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왕의 농사짓기'친경의례'(上)
지난 4월 23일 서울 동대문구 선농단에서 열린 ‘2022 선농대제’에서 참석자들이 선농제례 봉행을 하고 있다. 선농대제는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곡식의 신인 후직씨에게 올리던 제사다. /뉴스1
지난 4월 23일 서울 동대문구 선농단에서 열린 ‘2022 선농대제’에서 참석자들이 선농제례 봉행을 하고 있다. 선농대제는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곡식의 신인 후직씨에게 올리던 제사다. /뉴스1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 2년(983) 1월 신미일에 ‘왕이 원구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태조를 배향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같은 달 을해일에는 ‘왕이 몸소 적전(국왕이나 천자가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설정한 의례용 토지)을 갈고 신농씨(神農氏)에 제사 지내면서 후직(后稷: 고대 중국의 관명으로 농사일을 주관하던 장관, 주나라의 시조인 기를 가리킴)을 배향했다. 풍년을 기원하며 왕이 친히 적전을 가는 의식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

고려 성종 때는 왕이 직접 토지를 가는 친경의례뿐 아니라 ‘헌종의식’도 처음으로 거행됐다. 헌종의식이란 ‘왕후가 육궁의 사람을 거느리고 동(늦벼)과 육(올벼) 종자를 싹틔워 임금에게 바친다’는 《주례》의 기록을 근거로 왕후가 올벼의 싹을 틔워 바치는 행사다.

성종대에 도입된 이 같은 친경의례를 받들어 이후 일부 왕이 실천에 옮겼다. 1031년(현종 22) 선농에 제사하고 적진을 친경했고, 1048년(문종 2) 후농제를 지냈다. 1134년(인종 12)과 1144년(인종 22)에도 적전을 친경하거나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1144년 이후로 왕이 적전에서 밭을 직접 가는 친경례는 거행되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에선 현실정치를 비판하면서 이상적 통치를 제안할 경우 “적전에서 예를 시행하자”는 논의가 빠지지 않았을 뿐이다. 윤소종(1345~1393)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이 적전에서 친경의례를 통해 민생을 위한 개혁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적극 제안하기도 했다.

왕이 농사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취하도록 본격적으로 요구받은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정도전(1342~1398)은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며 적전은 농사를 장려하는 근본”이라며 “임금이 적전을 친경해 농사일에 앞장서면 백성들이 ‘임금께서 직접 경작하시는데 미천한 하민들이 어찌 경작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겠느냐’ 하고는 모두 밭두둑으로 나갈 것”이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태조와 세종대에 이 같은 명분이 수용돼 관련 제도가 정비됐지만 실제 왕이 논으로 나간 것은 성종 때부터다. 고려시대에 성종이 친경의례를 도입했는데 조선시대에도 성종이 친경을 실천에 옮겼으니 묘한 인연이기도 하다.

1475년(성종 6) 1월 25일 조선 최초로 친경의식이 거행됐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때 상황을 ‘임금이 친히 동교의 단에서 선농제를 지내니 백관이 배제하기를 의식과 같이 했다. 해가 뜰 때 임금이 적전을 몸소 갈면서 5퇴(쟁기를 다섯 번 미는 것)를 한 뒤 관경대(觀耕臺: 적전에서 밭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만든 단)에 나아가니, 종친 월산대군 이정과 재신 신숙주가 7퇴를 했다. 다음은 판서인 이극배·정효상, 대사헌 이서장, 대사간 정관이 9퇴했다. 다음에 서인 100여 명이 100묘(畝)를 다 갈았다’고 묘사했다. 천자는 3퇴하고 삼공은 5퇴하며 제후와 대부가 9퇴한 뒤에는 농부가 마무리한다는 옛 법에 따른 것이다.

이날 행사의 기본 절차는 세종 때 마련된 규칙을 따르되 세부 절차에는 수정을 가했다. 특히 친경하는 의의를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부대행사에 관심을 많이 뒀다. 친경 후에 60세 이상 노인유생, 기생들이 가요를 바치도록 했다. 친경 후 국왕 이하 함께 밭을 간 사람이 모두 모여 술을 마시는 노주연도 이때 마련됐다.

성종은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 되고,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추울 때에 갈고 더울 때에 김매어, 땀에 젖은 몸으로 해가 다하도록 부지런히 노동하니 농사가 가장 간고하다. 위에 있는 사람이 진실로 몸으로써 권하지 않으면, 누가 즐겨서 밭에서 일하고 힘써 거두겠는가”라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다. 이에 ‘임금이 쟁기를 잡고 친경하니 반열에 있는 신료·군교·기로와 도성의 사녀 기전의 백성으로서 보는 자는 바라보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고 실록이 기록을 남길 정도로 반응도 좋았다.

이후 성종은 1488년(성종 19), 1493년(성종 24) 다시 친경례를 거행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친경은 말처럼 쉽게 거행되지 못했다. 연산군 1회, 중종 2회, 명종 1회, 선조 1회, 광해군 1회 등 ‘통과의례’로 재위 기간 딱 한 번만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흉년이나 전염병, 전란 탓도 있었고 기생과 노인, 유생이 가요를 바치고 어가행렬을 장식하는 일이 너무 성대해져 민생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도 꼽혔다. NIE 포인트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1. 왕이 친경의례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2. 고려와 조선시대 농업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3. 조선이 상공업보다 농업을 독려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