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금융과 산업 上
근대적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인 형태의 고도화된 금융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가 일궈낸 혁신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기반이 마련된 시기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였다. 경제사가들이 중세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평가하는 은행은 이때 등장했다. 1472년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은행이 설립됐다. 시에나에 있는 ‘몬테 디 피에타’도 그때 만들어진 현존하는 장수 금융기관 중 하나다. 이를 직역하면 ‘자비의 산’이 되지만 실제 기능은 전당포라고 할 수 있다. 유로존 재정위기로 2012년 무디스에 의해 신용등급이 강등된 현존 세계 최고의 은행 ‘몬테 데이 파스치 디 시에나’도 이때 설립됐다. 모두 ‘몬테’라는 이름이 조직명에 들어가 있다.기독교인들 사이에 대출이 금지되던 시대에 탁발수도회는 유대인들의 돈놀이를 추방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골고다 언덕에서 인류를 위해 희생한 예수를 본받아 재산의 일부를 기증해 자비의 돈 산을 쌓으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저당잡힐 물건을 들고 오면 그 물건 가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을 빌려주겠다는 아이디어였다. 이후 무이자대출이나 소액대출도 시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선만 해주면 가만히 앉아서 적잖은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이 ‘자비의 산’은 꼭 자비롭지만은 않은 수단으로 악용됐다. 가톨릭은 돈 밝히는걸 중죄로 꼽아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거운 돈주머니를 목에 걸고 있는 것으로 묘사됐고, 가톨릭교회는 돈에 대한 사랑을 가장 무거운 중죄로 꼽았다. ‘자비의 산’이라는 출구는 “부자는 지옥에 갈 운명”이라고 규정했던 시기에 나온 곡절이 많은 처방이었다.
이런 은행의 등장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서는 최초의 광범한 금융거래를 수행한 주체는 교황의 징세원이었다. 이탈리아 주요 영주들은 물론 저 멀리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베드로의 펜스’를 거뒀고 교황청은 거대 금융사업체였다. 그리고 교황의 징세원들은 영국과 북유럽의 여러 왕국까지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시에나의 사업가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로마와 함께, 로마를 위해’ 수행한 이런 사업은 순례나 면죄부·관명장 같은 ‘보이지 않는 수출품’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업은 14~15세기까지 피렌체와 시에나의 은행업이 유럽 대륙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가고 번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이런 거대한 사업에는 전문 관리자가 필요했다. 관리의 역할은 피렌체의 은행가들이 차지했다. 이미 13세기에 로마에서 정치적 위계와 종교적 위계는 서로 분리하기 어려울 만큼 일심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시에나의 은행가를 필두로 14세기 말엔 피렌체에서 봉건귀족과 크게 성장한 신흥 상인 부르주아지가 하나로 결합해 부유한 엘리트층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체계적으로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 경제권력뿐 아니라 정치권력도 장악해 들어간다. 양모 거래망 통해 피렌체 금융 확대유럽의 금융발달사에서 피렌체 기업가들의 지도력은 로마를 위한 종교 거래와 피렌체 사업가 자신을 위한 양모 거래를 결합한 형태로 진행됐다. 13세기 말에 급성장한 피렌체의 모직산업은 네널란드와 프랑스에서 대량으로 직조천을 수입해 피렌체의 숙련 장인들이 추가 가공하거나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잉글랜드 같은 원모 공급지가 늘면서 피렌체의 직포 생산은 더욱 늘었다.
피렌체의 금융망은 양모 교역이 만들어낸 조밀한 거래망을 활용해 확대됐다. 피렌체의 대은행가들은 양모 길드의 성원이기도 했던 만큼 국제금융업과 직포산업은 함께 외연을 확대하며 발전했다. 은행가로서 그들은 화폐와 채권을 양모로 변환했다.
해외 국가들이 교황에게 바치는 납부금을 양모로 지급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봉건 영주들이 금융상의 우대를 요구할 때 이들로부터 양모시장의 독점권을 반대급부로 얻어냈다. 그들은 또 국내외에서 직포 생산 자금을 대기도 했고, 완제품 판매를 위해 단기대출을 하기도 했다. NIE 포인트 1. 고도화된 금융업이 이탈리아에서 태동하게 된 이유를 알아보자.
2. 단테의 《신곡》을 읽고 독후감을 써보자.
3. 가톨릭교회에서 금융업을 금기시한 이유를 알아보자.