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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거액 유산'을 둘러싼 로마의 유언장 대결

    로마 공화정 후기 쿠리우스 송사(訟事)는 로마시대 유언의 해석과 관련해 중요한 분기가 되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사건의 발단은 코페니우스라는 이름의 한 가장이 막대한 토지를 물려줄 상속인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을 지목하면서 불거졌다. 코페니우스는 생전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을 상속인으로 지정하지만 만약 그 아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한다면 마니우스 쿠리우스가 대신 상속인이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을 작성할 당시 코페니우스가 결혼했었는지 여부는 미스터리지만 아무튼 코페니우스는 자신이 아들을 보고 난 뒤에야 죽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보충상속인이 상속 자격을 갖췄는지 논란하지만 사람의 생사와 수명 문제는 하늘이 결정하는 법. 코페니우스는 그만 전 재산을 물려받을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식도 없이 죽어버린 이유로 법의 역사에서 유명 인사가 돼 버렸다. 사실 아들이 태어나기만 했어도 당시 로마법상 이 유언을 실행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마도 코페니우스의 유언은 허다한 평범한 유언 중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는 미성숙한 자를 위한 보충상속인(substitutio) 제도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보충상속인이란 유언에 의해 상속인으로 지정된 자가 재산을 물려주는 피상속인보다 먼저 사망하거나 상속을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대신 상속받을 사람을 지정해놓는 제도다. 당시 유언장에선 “루키우스 티투스가 상속인이 되고, 만약 루키우스 티투스가 상속할 수 없으면 마이비우스가 상속인이 된다”는 식의 문구를 손쉽게 볼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민주주의 꽃 피웠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가장 큰 ‘공업’ 생산 시설은 방패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이 시설은 물론 오늘날의 시선으로 볼 때 대규모라고 하긴 힘들다. 하지만 이곳에선 무려 120명의 노예가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플라톤의 《국가》에도 잠시 등장하는 시라쿠사 출신 케팔로스의 소유였다. 이 같은 대규모 노예경제 시설이 아주 이례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유명한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데모스테네스가 소유권 분쟁을 벌였던 부친의 재산에는 칼을 만드는 32명의 전문 노예 도공과 침대를 제작하는 20명의 소목수가 포함돼 있었다.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서 고대 세계를 ‘노예제 사회’로 정의내린 뒤 고전기 그리스 사회의 노예의 존재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시기 노예는 후대인이 생각하는 개념에 따라 칼로 자르듯 확실하게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건이나 재산처럼 인격이 완전히 상실되지도 않은 모호한 경계선상에 있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불분명한 정체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는 그리스 문명의 기본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이런 노예제를 자양분 삼아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었던 역설도 성립된다. 인류 역사상 고대 지중해 유역과 콜럼버스 이후 신세계에서 총 다섯 곳 정도 발견된다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존재인 노예제가 서구 고대문명의 핵심 지대에서 발현해 전성기를 누렸던 것이다. 정치·군사 부문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노예가 활동그리스에 노예제가 확산된 계기는 페르시아 전쟁이었다. 이전에는 대규모로 노예를 창출할 만한 큰 전쟁이 적었다. 헤로도토스가 동양의 전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착실한 준비로 백제와 고구려 무릎 꿇린 신라, 2단계로 당나라와 전쟁 이겨 삼국통일 이뤘다

    국가적 위기는 대부분 대혼란과 체제 붕괴로 이어진다. 고비를 넘겨 극복하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다.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이 그렇다. 신라는 6세기 초까지 약소국이었는데 약 150년 후인 668년 삼국을 통일했다. 거기까지는 1단계로 볼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리는 수준이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진정한 실현은 2단계인, 8년에 걸친 나당(羅唐)전쟁에서 승리하고 내부 안정을 완성했을 때다. 왕권 강화와 선진 문물 수용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우산국 복속(512년)을 시작으로 전략지구를 체계적으로 장악해 외교망을 확장하고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또 기존 체제와 신앙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인 끝에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진흥왕 33년에 사찰을 세우고, 전사한 사졸(士卒)들을 위로하는 ‘팔관연회’를 열어 사상의 통일을 유도했다. 통일사업의 주체인 자장, 의상 등은 유학 승려였고, 전통신앙과 불교가 조화된 화랑도는 종교 갈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김춘추의 활발한 외교활동신라의 통일정책 중 의미있는 것은 국제질서에 진입하고,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했다. 642년 의자왕에게 40여 개 성을 빼앗기고, 이어 대야성을 공격당해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달라는 제의를 거부해 옥에 갇혔다가 탈출했다. 고립무원 신세인 신라는 643년 당나라에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00년간 이어진 발해의 나라 되찾기 활동, 후발해국·정안국·을야국·대원국 등 세웠지만…

    10세기 들어와 동북아시아는 국가 간 질서재편으로 소용돌이쳤다. 당나라가 907년에 붕괴되면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대분열 시대가 시작됐고, 910년대에는 9개국이 난립한 상태였다. 토번(티베트)은 서남 지역의 영토를 대거 잠식했고, 몽골 초원에서는 세계사를 바꿀 ‘몽올’ 부족이 성장했으며, 840년에 멸망한 위구르 한(칸)국의 망명인들 또한 혼란을 일으켰다. 남쪽에서는 신라가 1000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중이었고, 신흥세력인 후백제와 고려가 긴박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제질서의 변화를 간파한 야율아보기는 동몽골의 초원지대와 요서에서 거란족을 통일(916년)하고, 서남쪽으로 토욕혼 등을 공격한 후에 몽골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거란은 925년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주변국 상대로 적극적 외교관계 모색그렇다면 위기에 직면한 발해는 어떤 자구책을 강구했을까? 신흥국인 후량과 후당에 몇 번이나 왕자를 파견했다. 신라 등(‘新羅諸國’)에 구원을 요청하는(《거란국지》) 등 타국과 우호관계를 모색했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왕건의 선조인 호경(虎景)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사냥꾼으로서, 성골(聖骨) 장군으로 불렸는데, 이는 발해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왕건은 발해 유민을 환대했는데, 거란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방문한 호승(胡僧)을 통해 후진(後晉)의 고조에게 “발해는 우리와 혼인했습니다(渤海我婚姻也)”라고 했다.(《자치통감》)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발해 멸망 후그런데 의문이 든다. 야율아보기는 발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전쟁의 정당한 몫을 받기 위해 요구하라"…3000년 전에도 불거진 '분배 정의' 목소리

    노력한 만큼 공평한 보상을 해달라는 ‘분배의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3000년 전 그리스 세계에서 처음 나왔다.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테르시테스가 처음으로 평등을 외쳤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전반적으로 귀족주의적 사상을 밑바탕에 둔 작품이다. 모든 좋은 것은 귀족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용모도 출중하고, 부유하며 용감하다. 성품도 훌륭하고 전투도 잘할 뿐 아니라 회의에서 말도 잘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좁은 농경사회 전통이 강한 분위기 속에서 지도자들은 운명적으로 리더의 자질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왕에게 반기를 든 ‘예외적 평민’ 테르시테스반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무명의 병사들은 영웅의 명예와 전공을 빛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병사 대다수는 개성을 찾아볼 수 없는 배경이다. 주인공급을 제외한 호메로스 작품 속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단일하고 밀착된 존재다. 그들은 변덕이 심하고 무책임한 신들에 의해 장기판의 졸처럼 움직인다. 그들은 또 별다른 존재 가치가 없기도 하다. 아킬레우스에게 “다시 전장에 나와달라”고 부탁하러 간 사람들(귀족들)은 자신들이 아카이아인 대다수를 대신해서 부탁하는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주인공 격인 영웅과 신을 제외한 인물들은 그나마 죽을 때에나 개인으로서의 존재가 조명받았다. 호메로스의 언어에는 생명을 가진 인간의 영혼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 육체에 해당하는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통 생명이나 삶으로 번역되는 희랍(그리스)어 ‘프쉬케’는 호메로스 작품 속에선 오로지 죽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적절한 대우에 3개월마다 교대근무…피라미드는 임금 노동자들이 만들었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바라보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저마다 생각하는 바는 다를 수 있지만 ‘강제노동’을 연상하는 것이 일반적일 듯싶다. 100년 남짓한 기간 2500만t에 이르는 엄청난 돌을 사람의 힘으로 옮겨 만든 피라미드야말로 노예의 고통을 표현하는 데 있어 최상의 상징물일 것이다. 칼 A 비트포겔도 피라미드를 “최소의 아이디어로 최대의 자재를 허비한 전제주의적 기념물”이라고 표현했다. 빵·맥주 등 구체적 임금 지급 기록하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처벌이 수반된 노예 노동으로 피라미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피라미드는 어느 정도 보상을 받는 일종의 ‘임금 노동자’가 만든 것이라는 게 역사학자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피라미드 건설과 관련해선 대규모 협동노동과 분업이 이뤄져야만 했고, 수십만의 사람이 같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돼야 했다. 이 과정에서 ‘채찍’만으로 대업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제로 피라미드를 만들던 고대 노동자의 야영지에서 발견된 흔적이나 테베 근방 데이르 엘 메디네에서 발견된 노동자 생활지 유적을 보면 모든 인부가 적절한(?) 대가를 받았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숙련공뿐 아니라 채석장에서 석재를 옮겨 공사현장에 쌓아놓는 단순 비숙련 노동자까지도 빠짐없이 일정한 대가를 받았다. 측량가, 제도공, 공학자, 목수, 채석공은 물론 화가와 조각가 등 숙련·비숙련 가릴 것 없이 모두 숙식을 제공받고 노동의 대가를 챙겼다.2010년 이집트 고유물최고위원회는 제4왕조(기원전 2575~2467년)시대로 추정되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노동자의 묘지군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파라오 무덤 옆에 노동자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거란 공격에 한 달 못 버티고 전격적으로 무너진 발해…다양한 종족 구성에 잦은 임금 교체로 정치 혼란 거듭

    한 나라의 멸망은 하루아침에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오랜 기간 많은 신호를 보내지만 깨닫지 못한 채 당할 뿐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 등이 그랬다. ‘발해국’의 멸망을 화산 폭발 탓으로 돌리려는 사고는 수백 년 쌓인 관습적 오류일 따름이다. 전격적인 거란의 공격요나라의 황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발해국은 대대로 원수인데, 아직 보복을 완수하지 못했다”며 925년 윤 12월, 푸른 소(靑牛)와 흰 말(白馬)을 죽여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냈다. 예상을 깬 겨울작전을 펼쳐 부여성(지린성 농안)을 3일 만에 함락했다. 발해의 노상(老相)이 3만 명의 군대로 저항했으나 패했고, 요군은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임금은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은 채 신하들과 함께 엎드려 빌었다. 228년의 역사는 허무하게 끝났다. 임금인 대인선과 왕비는 요나라에서 ‘오로고(烏魯古)’ ‘아리지(阿里只)’로 불렸는데, 끌려갈 때 탔던 말의 이름이다.발해는 신비한 나라다. 건국도 극적이었지만 붕괴도 전격적이었고, 멸망 원인과 시기도 불명확하다. 또 ‘발해’와 ‘발해인’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역사에 등장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으며,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고, 사방 5000리에 달한 영토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 발해는 왜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멸망했을까? 역사가 후손에게 줄 유산은 ‘자랑’이 아니라 ‘교훈’이며, 남 탓이 아니라 제 탓을 하는 자세다. 한 달도 못 버틴 228년의 역사21세기와 마찬가지로 국제관계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동아지중해 누빈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 오호츠크해부터 대마도까지…무역강국 과시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 및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원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처럼 모피 가공을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켜 왕실과 수령의 부를 확장시키는 수출품으로 활용했다. 또 강(江)어업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발해 또한 지역적인 특성상 목축업이 발달했다. 본격적인 무역 국가로 성장한 발해는 당나라에 무역을 겸한 사신단을 132차례나 파견했고, 투르크(돌궐)와도 교역했다. 일본과 정치·군사 교류에서 경제교류로 전환8세기의 발해와 일본은 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기 위한 정치·군사 교류에 비중을 뒀으나 9세기에 가까워지면서 냉전 시대가 끝나고, 무역의 시대로 바뀌며 발해·일 관계도 경제교류가 주목적으로 전환됐다. 발해는 일본에 공식 사절단을 34차례나 파견했다.발해 상단은 담비·호랑이·표범·말·곰 같은 짐승 가죽 등 양질의 모피, 꿀·인삼·산삼 등 토산품, 철·동 같은 광물, 명주·해표피·해상어 등으로 만든 수공업 제품, 다시마 같은 수산물과 함께 대모배(동남아시아산 붉은 바다거북 껍질로 만든 술잔) 등을 수출했고, 면·명주·수은 등과 돈을 받아갔다. 871년에 온 사신단에 일본 정부가 지급한 대금은 무려 40만전(錢)이나 됐다. 자연스럽게 발해악(樂) 등 각종 문화가 일본에 전파됐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심각한 무역 역조를 개선할 목적으로 발해 사신단 활동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9세기 초에는 사신이 입국하는 횟수를 12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