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마뉴 대제 270개 문서 중 100개 위조본
권력자·교인들 "천국 가기 위해 옳은 일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진장
"로마·이탈리아 영토를 교황에 넘겨주겠다"
세례받고 나병 치유된 황제의 약속 담겨
역대 교황들, 황제에 교권 우위 근거로 활용
1440년 논문서 내용 고증…위조로 밝혀져
40년 걸쳐 조작…"세계사에서 가장 큰 사기"
권력자·교인들 "천국 가기 위해 옳은 일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진장
"로마·이탈리아 영토를 교황에 넘겨주겠다"
세례받고 나병 치유된 황제의 약속 담겨
역대 교황들, 황제에 교권 우위 근거로 활용
1440년 논문서 내용 고증…위조로 밝혀져
40년 걸쳐 조작…"세계사에서 가장 큰 사기"

중세인의 위조 개념과 그에 대한 죄의식은 현대인과는 매우 달랐다. 위조를 한 주체는 바로 세속의 권력자와 교회 관계자들이었다. 이 같은 중세의 위조 행위를 두고 ‘도덕성의 무감각화’라는 윤리적 비난부터 사기행각이라는 시각, 중세 고유의 일반화된 심성이라는 해석까지 다양하게 전개됐다. 중세인들이 “천국으로 가기 위한 옳은 일을 한다”는 신념으로 적극적으로 위조 행위를 벌였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이런 흔하디흔한 위조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게 이른바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진장(寄進狀, Donation of Constantine)’이라고 불리는 문서다. 교황의 수위권과 교황 중심 교회를 확립하는 과정에 관여한 대표적 위조문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진장’은 326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동방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옛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이탈리아 전 지역, 그리고 로마제국의 서방 영토를 당시 교황이던 실베스테르 1세(제위 314~335)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서는 오랫동안 유럽 서방세계에서 세속 황제권에 대한 교황의 교권 우위를 정당화하는 증거이자 근거로 활용됐다. 역대 교황들은 황제와 갈등을 겪을 때마다 이 ‘기증 문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곤 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진장’은 동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과 교황청 간 대립 과정에서 등장했다. 756년 프랑크 왕국의 피피누스가 랑고바르드족을 정복한 후 영토 일부를 교황에게 기진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피피누스가 소유권을 넘긴 교황령이 비잔티움 제국에 속한 영토라며 반발했다. 이 시기 교황청 측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실베스테르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 형식을 띠고 있다. 문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315년경 나병에 걸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무리 해도 병이 낫지 않았다. 절망하는 황제의 꿈에 베드로와 바울이 나타나 그가 죄악 때문에 천형에 걸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실베스테르 교황이 그의 병을 고칠 것이라는 계시를 했다. 황제는 계시에 따라 교황을 궁전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이 황제에게 세례를 집전하자 마침내 나병이 치유됐다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후 교황좌가 황제의 옥좌보다 더 영광스럽고 고귀한 자리라고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소유한 권한 가운데 많은 부분을 교황에게 양도한다고 선포했다. 그 결과 로마 교황과 그 후임 교황들에게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등 4개 총대주교구에 대한 관할권과 전 세계 그리스도교를 관장하는 최상의 지위가 주어졌다고 선언했다. 이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황과 후임자에게 제국의 동서남북, 즉 유대, 그리스, 아시아, 트라키아, 아프리카, 이탈리아에 있는 영토와 섬들을 선물했다. 그리고 로마시와 이탈리아 전체, 서방 속주들에 대한 통치권을 교황에게 넘겨준다고 표명했다.
이런 내용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던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위조 문서를 통해 노골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위조문서 작성자들은 로마제국의 중심을 동로마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권위를 빌려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에 대한 교황의 우월한 권위를 내세우는 교황 수위설을 주장했다. 교황이 이 문서를 근거로 교회는 물론 세속사회에 대한 통치를 겸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하지만 이 문서가 제작 의도대로 8세기 이후 실제로 활용됐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진장’은 교회법 학자 그라티아누스가 1140년경 편찬한 <그라티아누스 교서집>에 실렸다. 교황이 실제로 이 문서를 인용한 사례는 1054년 레오 9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언급한 게 최초다. 그 후 이 문서는 교황의 세속적 권력 기반을 보증하는 중요한 근거로 기능했다. 문서를 위조한 사람은 당시까지 확립되지 않던 ‘보편교황’, ‘황제의 보호자’, ‘성 베드로의 대리자’ 등을 이 문서를 통해 주장했다.
문서의 진위를 두고 맨 처음 의문을 제기한 인물은 독일인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1401~1464)였다. 이어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1407~~1457)가 144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증했다고 선언한 문건의 허위성과 수정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언어학적 분석과 내용 고증을 토대로 이 문건이 실제로는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만들어졌음을 밝혀냈다. 그는 문서가 주장하는 315년에는 로마를 이전하는 문제도, 새로 옮길 도시의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문서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지명이 언급됐다고 지적했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세계사 바꾼 중세의 '위조 문서'](https://img.hankyung.com/photo/202508/01.41424526.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