대를 파견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은 고선지 장군을 선택해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윤명철,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고선지는 누구일까.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집 한 채 값을 훌쩍 뛰어넘던 당나라 시대 모란꽃…'네덜란드 튤립'보다 900년이나 앞섰던 투기 광풍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꽃을 사다(買花)’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장안의 봄이 저물려 하니(帝城春欲暮)시끌벅적 마차들이 다닌다(喧喧車馬度)모두들 모란의 계절이 왔다며(共道牡丹時)줄지어 꽃을 사러 간다(相隨買花去)귀천 따라 일정한 값이 없으니(貴賤無常價)낸 돈만큼 꽃송이를 보게 될 터(酬値看花數)(…)집집마다 따라들 하니 풍속이 되어(家家習爲俗)사람마다 정신없이 열중해 깨닫지 못한다(人人迷不悟)어느 늙은 시골 농부가(有一田舍翁)우연히 꽃 파는 곳에 왔다가(偶來買花處)고개 떨구고 홀로 길게 탄식한다(低頭獨長嘆)그 한숨을 알아채는 이 아무도 없다(此嘆無人諭)한 포기 짙은색 모란꽃이(一叢深色花)중농 열 집의 세금이라도(十戶中人賦)시가 묘사하는 것처럼 전성기 당나라 장안에선 오늘날 닷컴 열풍, 부동산 광풍, 펀드 열풍에 버금가는 모란 광풍이 불었다. 모란은 꽃으로 정원과 사원, 각종 연못과 공공기관을 장식하길 좋아하던 당나라 사람들이 최고로 친 꽃이다. 당대 시인 유우석(劉禹錫)은 “연못의 연꽃은 수수하긴 하지만 모란에 비해선 아취가 적다”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인 모란이 만개할 때 장안 전체가 들뜰 수밖에 없다”고 흥얼거렸다. 부의 상징인 모란꽃모란꽃(사진)에 대한 애착은 수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수와 당 왕실에서 시작돼 민간으로 빠르게 번졌다. 화려함을 좋아하는 장안의 귀족들은 모란을 앞다퉈 사들였다. 연꽃이 불교와 관련된 정신적 고귀함의 상징이었다면 빨간색과 자주색 모란은 부의 상징이었다. 자연스럽게 “여러 꽃을 보았지만, 모란보다 아름다운 건 없다”거나 “오만 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군사력·상업에 문화·종교까지 결합한…청해진 바다 영토 확대하며 신라 사회개혁 의식 높여

    장보고와 청해진 체제는 무장력과 해양력을 바탕으로 동아지중해의 운송업, 삼각중계무역, 보세가공업을 운영했고 문화교류와 이데올로기 통합도 주도했다. 자치권과 상업활동, 세금 혜택 등이 보장된 느슨한 경제특구에 해당할 수 있다. 장보고는 천민도 왕족이 될 수 있다는 사회 개혁의식을 확산시켰다.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에는 평화의 시대, 경제의 시대, 무역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라비아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 동로마까지 연결된 사막 실크로드와 초원 로드는 동아지중해 무역망과 긴밀해지는 중이었다. 국가들과 대상인들은, 무장력을 갖춘 해상 관리자가 해적들을 퇴치해 바다를 평정하고, 무역로를 보호해 주길 원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장보고는 고향인 완도를 해양요새 ‘청해진’으로 만들고 본국신라인들, 재당신라인들, 재일신라인들을 ‘범(汎)신라인’으로 네트워크화해 항로를 일원화시켰다. 국제무역과 국내산업을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인 청해진은 국제교통의 ‘인터체인지(IC)’가 되었고 신라와 당나라, 일본, 아라비아 상인들은 물론이고, 승려들과 사신들도 장보고 선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쌍방무역을 넘어 삼각 중계무역 … 문화상품까지 주도장보고는 무역시스템을 변화시켰고, 상업의 내용과 상품을 다양화하는데 일조했다. 당나라에 ‘대당매물사’라는 수입상인들과 교관선(무역선)을 파견해 당나라, 동남아시아, 아라비아의 고가품들을 수입했고, 신라의 산업제품들을 수출했다. 일본에는 수입상인(廻易使·회역사)을 파견하고, 직접 후꾸오까(福岡)시를 방문해서 사무역은 물론 공무역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